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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치의 선생님이 나를 대학병원으로 보냈다

자율신경실조증의 발열

by 미리나


만성 통증, 자율신경실조증의 불명열은 의지로 넘어설 수 없는 벽이었다.


원인 없는 그 발열 앞에서 대학병원 교수님도 끝내 나를 고쳐줄 길을 찾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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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화에 이어서


감염내과.

마침내, 때가 왔다.


드디어(?) 의사 선생님께서 살금살금 몇 차례 권유하시던 그 길로 발걸음을 옮기게 되었다.


원장님의 말은 부드러웠지만 숨어 있는 무게는 묵직했다. 겉으로는 인도하는 듯한 조언에 불과했지만 날카로운 기대와 압박이 느껴졌다.


한 발짝씩 내디딜 때마다 나는 이 길이 처음부터 예정되어 있었던 길이 아니었을까 하는 착각에 빠졌다.

시계의 초침이 맞물리듯 모든 것이 일렁이며 이어지는 그 흐름을 거스를 수 없었다.


발열은 끈질기게 달라붙어 하루를 갉아먹었고 내 체력과 인내심은 이미 바닥을 드러냈다.



미룰 여유는 진작에 증발했다.

서울은 의료파업으로 더욱 얼어붙은 땅, 멀리서 보면 거대한 성처럼 보였지만 막상 다가가면 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웃기게도, 그 성벽 앞에 서 있는 건 다름 아닌 나였다.

그리하여 2024년 6월 18일, 대학병원도 갈 겸, 중단했던 치료를 다시 받을 겸 대구로 내려왔다.



교수님과의 면담은 약 30분 정도 진행되었다.


발열로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내 모습을 보시고는 그동안의 증상들을 꼼꼼히 확인해 주셨고 그런 세심함이 정말 감사했다.


계대에는 두 곳이 있는데, 교수님의 진료를 받으려면 본원으로 가야 한다. (교수님은 상주하지 않고 주 1회만 오신다고 들었다.)


진료 중간에도 콜이 올만큼 그 바쁜 시간에도 교수님은 내 증상과 자율신경실조증에 대해 꼼꼼히 물으셨다.


나는 그 질문 하나하나에 차분히 빠짐없이 답해야 했다.



불완전한 말, 불완전한 나



전문가라고 해서 소통이 항상 단순하지 않을 것이다.
질병은 복잡하고 환자의 이해 수준도 제각각이다.


환자 역시 자신의 몸과 마음 상태를 정확히 전하기 어렵다.


통증과 불편은 객관적으로 표현하기 힘들고 의료 지식의 부족으로 오해가 생기기 쉽다.

결국은 의사와 환자 모두에게 설명과 전달은 결코 간단하지 않다.


의료 소통은 말 한마디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서로의 노력+이해가 함께해야 완성된다.






내 증상은 수많은 끄트머리를 풀어놓는 것만으로도 온몸이 무겁게 느껴졌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어떻게 그 끝을 말해야 할지 몰라 마치 감춰둔 비밀이 너무 많아져서 결국 입을 열지 못하는 것 같았다.


어떻게 공유할지, 어떻게 정확히 표현할지, 그것에 대해 생각을 거듭할수록 더 많은 말들이 입 안에서 맴돌았다.


내가 제대로 말하지 못할까 봐, 그 불완전한 표현으로 내가 전할 수 있을까 봐 두려웠다.



불완전한 이해의 경계에서



주치의 선생님 앞에서는 굳이 말을 꺼내지 않아도 편했지만 초면인 의료진 앞에서는 내 복잡한 증상을 풀어내려니 시험도 안 보고 낙제 판정받는 기분이었다. 웃픈 건, 환자인 내가 문제를 내고 내가 틀렸다는 거다.


손에 묻은 얼룩을 지우려 애쓰는 것과도 같았다. 지우면 지울수록 더 번지고, 끝없이 새 얼룩이 생기는 것처럼, 설명들이 무한히 늘어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의료진도 그 말을 경청하고, 환자의 입장에서 이해하려는 진지한 노력이 뒤따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두 사람의 대화는 무용한 마주침이 되어버린다.

말이 어쩔 수 없이 공중에서 떠다니기만 한다.


나는 그나마 좋은 의사 선생님을 많이 만났다.
그들이 아니었다면 내가 그 실타래를 풀 수 있을지 모르겠다.


때때로 그 실타래는 너무나 얽히고, 때로는 놓을 수밖에 없다는 걸 알게 한다. 좋은 의사들이 있었기에 나는 그 실타래를 놓지 않고 지금도 끌어안고 있다.


2024년 6월 25일 화요일


감염내과에서도 특별한 치료가 없어 균 배양검사를 하자고 했다. 혈액을 20통이나 뽑아갔다.




