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율신경실조증 치료기
아픔과 행복 사이
나의 자율신경 이야기
몸과 마음의 동행
자율신경실조증은 마치 아이를 키우는 감정과도 비슷하다.
내 몸과 마음을, 갓 태어난 아기처럼 조심스럽게 들여다보게 된다.
몸이 말을 잘 들어줄 땐 마음이 편안하고 속을 썩일 땐 한숨이 나오고 조마조마해진다.
그럴수록 더 세심히 관찰하고 더 깊이 이해하려 애쓰게 된다.
친구 A는 아이를 키우며 어른이 되어간다고 말했다.
나 역시 이 병을 겪으며 철없던 나를 돌아보게 되고 조금씩 성숙해지는 나 자신을 느낀다.
이 병이 내게 가르쳐준 건 내 몸과 마음은 억지로 다그치거나 통제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는 것.
조급함과 불안마저도 아이를 키우듯, 다정하게 살피고 천천히 걸음을 맞춰가야 한다는 것.
얼어붙은 창밖의 새를 바라보듯 호흡을 맞추고 기다릴 때 조금씩 깨어났다.
연약함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생명은 더 충만하게 느껴진다.
강한 것만으로는 온전히 살아 있음을 체감할 수 없고 연약함을 통해서야 삶의 실감과 깊이가 생기는 것 같다.
나는 알게 되었다.
연약함과 살아 있음은 서로를 건드릴 때만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2024년 6월 22일~7월 4일
일 때문에, 또 수술 실밥 제거를 위해 이 시기에는 비교적 짧게 치료를 받았다. 어쩔 수 없었지만 다행히 많이 좋아졌고 원장님도 더 이상 "집중 치료"가 필요하다고 못을 박지 않으셨다.

나는 이때 수술 부위도 아물고 자율신경 치료도 싹 다 마무리되는 줄 알고 기분이 한껏 올라 있었다.
마지막 치료가 될 거라고, 발열도 통증도, 내 마음도 모두 끝날 거라고 믿었다.
앞에 어떤 일들이 닥칠지 모른 채, 온전히 지금의 기쁨에 몸을 맡기며 마냥 행복했다. 그랬었다.
그래서 열이 올라와도 괜찮다고 아니, 오히려 좋다고 주치의 선생님께 말할 수 있었다.
몸의 고통과 마음의 평안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흐를 수 있다는 것을 이제는 더 이상 외면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체온은 뜨겁게 치솟고 있었지만 아이스크림 하나에 들떠 있던 것처럼 마음은 뜻밖의 평온에 가 닿아 있었다.
아무 일도 없다는 듯.
2024년 7월 3일 수요일
여섯, 일곱 명의 환자분들과 함께한 앞산 고산골 맨발 걷기.
맨발 걷기를 좋아하시는 원장님의 영향으로, 나 역시 '맨린이'에서 벗어나 기초 단계로 접어들고 있었다.
지금은 mania가 되었다.
맨발 걷기를 하실 때면 늘 봉지를 들고 오신다. 준비하지 못한 날이면 우리에게 봉지가 있냐고 묻고는, 보이는 대로 쓰레기를 주워 담으신다.
담배꽁초나 유리조각이라도 나오면 깊은 한숨과 함께 이마를 살짝 찌푸리신다. "에잇! 누가 이런 걸 여기에..."
발로 느끼는 자연의 감촉만큼 그분의 마음엔 이 길이 깨끗하길 바라는 정성이 밟힌다.
치료가 끝나갈 무렵이 되면 마음 한편에 고이는 감사함이 늘, 말보다 먼저 차올랐다.
쑥스러움에 눈을 마주치며 전하지 못한 말들은 한 자 한 자 눌러 적은 편지를 드렸다.
말로 직접 전하지 못한 마음이지만 그 편지에만 내 진심이 가장 정확한 언어로 담겼다.
작은 변화가 힘이 될 때
발열 증상을 보고 드렸을 때 아직 열에 지쳐 힘겨워하고 있던 나와는 달리, 원장님은 "지속 시간이 줄었다"며 회복의 징후를 콕 짚어주셨다.
진료실에서든 메시지로든 어떻게든 알게 해 주셨다.
온몸을 가누기도 힘들 만큼 공포심만으로도 버거웠던 터라, 인식의 범위가 흐려지기 일쑤였고 숨까지 차서 표현은 서툴러졌다.
그럴 때 이런 점에서 이 부분이 나아졌다고 말해주실 때면, 조금 더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나의 변화를 내가 아닌 누군가가 믿어주고 지켜봐 주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순간마다, 나는 이 길이 혼자가 아닌 ‘함께하는 과정’ 임을 실감했다.