주치의 선생님께 톡을 보냈다.

괜찮다는 말씀을 듣고 싶다는 말이 지금 보면 너무 엉뚱하지만 “나는 정말 괜찮은 걸까?” 하는 마지막 확인 본능이었다.


대학병원에서도 큰 이상 없다고 했는데도 마음 한구석은 조금 불안했다.


그래서 처음 나를 진료했던 나의 상태를 가장 잘 아는 주치의 선생님께 진짜 괜찮다는 확신을 신뢰하는 사람의 입으로 듣고 싶었다.


나를 전원 했으니 내 상태가 괜찮다는 결과 보고를 하고 싶었던 마음도 있었다.


"당신이 걱정해서 보냈던 환자, 지금 무사해요."


감사, 안도, 정서적 의존, 모든 게 범벅되었던 걸로 기억한다.


낯선 병원에서 진료, 전원, 검사, 진단, 해석... 온갖 과정을 거치다 보면 지쳐서 마지막에 감정적으로 닫아야 끝났다고 느꼈다.


괜찮다는 말을 들어야 “이 긴 여정이 끝났구나” 하고 마음이 진짜 마무리될 것 같았다.


나는 정확한 진단보다도 “괜찮아요!” 한마디에 위로를 받는 순간이 많았다.


마치 복잡한 문제집 대신 “틀려도 괜찮아”라는 낙제장 허락서를 받은 기분이었다.



원장님께 답변이 왔다.



"지금처럼 감정을 지켜보는 지혜, 초딩 때 소풍 가서 보물찾기 하듯 주변을 돌아보며 감사할 것들을 소중하게 찾아내는 호기심 등이 미리나 님을 더 평화로운 세계로 인도할 거라 믿습니다."


그래, 몸도 무거운데 마음이라도 가볍게 살자!!



의사 선생님을 안심시켜드리고 싶었다.



좋은 교수님을 만나셨네요
밥이라도 사드리고 싶어요

좋은 의사란 자기 환자를
믿고 맡기는 사람일 수도 있구나.



주치의 선생님은 내 발열에 대해 좀 더 정밀한 진단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시어 진료를 의뢰해 주셨던 것.



무겁게 내려앉은 그 감정은 오래된 상자 속에 숨겨두었던 물건들이 한꺼번에 쏟아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밀려오는 파도 속에서 애쓰는 건 어쩌면 허무한 싸움인 걸 알면서도 도망치지 않고 그 자리에 서서 무엇이든 전해야만 할 것 같았다.


그렇게 쌓여 있는 것들이 터져버리면 그 작은 물방울은 거대한 홍수가 되어 버릴까 봐, 그 걱정이 나를 괴롭혔다. 한 사람의 힘으로는 다 감당할 수 없다고 생각해 이 혼자만의 싸움을 내버려 두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누군가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았다.


혹시 그들이 나를 또 다른 병원으로 보낼까 봐 불안했던 마음이 생기면 나는 조금 더 현실을 직시하려 애썼다.


지금 이 상황이 나에게 어떤 의미일까, 나를 이해하려고 하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그런 의문들이 계속 맴돌았다.

내가 원하는 건 진심으로 나를 돌봐줄 사람 한 명, 그 분만 있으면 충분했다.






다음 날, 병원에 방문했다.


"원장님, 어제 잘 다녀왔어요."


흐뭇하게 웃으시더니, "잘하셨어요! 인스타 봤어요.

소풍 가듯 그렇게 지구별 여행을 하면 되는 거예요."


병원을 소풍처럼?...^^


주사 치료 중 잠시 멈추고 또 말씀하셨다.


“그 교수님, 진짜 좋은 분이네요. 밥 한번 사드리고 싶네요.”


오잉?


의외의 답변이 돌아왔다.


내가 만난 의사들 중에 이렇게까지 반응하는 의사는 처음이었다.


그냥 ‘좋으셨군요’ 한마디로 끝낼 수도 있었을 텐데 일면식도 없는 교수님을 "밥 한번 사드릴 정도로 좋은 분"이라고 표현하는 의사 선생님이 내 앞에 있다니 머리가 멍해졌다.


"함께 잘 이겨내 봅시다.
아무 생각하지 말고..."


말끝을 흐리시며 “주사 맞느라 수고했다” 하시고는 조용히 자리를 뜨셨다.






밥을 사겠다는 말은 사회적 인사도, 빈말도 아니었다.

내가 지금까지 받아온 진료 태도,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통해 느낀 진심이었다.


누군가가 누군가를 진심으로 존중하고 있었고 그렇지만 그 진심이 내게 돌아올 때는 어딘지 모르게 어색하고 쑥스러웠다.