거대한 사기꾼은
위대한 지도차처럼 보이기도 한다
격하게 공감한다. 적과 아군의 구도, 화려한 수치를 곧 실력이라 믿는 분위기, 그리고 검증은 늘 조금 더 기다려야 할 일로 미뤄진다.
이 모든 것들이 사람들의 판단을 흐리게 만든다. 게다가 후광 효과는 신화를 만들고 사회적 증거와 동조 압력까지 더해지면 카리스마는 어느새 리더십으로 위장되겠지. 그렇다면 묻고 싶다.
검증 가능한 근거를 내놓는가, 과정은 투명한가, 약속은 느리지만 재현 가능한 제도 개선인가!
이 질문들에 YES라고 답할 수 없다면 그는 지도자가 아니다. 정교하게 설계된 연기자일 뿐이다.
박수는 거짓말을 좋아한다. 열광은 판단을 마비시키고 가면을 벗겨낸다. 진짜와 가짜를 가르는 건 시간, 기록, 책임이 아닐까?
명백히 망가뜨리고 있음에도 우리는 쉽게 말할 수 없다. 분열로 몰리고 음모로 낙인찍히기 때문이다.
제도가 비효율적일 때 그 고통은 현장의 의료진과 환자가 먼저 마주하지만 이 무력감은 어쩌면 가장 먼저 감지하는 건 고통을 겪고 있는 환자들일지도 모른다.
나도 그중 한 명이다. 당연할 수도 있겠지만 원장님이 이토록 깊이 체감하고 계시다는 것이 크나큰 감동으로 다가왔다.
나에게 이런 마음을 보여주신 건 내가 그만큼 회복의 길을 잘 걸어가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짐작해 본다.
정책이 아무리 환자와 의사를 갈라놓으려 해도 진짜 치료는 연결에서 나온다.
메시지에서 마음을 놓치지 않기 위해 애쓰시지만 한편으로는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느껴졌다.
나는 “약보다 더 필요한 건 연결”이라는 것을 분명히 배웠다. 주치의 선생님은 환자 곁에 함께 있어주는 것이 진짜 힘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신 분이다.
그러나 그 마음을 지켜낼 수 있을까? 하는 회의와 슬픔이 그대로 전해져 와 나 또한 함께 슬퍼졌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겉모습에 속지 말자. 환자와 의사의 ‘연결’이야말로 치료의 본질이다.
연결을 지켜내기 어려운 시대에 인간으로서의 공감은 마지막 희망일지도 모른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그날의 심정이 고스란히 되살아온다. 일기장에 적었던 글을 가져오는 것임에도 여러 번 멈추고 울컥하는 마음을 삼켜야 했다.
대구에서 통증 재활로 널리 알려졌던 한 의원.
그곳에서 대구 최대 규모의 '행복한 H병원'으로의 확장 개원을 반년 앞두고 계시던 시점, 나는 원장님의 눈에서 몇 번이나 초점이 사라진 모습을 보았다.
넋이 나간 듯한 얼굴, 무게와 피로가 고스란히 내려앉은 표정이었다. 그런데도 나뿐 아니라 모든 환자들의 치료를 끝까지 최선을 다해 마무리해 주셨다.
의원인데도 재활 치료를 받는 환자들 곁을 직접 돌며 회진을 도셨다. 매일같이 한 사람 한 사람을 눈으로 확인하고, 살피고, 마음으로 반응하던 귀하고 드문 의사였다.
나는 행여나 과로하실까 진심으로 걱정되었다. 그분의 어깨 위에 얼마나 많은 무게가 쌓여 있었을까. 감히 진중한 위로의 말을 꺼낼 수 없었다. 상상조차 닿지 않았다.
지금도 치료받고 있으니 진짜 따라온 건 안 비밀
원장님 놀랄 준비 하세요!
이때 완전한 회복의 정점을 찍을 때였지만 사실, 원장님이 자꾸만 좋아졌다고 말씀해 주시니 힘든 날도 정말로 좋아진 것만 같은 날들도 있었다.
스스로는 또렷이 느끼지 못했지만 마음이 조금씩 물들듯 ‘아, 그런가 보다’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크게 반짝이는 변화는 아니었지만, 그저 물 흐르듯, 스며들듯 어느 결엔가 나아졌나 보다. 하고...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어쨌든 괜찮은 척은 할 수 있으니까.
진짜로 괜찮은지는 뭐, 그다음 문제고.