그래서 나도 얼떨결에 진심을 다해 말하려 했으나 원장님은 주사 치료에 집중하시고, 나는 원장님..." 하고 말이 끊겼다.


잠깐의 멈춤. 그리고 다시 이어진 치료.

어쩌면, 그 멈춤이 우리 관계의 모든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좋은 의사, 좋은 마음


자신의 환자가 다른 의사에게 잘 다녀온 것을 진심으로 기뻐해줄 수 있는 사람.


경쟁 대신 존중을, 선 긋기 대신 연결을 선택하는 사람.


그런 의사에게 치료받고 있는 나는 생각보다 훨씬 큰 행운을 누리고 있다는 것도,
나는 그 행운을 알지도 못하고 지나치고 있을지도 모른다.


‘의사’가 ‘의사’를 존경할 때 생기는 드문 감정은 아마도 환자로서, 사람으로서, 나만 느낄 수 있는 감정일 것이다.


그런데 그 감정의 정체를 알기도 전에 나의 몸은 그 온기를 받아들여버린 것 같았다.


흔히 생각하는 차가운 병원에서 따뜻한 말 한마디가 나를 잡아주고 있었다.


그 진심 속에서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어쩐지 조금 불편했다.






그렇게 좋을 수만 있다면, 내 몸과 마음이 더 나을 수 있다면, 왜 나는 여전히 이렇게 자꾸 불안한 걸까? 왜 내 속의 빈자리는 여전히 채워지지 않는 걸까?


나는 그 진심에 의존하고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게 뭐가 문제일까, 그 진심이 나를 살리고 있었는데.


의료계에서 동료를 밥을 사주고 싶다고 말한다는 건 상대의 태도와 실력을 깊이 인정하는 것이다.

“내가 정말 고마운 마음이 들 만큼 좋은 의사였어요”라는 말의 함축이 아닐까.


내가 교수님께 안정감을 느끼고 돌아왔다는 걸 들으신 주치의 선생님은 의사로서 안도감을 느끼셨나 보다.

“그 교수님 덕분에 당신이 조금이라도 편했다면 그건 저한테도 참 기쁜 일이에요.” 하고 말이다.


고마움이란 게 꼭 나를 향할 필요는 없다는 걸 그날 처음 알았다.


좋은 의사는 좋은 마음을 알아본다.


그리고 나는, 그 마음들 사이에 있었던 환자였다.



정성을 담은 '의뢰서'
숙제가 만들어준 진심



이렇게 상세하게 의뢰서를 적어주는 의사도 처음 만났다.


그 의뢰서를 받은 의사라면 분명히 정성을 쏟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어떤 의사라도 이 정도의 세심함을 확인한 뒤에는 환자의 상태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지 않겠는가.


작은 디테일까지 놓치지 않으려는 의지와 정성! 수많은 정보와 신경 쓰인 부분들이 곧 나에 대한 이런 배려는 마음에서 나오는 진정성의 표출이었다.


받는 입장에서 신뢰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무게였다.


그리고 참 다행이었던 것은 교수님이 최근 두 달간의 발열 양상에 대해 물으셨을 때, 미리 기록해 둔 내용을 자신 있게 보여드릴 수 있었다는 점이다.


발열 기록을 하라고 숙제 내주신 주치의 선생님께 감사한 마음이 쓱-스쳤다.


"상기 환자는 다발성 통증으로 통증치료를 시행하던 환자입니다.


최근 2개월 간 지속되는 intermittent fever(up to 41도), frequency 주 2~5회, duration평균 2~5시간 지속되어 타 병원 내과 및 수술을 위해 입원한 병원에서의 lab검사에서 특이소견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항생제 부작용이 심하고 진통 해열제에 잘 반응하지 않는 상태입니다.


본원에서 자율신경계 치료하면서 발열은 최근 38도 정도로 줄었으나 빈도는 줄지 않았습니다.


심계항진, 불안 및 전신통증 등의 신체반응은 호전되고 있으나 발열이 간헐적으로 지속되어 정확한 원인을 확인하고자 의뢰드리오니 고진선처 바랍니다.





발열이 오래 비켜가지 않으리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그 짧은 찰나를 꼭 붙잡았다.


그 잠깐동안은 세상은 더 이상 적이 아니었고 나는 비로소 삶과 화해할 수 있었다.


화해는 한순간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용기일지도 모른다.


그 짧은 여유를 통해 나는 끝없이 밀려오는 불안과 싸워왔던 나 자신을 용서할 수 있었다.



나의 곁에는 진짜 ‘치료자’가 있다



지식을 제시하되 강요하지 않는 태도.