회복의 정점이 맞았다. 치료를 또 한차례 잠시 쉬고 서울에 머물던 어느 날, 원장님의 블로그를 다시 열어보게 됐다.
수년 전엔 무심히 스쳐 지나갔던 글들이 그날은 눈앞에서 입체적으로 펼쳐졌다. 평면처럼만 보였거나 잉크로만 보이던 글자들이 갑자기 표정을 갖고 말을 시작한 듯했다.
환자가 모르는 곳에서도 그렇게나 많이 고민하고 움직이셨다는 걸.
그 무심함 위에 전문성과 책임감이 더 얹혀 있었고 나는 그걸 이제야 제대로 보고 감탄하는 중이었다.
때늦은 깨달음이지만 사람은 원래 뒤늦게 알 때 더 크게 고개를 숙이게 마련이니까.
의사 선생님의 블로그에 혼자서 잘 치유하며 놀겠다고 하고 댓글을 달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씀드렸건만,
그럼에도 정성스럽고 성실하게 답을 남기셨다. 밤 12시가 다 되어 가는 시간에.
이렇게까지 끊임없이 소통을 이어가주시니 이 시기에는 댓글을 다는 일이 죄송해졌다.
또 댓글을 다실까 봐, 고마움이 점점 미안함으로 번지던 끝에 조용히 멈췄다.
누가 보든 말든, 물을 주고, 가지를 다듬고, 바람을 막아주는 손길에 문득 나도 나에게 너무 허술했던 게 아닌가 싶었다.
타인의 진심엔 쉽게 감동하면서 정작 내 마음엔 먼지 쌓이도록 내버려 뒀던 건 아닐까.
그때부터였다.
나는 나에게 조금 더 성실해졌다.
적어도, 내 마음이 시든 채 방치되지 않도록
하루 한 줌의 정성쯤은 건넬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이 발열의 보고를 언제까지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2024년 5월부터 시작했으니 벌써 두 달째 보내고 있었다. (하기 싫었던 건 아니다. ^^)
그동안 나의 고통을 이토록 따뜻하게 바라봐주시니 자존감이 한껏 올라갔다. 고통을 무시하거나 덮지 않고, 소중히 다뤄주는 사람 앞에 서면 내가 조금 괜찮은 사람인 것만 같았다.
좋은 말을 자꾸 들으니 진짜로 내가 좋아지고 있는 줄도 같고, 칭찬이 좋으면서도 익숙하지 않아 어쩐지 멋쩍었지만 마음 구석구석에 부드러운 패치처럼 붙어갔다.
머릿속에 좋지 않은 생각들이 핑퐁핑퐁 튕기듯 이리저리 떠다닐 때면 시기마다 어김없이 도착하는
원장님의 메시지를 보며 마음을 다잡았다. 정신이 흐트러지려 할 때마다 그 말들이 마음을 똑바로 세웠다.
꼭, 조금씩이라도 나아가고야 말겠다고
당신이 피나게 노력한 그 이상으로 반드시 보답하겠다고.
치료를 본격적으로 시작할 무렵 나는 지구에서 가장 행복한 환자가 되겠다고 호기롭게 선언했었다.
그 말에 책임지기로 했다. 책임이란, 말보다 훨씬 무거운 무게라는 걸 살면서 몇 번이나 체감해 왔기에 두려웠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이번만큼은 정말 꼭 지키고 싶었다.
입 밖에 내뱉은 말이 가끔은 스스로 채운 멍에처럼 느껴지더라도 그 멍에를 메고서라도 끝까지 가고 싶었다.
여담이지만 가끔은 병과 싸우는 게 아니라 의사와 내가 누가 더 오래 포기하지 않고 버티는지 겨루는 기분이었다. 기세 싸움(?) 같기도 하고 믿음의 줄다리기 같기도 했다.
서로가 먼저 손을 놓지 않기를 바라면서도 어쩐지 나보다 조금 더 오래 붙들고 계신 것 같았다.
갈 곳 없어 바탕화면을 떠돌던 수많은 파일들을 품어주는 "기타 폴더"는 원장님을 꼭 닮았다.
정리되지 못한 마음, 제자리를 못 찾은 감정, 이도 저도 아닌 애매한 증상까지 툭 던져도 받아주는 그 포용력.
다 넣고 나면 지저분했던 바탕화면이 조금은 정돈되듯 어지럽던 마음이 조금은 평평해지는 것 같았다.
괴로움과 애착이 공존하는
무거운 시간을 견디며 배운
사랑과 치유의 의미
원장님은 늘 우리가 생각하는 의사답지 않게 동등한 눈높이에서 자신의 부족함을 먼저 꺼내 보이며 내게 한껏 용기를 북돋아 주셨다. 그 따뜻한 격려 덕분에 나는 여기까지 걸어올 수 있었다고 늘 생각했다.
의사라기보다는 때로는 자상한 아버지상, 친구 같고 교회 큰오빠 같고, 삼촌 같고, 엘리베이터나 동네에서 산책하다 마주치는 포근한 이웃 아저씨 같기도 한 분.
그래서일까.
동네의사가 왠지 ‘우리 편’ 같아서 남녀노소 나이 불문하고 인기가 많으신 게 당연하게 느껴진다.
나는, 아픔이란 참 지독하게 괴롭지만 때로는 사랑스럽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아픔 덕분에 가끔은 내가 얼마나 살아 있는지를 또렷이 느끼기도 한다.
물론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다. 대부분은 고통스럽고, 피하고 싶고, 죽 (고)을 만큼 버겁고 도망치고 싶을 만큼 무겁다.
아픔은 본질적으로 괴로움이지만 살아 있음과 성장, 진심, 치유의 출발점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나는 괴로움과 애착이 공존할 수 있음을, 고통 속에서도 의미를 찾으며 삶이 결코 즐겁기만 할 수 없음을 체득했다.
"자율신경실조증"이라는 녀석 덕분에!!
매일의 순간을 주의 깊게 바라보며 살아가는 방법을 찾았다. 앞으로는 고통 속에서도 의미를 발견하고 애착과 함께 살아가는 길을 택할 것이다.
이 경험을 나를 단단하게 만드는 힘으로 삼겠다.
서울 맨발 걷기 행사에서 볼 수 있으면 보자고 하셨지만 나는 집에서 10분 거리인데도 사정상 함께하지 못했다.
누군가는 왜 이렇게 볼멘소리 뚱딴지같은 말을 하느냐고 믿기 어려워할지 모르지만 자율신경실조증을 몇 년 겪어본 바로는 신체적, 정서적 반응이 민감하게 나타나는 병이라 걷잡을 수 없이 행복해지기도 한다.
감정이 좋을 때 작은 즐거움도 평범한 사람보다 더 강하게 느껴진다.
고통과 예민함이 감정 경험을 증폭시키는 역할을 해준다.
몸과 마음이 고통을 겪을수록 좋은 순간의 가치와 행복이 더욱 뚜렷하게 느껴지듯이 고통 속에서 느끼는 희열은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깊은 행복이 된다. 기쁨, 안도, 만족감도 강하게 경험한다.
그 기묘한 기쁨을 함께 나눌 수 없어 외로울 때가 많지만 그래도 언젠가 누군가는 이 마음을 알아주길 바란다.
아니, 꼭 알게 되면 좋겠다. 진심으로, 간절히 바란다.
재발이 잦지만 그만큼 회복도 빠른 편이라 뜻밖에 ‘축하받는 순간’도 자주 찾아온다. 안 좋은 날이 있는 만큼 좋은 날도 그만큼 더 많기에 나는 그 사이사이에서 희망을 놓지 않게 된다.
자율신경실조증의 증상은 다채롭고 아름답다.
고통 속에서조차 감각이 예리해져 작은 행복도 경이롭고 눈부시게 빛난다.
몸+마음=뫔치유
의사 선생님은 내 마음에 숨겨둔 감정을 끌어올려 세상으로 꺼내주는 확대경 같다.
토닥여드리고 싶은 한 사람
환자가 아플 때 함께 아파하는 의사가 있다. 내가 고비인 순간마다 그분의 얼굴은 나의 통증을 함께 짊어진 사람처럼 일그러졌다.
그리고 내가 조금 나아질 때면 세상 그 누구보다 환하게 웃었다.
그 웃음은 긴 어둠 끝에 겨우 떠오른 작은 불빛 같았다.
책임감과 인간성 사이에서 흔들릴 수밖에 없는 자리.
그렇게 많은 공부를 하고도 그곳에 머무르지 않고 성장의 발판으로 삼는 주치의 선생님을 보며 나도 배웠다.
넘어질 때마다 다시 일어나는 힘을.
그리고 조금 더 멀리 나아갈 용기를.
의사들이 마주하는 현실은 생각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깊을 것이다.
최선을 다했는데도 환자가 호전되지 않을 때, 치료의 한계 앞에서 무력감을 느낄 때, 환자와 가족의 기대를 채우지 못할 때, 환자의 상태가 안 좋아질수록 무너질 것 같은 순간 등등...
끝없는 노동 시간.
과중한 업무.
제도의 벽과 시스템의 한계.