통증이 고통으로 넘어가지 않게 지켜봐 주는 시선.‘동행’으로 환자를 환자 이상으로 대해주는 마음.


이 모든 것은 흔하지 않다. 그분은 진짜 의료인이었고 나는 그분의 환자라서 정말 행운아였다.



2024년 6월 20일

일기장 발췌


나는 내가 수국 같다고 느낀다. 매년 화려하게 꽃을 피우는 것도 아니다.


어떤 해에는 아예 꽃이 피지 않기도 한다.


그저 잎만 무성하게 달릴 때도 있다. 그런 내 모습이 참 수국을 닮았다.

벚꽃이나 매화처럼 정해진 계절에 피어나는 꽃들처럼 나도 그렇게 살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부러운 마음이 들 때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렇지 못했다.


어떤 해에는 작은 성취를 피워냈지만 아무것도 피워내지 못한 채 지나가 버린 시간도 많았다.


꽃을 피우지 않는 해에도 잎은 자라고 뿌리는 더 깊어지겠지?


수국은 자신의 계절을 기다릴 뿐이라는 것을 꼬옥 기억해야지.


때가 되면 나 역시, 내 계절을 피우고야 말 것이라고...




자율신경이 흔들린 몸은
내 마음과 상관없이 울고 웃는다.



마음은 속수무책인데 몸은 왜 이토록 시끄럽게 반응하는지 알 수가 없다.


팽이처럼 돌고 도는 기분 속에서 조금만 힘이 빠져도 그대로 휘청, 끝까지 미끄러질 것만 같다.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눈물은 멈추지 않고 무엇이 슬픈지도 모른 채 흐른다.


그런데 또, 한여름 폭우 끝에 떠오른 무지개처럼 금방 웃음이 번진다.


슬픔도, 웃음도 더 이상 내 의지와는 무관하게 저절로 일어나고 저절로 사라진다.


고장 난 TV처럼 볼륨도, 채널도 제멋대로 오르내리는 하루.


화면 앞에 앉아 조용히 지켜보는 수밖에 없다.




감정은 계속해서 엉켜버린 선처럼 아무리 풀어도 다시 얽히고 내가 가고 싶지 않은 길로 데려 다닌다.


그러다가 내가 내 몸을 조종할 수 없다는 걸 깨닫는다.

내가 지배하려고 한 게 아니라 나와 상관없이 살고 있는 것이다.


어떤 날은 내가 울고 싶지 않아서 눈물을 삼켜도 그 눈물이 억지로 내게로 돌아와 입술 끝에서 터지듯 흘러내린다.


내 몸은 내가 아닌, 내가 아닌 그 무엇이다.



세로토닌의 대부분이 장에서 분비된다고?



자율신경이 소화기에도 영향을 준다는 것을 주치의 선생님의 인스타에서 보고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다음 날 진료실에 들어서자마자 “원장님! 저 그거 정말 몰랐어요!” 하고 말했다.


그런데 원장님의 설명을 듣고 나서야 2차 충격!


그동안 세로토닌은 당연히 뇌에서만 분비되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소화기관이 주 생산지라는 것 아닌가.


내 몸인데도 내가 이렇게까지 모르고 있었다는 게 부끄럽고도 아찔했다.


늘 나 자신을 가장 잘 안다고 믿었지만 돌아보니 나는 내 몸이라는 책의 첫 장도 제대로 펼쳐보지 않은
무지한 독자였다.


"몸이 이렇게 복잡했을 줄이야."


중추신경계와 장에서 생성되지만 그 비율은 다르다고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


뇌의 세로토닌은 장에서 직접 이동하지 않고 뇌 안에서 별도로 합성된다나?


그렇다면 내 감정과 몸이 이렇게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걸 이제야 제대로 알게 된 것일까?


몸과 마음이 서로 얼마나 깊게 얽혀 있는지를 잘 모르고 살아왔으니.


매일 몸을 끌고 다니고 감정을 갖고 있지만 숨겨진 연결고리들을 놓쳤다.


그냥 몸은 몸, 감정은 감정, 이렇게 나누어 생각했으니까.


그렇게 내 자율신경은 나의 감정을 속삭이거나 때로는 소리쳐 울부짖거나 했다.


그때 내가 그 경고를 무시하고 지나갔다면 몸을 더 불안정한 상태로 몰아넣었으려나?



나는 이제 자율신경검사를 절대적인 기준으로 신뢰하지 않는다.

수치가 사람을 다 설명할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몸은 숫자보다 더 복잡하고 마음은 그래프에 담기지 않는다.


어떤 날은 결과가 좋아도 아팠고 어떤 날은 수치와 상관없이 숨이 트였다.

내 몸을 가장 잘 아는 건 검사지가 아니라 나 자신이었다.


그래서 이제는 참고할 뿐, 내 감각과 경험을 더 믿는다.


예전엔 불안이 커서 검사해 달라며 의사 선생님을 조르곤 했다.


한 달도 안 됐는데도, 그 종이 한 장이 전부인 것처럼 매달렸다. 그땐 그랬다.


마치 깊은 물 위에 떠 있는 종이배 한 척, 누가 봐도 가라앉을 게 뻔한데 나는 그걸 꼭 쥐고 있었다.


구명조끼가 아닌 줄 알면서도 손에서 놓질 못했다.

그게 전부였으니까.






내 기준 검사는 처음 한 번, 치료 후 한 번이면 충분했던 것 같다.

다시 검사를 받아도 결과가 달라질 리 없고, 또 마음이 흔들릴 게 뻔하니 그만두기로 했었더랬다.


어쩌면 불안하고 두려움에 떠밀려 살던 그 시절의 내가 아직 내 안에 남아 있어서 그 종이배를 다시 띄우려 했던 건 아니었을까.


당시 의사 선생님의 “괜찮다, 검사는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은 내 귀엔 잘 닿지 않았다.

내 돈 주고받는 검사인데 왜 그러시는지 살짝 이해가 가지 않았다.


오히려 말리셨다.
그러면서도 이내 “인식이 참 많이 달라졌어요”라며 나를 한껏 북돋우셨다.



내 몸이 자라고 있다
내 몸을 믿는 용기



자율신경의 특성에 대해 차근차근 설명하시면서도 그분의 마음속에는 내게 진짜 필요한 건

더 많은 검사가 아닌, 내 몸을 믿는 용기라는 걸 알고 계셨으리라.


하지만 나는 그걸 몰라서 무대는 비어 있었는데 혼자 조명을 켜고 있었다.

끝없는 질문에 답하려 애쓰며 정해진 답 없는 문제지 앞에서 온몸을 쥐어짜고 있었던 것이다.


과거의 나야, 딱하기도 하여라.


완강하게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말 한마디가 어쩌면 더 큰 부담이 될까 망설이셨던 주치의 선생님의 얼굴이 아른거린다.


아니러니 하게 겪어야만, 지나야 만 깨닫는 것 같다.

고통이든, 사랑이든, 떠남이든 남음이든.


그땐 너무 가까이 있어서 너무 휘몰아쳐서 보이지 않았던 것들은 지나고 나서라도 알게 된 것은 나에게 남은 선물이다.


다음에는 조금 더 일찍 알아차릴 수 있게 지금의 내가 자라고 있는 거겠지.



저 시뻘건 그래프가 사람마음을 참 요상하게 했다. 덜컥 겁이 나고 괜찮다던 느낌도 믿기 어려워졌다.


몸이 아니라 그래프가 아픈 것처럼 나는 또 그것에 마음을 내줬다.


딱히 아픈 데도 없던 날에도 그래프를 보고 나니 왠지 어딘가 고장 난 것 같았고 그제야 통증이 생긴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픈 건 몸이 아니었고 그 그래프를 해석하려 애쓰는 내 마음이 아니었을까.




세로토닌이 장에서도
분비된다는 말이 내 세계를 전복시켰다.




마음이 고요하지 않으면 몸도 고요할 수 없구나...



내가 느꼈던 고요함과 불안정함은 서로 손을 맞잡고 춤을 추고 있었던 셈이다.


결코 떨어질 수 없는 부부처럼 서로 얽히게 만든 것!


이제는 그 둘이 서로를 끝없이 밀고 당기며 영향을 주고받는 걸 알았으니 그렇담 내가 나를 돌보는 방법도 달라져야 하지 않을까?


몸을 더 잘 돌본다고 해서 마음이 저절로 치유되는 게 아니고 마음이 망가지면 몸도 빨리 가는 길을 찾지 못하는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


자기 자신을 온전히 이해하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더 미로와 같지만 그 길을 찾지 않으면 계속해서 돌고 도는 곳에서 헤매게 될 것이다.


내가 누구인지를 알지 못하고 몸과 마음을 방치한 채 살아가는 것만큼 바보 같은 일은 없을 테니까.


몸을 알아가는 건 내가 나를 이해하는 첫걸음일지도 모르겠다.


몸 안의 우주는 생각보다 훨씬 더 넓다는 걸 이제야 겨우 실감한다.

심리와 생리, 보이지 않는 길로 이어진 세계.


그 두 가지가 만나는 그 자리에서 나는, 비로소 나라는 우주의 지도를 조금씩 그려가고 있다.



이때부터 건강에 마음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주치의 선생님과 SNS로 이어져 있어 의학적 지식을 곁에서 들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든든한지 모른다.


시대를 잘 타고나서 이런 복도 누릴 수 있고 말이다. 특히, 자율신경과 만성 통증에 관한 이야기들을 접할 때마다 다른 곳을 헤맬 필요가 없다는 안도감이 든다.



원장님 앞에 있으면 기죽어 있던 풍선이 갑자기 숨을 잔뜩 들이마시는 것 같다.


아파서 “못 한다”며 벽을 세우던 나를, 그 벽째로 밀고 나가게 만드신다.

잘하게 만드는 게 아니라 내가 할 줄 아는 걸 더 꺼내게 한다.


덕분에 나는 든든한 울타리 안에서 잠시 세상의 바람을 잊고 있는 아이 같다.


아프면 어린애가 된다더니 그 말이 딱이다.

덕분에 내 통증도 좀 더 잊을 수 있고 부드럽게 바라보게 된다.

고통이 캐릭터처럼 살아 움직이는 느낌이다.


그래, 너도 잘하지! 남들이 좀 쉬라고 해도, 알량한 자존심에 끝까지 괜찮다고 버틴다.


그러면 고통은 꼭 성깔 있는 언짢은 선배처럼 들이닥쳐 나를 눕힌다.


심술이 잔뜩 나면 이불까지 덮어 씌우고 꼼짝 못 하게 하지만 기분이 좋을 땐 발끝으로 슬쩍 터치하고는 "조심해"하고 사라진다.


그럴 땐 밉상인데도 어쩌다 보면 또 정이 가서 귀엽다. 고통은 까칠하지만 챙겨주는 가족 같은 존재다.






원장님은 틈만 나면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통증이 고통으로 넘어가지 않는 것, 그게 중요합니다.”


그 말이 처음엔 참 답답하게만 들렸다. 아픈데 어찌 그게 고통이 아니란 말인가.


"원장님은 그게 어떻게 되시나요?"


질문을 더 하고 싶었지만 내가 너무 엉뚱해 보일 것 같고 진료 시간을 빼앗는 번거로운 환자가 될까 봐 "네네! 그렇게 함 해보겠습니다." 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묻고 싶은 건 잔뜩인데 입은 꽉 닫힌 채 잠겨 있었다. 다 아는 사람인 척 어설프게 웃으면서 진료실을 빠져나왔다.



통증은 고통을 삼키지 않는다



집에 돌아와 책과 유튭 영상을 뒤적였지만 답은 좀처럼 찾을 수 없었다. 서점에서 의학서적을 뒤져봐도 그 누구도 내 마음속 깊은 곳을 대신 설명해주지 못했다.


그 답은 말이 아닌, 몸이 겪으며 깨우친 것임을 알게 되었다.


의사 선생님도 수많은 환자를 보며 같은 과정을 경험으로 익히신 거겠지.... 누군가의 말이 아닌, 몸과 삶이 가르쳐준 언어로... 그래서 나를 볼 때마다 늘 같은 말을 반복하셨던 거겠지.


흘려듣기엔 내 몸이 그 말을 알고 있었다.

귀가 들은 게 아니고 몸이 알아들었으니까.


자율신경이 무너진 내 몸은 도무지 나아질 기미가 없을 것만 같았고 내일이라는 시간이 오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치료만큼이나 마음의 태도도 중요한 거였다.


통증이 있다는 건, 삶을 무너뜨리지 않는 선에서 아픔을 견디는 법을 배운다는 뜻이었다.


고통이 나를 삼키기 전에 통증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받아들이는 연습!


예전엔 통증이 곧 고통이었지만 이제는 다르다.


주치의 선생님의 말대로 통증은 더 이상 고통으로 넘어가지 않고 고통의 끝에서 다시 돌아온다.


그 작은 차이를 알게 되자, 아픈 건 여전하지만 그 아픔이 더 이상 나를 집어삼키지 않는다.


그냥 ‘통증’으로만 머무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그 차이를 알게 되니 마음이 훨씬 가벼워졌다.



의사와의 동행, 다시 살아나는 힘



원장님은 내가 24년 6월까지 반년이 지난 이때도 궁금하거나 앞으로 나가야 할 때 통제보다 제안, 명령보다 늘 "동행"을 해주셨다.


“이렇게 해보면 어떨까요?”라고 늘 선택할 수 있는 여지를 주셨고 그 작은 제안들이 나를 끌어올려주었다.


누군가 곁에서 강제로 끌어가는 게 아닌, 지켜주고 기다려주는 태도에서 큰 힘을 얻었다.


외로움도 치유될 수 있고 행복도 고통도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굳건한 힘!!


우선, 자율성의 존중으로 나를 수동적인 환자가 아닌,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존재로 대해주셨다.


이래라저래라 좀 심각한 꼰대 의사를 만난 적이 있던 나는, 동행의 태도를 고수하시며 혼자가 아니라 함께 걷고 있다는 확신을 주신 덕분에 강요 없는 치료 환경에 마음을 열 수 있었다.


그래서 외로움이라는 감정도 따뜻하게 품을 수 있었다.



만성 통증, 의지로 넘어설 수 없는 벽



내가 유독 힘들어하는 의사 유형이 있다.

이 정도 치료했는데도 낫지 않았다고 말은 하지 않지만 눈빛으로 핀잔을 던지는 사람.

빨리 따라오라는 명령을 먼저 건네는 사람.


그럴 땐 병원은 병을 고치는 곳이 아니라 통증의 정당성을 증명해야 하는 재판정처럼 느껴진다.


내가 회복을 미루는 사람처럼 지금의 증상이 내 게으름과 의지 부족에서 비롯된 결과라도 되는 양.


몸이 아파 찾아간 곳에서 죄인처럼 진료받고 나오는 일은 익숙하지 않았다. 그게 병보다 더 병 같았다.


눈치 보느라 고통의 절반쯤은 삼켜낸 채 돌아섰다.


만성 통증은 감기처럼 약 하나로 털고 일어설 수 있다거나 대충 덮는다고 사라질 종류의 고통이 아니다.

나으면 다행이고 빨리 안 낫는다고 이상할 것도 없는 일이다.


자율신경과 만성통증이라는 이름 아래 얼마나 많은 세포들이 엉키고 흩어지는지를, 만났던 통증 쪽 의사 선생님들이 조금은 공감해 주시고 알아주셨으면 했다.



그런 마음이 잠시 머물렀다는 이야기일 뿐, 누구를 겨냥하거나 견주려는 건 아니다.

그럴 마음도 없다.



기계로는 풀 수 없는
손끝으로 읽는 몸의 말



자율신경은 생각보다 소화와도 깊이 얽혀 있다며 의사 선생님은 헬리코박터 검사를 해 보자고 하셨었다.


나에게 나와도 이상하지 않는데 음성이라는 결과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셨지만 그 눈빛엔 풀리지 않는 의문이 남아 있었다. 사람의 몸이라는 게 이렇게까지 신비롭다.


“이상하네, 양성으로 나올 줄 알았는데... 허허허.”


원장님의 혼잣말에 진료실은 간호 선생님들과 웃음으로 풀어졌다.






명치가 자꾸 답답해져서 소화기 쪽 주사를 맞기 시작했다.


수많은 장비들을 뒤로하고 원장님은 언제나 손끝으로 직접 눌러보며 숨겨진 단서를 더듬어 가신다.


기계가 닿지 못하는 경계 너머 몸이라는 미로의 비밀을 찾아가는 그 손끝엔 기술을 넘나드는
감각이라는 오래된 직관이 깃들어 있는지도 모르겠다.


작년엔 금방 호전됐었다. 그래서 이번, 2025년 7월부터 8월까지도 그때와 똑같은 방법으로 치료를 받으면

금세 나을 거라 믿었다. 하지만 이번엔 전혀 다른 대답을 내놓고 있었다.


똑같은 치료에 똑같이 반응하리라는 기대가 얼마나 허술한 믿음이었는지를 이번에는 조금 일찍 깨닫게 되었다.


지금 이렇게 써 내려가는 기록은 작년의 일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지금도 같은 자리에 같은 방식으로 주사를 맞고 있다.ㅎㅎ


그만큼 자율신경과 소화는 실과 바늘처럼 엮여 있는 모양이다. 내가 미처 감지하지 못한 불편조차 몸이 먼저 알아차리고 비명을 내지르는 걸 보면 몸이 마음보다 더 정직한지도...



후기를 진심을 다해 썼다.






치유는 기다림에서 시작되나 보다.


고통도, 행복도, 외로움도, 모두 고정되지 않는다. 회복되고 변형될 수 있는 감정들이다.


진짜 치료는 거창한 처방보다 동행과 기다림으로 완성된다.


인간관계와 삶에 대한 새로운 생각으로 이어질 만큼 24년 6월부터 고통도, 행복도, 다시 숨을 쉰 것처럼 느껴졌다.



나에게 내어주신 숙제이자 발열에 대한 보고.



나아줘서 자신의 삶이 소중함이 느껴진다니, 동반자가 되어주어 감사하다니, 더 평온한 치료를 해주겠다니...


다정함에 녹아 없어지는 줄 알았다. 이쯤 되면 나는 환자라기보다, 안도에 길들여진 사람이다.


의료 행위에 정서적 헌신이 깊이 배어 있는 나의 주치의 선생님은 단 한 번도 의료적 권위에 기대신 적이 없다.

등불 같다. 말보다 먼저 도착해 마음을 덮어주는 온기.

나는 그것을 안다. 눈빛에서 보았다. 온몸으로 느낀다.


그 순간만큼은 나는 아픈 사람이 아니고 안도 속에 쉬어가는 한 사람일 뿐이다.


이보다 더 무엇을 바라겠는가! 나에게 치료는 이제 병을 고치는 일을 넘어 영혼을 다독이는 길이 되었다.






치료는 기술(만)이라고만 믿었다.


의사와 환자의 관계를 치료자와 대상자의 수직선이라고 생각했다.

어떻게 교감으로 병을 고친단 말인가.


그런데 같은 길을 걷는 여행자로 봐주시는 원장님의 톡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나와 주치의 선생님의 관계는 단방향이 아닌 것 같았다. 그분의 사명감과 애정은 마치 물을 길어 올린 후 다시 강물로 흘려보내는 순환 같았으니.



늘, 환자를 통해 배운다고 하시는 분, 배운 것을 다시 환자들에게 돌려주려는 그 마음.


그 믿음에서 나는 다가올 내일을 기다린다.


고통의 끝에 웃는 얼굴을 다시 마주할 그날을, 함께 웃을 그 순간을.




나는 이때 방어에서 신뢰로 이동 중이었다. 철벽을 치며 속 얘기를 잘 못하는 사람이었으니까.


과거의 나는, 무심코 던져진 질문에 방어적인 답을 건넸고 숨겨진 진심은 항상 벽 뒤에 있었다.


지금 돌아보면 그때의 나를 이해할 수 있다. 그 방어벽이 얼마나 나를 지켜주었는지.


하지만 이제 그 벽이 조금씩 허물어지고 있다.

불안과 두려움은 민낯보다 더 강력했지만 더 이상 나는 나의 취약함을 숨기지 않는다.


그게 삶의 중요한 감정임을 알게 되었다.


외면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연습을 해나가면서.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나 자신을 믿기 시작했다.



"혼자가 아니라는 걸 잊지 말라"는 말은, 그야말로 정서적 지지였다.


어디에도 기대지 못할 때 몸이 더 아프게 느껴지던 순간에 보루처럼 든든하게 다가왔다.

그래서 회복의 가능성에 대해 더욱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그전까지는 그저 아픈 사람, 치료받는 사람으로 머물렀다면 ‘무언가를 줄 수 있는 존재’로서의 자기 효능감을 느꼈다.


이제 와 생각해 보면 그 확신이란 게 얼마나 얇고 취약한 것인지를 알게 되었다.


실상 의사 선생님께 내가 무엇을 줄 수 있는지 모른 채 내 문제를 끌어안고 있었던 거니까.


결국, 나는 여전히 주치의 선생님께 의존하며 회복의 가능성을 꿈꾸고 있었던 거였다.






어쨌든! 예전보다 훨씬 건강해졌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간의 고단함을 내려놓는 깊은 한숨이 자연스레 나왔다.


서울에 있을 때도, 치료를 받지 않을 때도 원장님은 마치 내 고통이라는 무심한 퍼즐 조각들을

차근차근 맞춰가시는 고집스러운 장인이셨다.


그래서 나도 2024년 5월부터 2025년 1월까지 발열에 대한 기록을 빠짐없이 보내드렸다.


퍼즐이 완성될지, 아니면 일부 조각이 영영 사라질지는 모르지만 그분이 늘 동행해 주셨기에 나는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그 덕분에 나는 여전히 여기 서 있다.


참, 다행스럽게도.






전공의 시절, 환자의 동맥혈을 가슴에 품었다던 주치의 선생님은 동맥혈만 품은 것이 아니었다.
그분은 환자들의 희망, 고통조차도 마음에 담아 부드럽게 감싸 안아주신다.

그 따뜻한 마음은 수많은 의학적 치료보다 더 깊다.

나의 치유는 그곳에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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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음


급히 가면 보이지 않는다.

천천히 가야 길이 열린다.


발끝마다 하나의 세계가 있었다.


풀잎이 숨 쉬고 바람이 길을 안내하며

멈춘 자리마다 나를 기다리던 풍경이 있었다.


아마도 나는 길 위의 관광버스였다.


창밖 풍경은 스쳐가고 내 표는

왕복이 아니라 단 한 번뿐이었는데도.


이제야 걸어서 간다.


늦게 배운 산책, 참 비싸게 치른 수업료다.


길은 늘 거기 있었는데 나만 너무 빨리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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