수많은 환자와 행정 업무 속에서 자신의 건강과 삶까지 희생되는 자리.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자와 진심으로 소통하려는 그 마음 딱 하나.
그 노력만으로도 몇억과도 바꿀 수 없는 가치임을 주치의 선생님이 꼭 기억해주셨으면 한다.
그리고 토닥여드리고 싶다. 나에게 늘,
“미리나 님, 여기까지 믿고 따라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신이 내게 해주었던 그 말처럼 이번엔 내가 그 말을 돌려드리고 싶다.
"원장님, 증상이 많고 까다로운 저를 마다하지 않고 여기까지 치료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원장님께는 내가 하루치 진료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쓰게 하는 특별 과외 과목 같은 환자였을지도 모른다.
2025년 8월 12일 수요일 내가 찍어드렸다 : )
텐트의 마음(?)으로 살아간다는 것
훈련되지 않은 마음은 가장 위험하다.
조금만 건드려도 불안은 금세 튀어나오고 조금만 실수해도 자책은 날카로운 혐오로 변한다.
불안은 미래로 달려가 헛소문을 퍼뜨리고 자책은 과거로 기어들어가 끊임없이 그때 왜 그랬냐며 발목을 잡는다.
분노는 현재를 불태운다.
누군가 마음을 ‘내면의 무기’라고 하던데 공감된다. 문제는 그 무기의 칼날이 대개 자신을 향한다는 것이다.
자기 마음에 자기가 베이는 구조.
너무 익숙해서 무딘 줄 알았는데 어느 날 피가 나고 나서야 아, 아프구나! 하고 알아차린다.
마음은 원래 무너지기 좋게 설계되어 있다. 흔들리고, 쏟아지고, 가끔은 와장창 무너진다.
그걸 안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연약함의 힘! 무너져도 다시!
나는 늘 이상했다.
왜 이렇게 나만 약할까.
왜 나는 작은 일에도 무너질까.
왜 나만 이렇게 스미고, 젖고, 흔들릴까.
수많은 강연에서는 마음을 단단히 하라고 했고 친척과 주변 어른들은 “이렇게 마음이 약해서 이 험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냐”며 걱정이 뒤섞은 눈빛을 보냈다.
약한 게 죄인 줄 알았다. 그래서 괜찮은 척, 아무렇지 않은 척을 했다.
그 누구도 말해주지 않았다.
누구나 약하다고.
누구나 무너진다고.
단단한 사람도 사실은 무너졌다가 겨우 일어난 거라고...
오직, 주치의 선생님만 말했다.
“원래 사람은 연약합니다.”
처음이었다. 누군가 그렇게 말해준 건.
그제야 나는 인정하게 되었다. 내 마음은 성벽이 아니라 텐트였다는 걸.
다들 성벽을 세웠다. 콘크리트처럼 묵직하고, 벽돌처럼 튼튼하게 감정을 가두고 세상과는 벽을 쌓았다.
나는 못 그랬다. 해보다가 찢어지고, 접히고, 무너졌다.
바람 불면 접히고 비 오면 바로 스미는 젖은 종잇장 같았다.
하지만 햇살 한 줌이면 다시 마르고 펴지는, 가볍고, 유연하고, 무너지지만 그만큼 자주 다시 일어나는...
그게 나였다.
나는 튼튼하진 않아도 다시 펴지는 마음을 가졌다.
그렇다고 마음을 당장 길들일 수 있느냐 하면 또 그렇지도 않다.
마음을 기른다는 건 길들이는 게 아니라 이해하려는 시늉이라도 계속해보는 일이었으니까.
생각해 보면 외부의 고통에는 그렇게도 민감하면서 정작 마음의 고통은 방치한다.
그저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자구책일 뿐이다.
누군가의 말 한마디 지나간 기억이 순식간에 마음을 뒤집고 삶 전체를 흔들어놓는다.
외부의 고통을 두려워하지만 정작 인간을 가장 깊이 파괴하는 것은 ‘훈련되지 않은 마음’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불안, 분노, 과거에 대한 집착...
이 모든 감정은 제대로 관찰되지 않으면 에너지는 방향 없이 흩어져 혼란이 되고, 혼란은 고통이 된다.
훈련되지 않은 마음은 타인을 찌르는 칼이 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나 자신을 가장 먼저 상처 낸다.
그래서 마음에는 돌봄과 훈련이 필요하다. 어떤 기술보다 먼저 나의 마음을 바라보는 연습!
하루아침에 되지 않는다.
꾸준한 관찰과 인내, 그리고 연민이 필요하다.
때로는 아주 작은 변화만으로도 마음은 다시 안전한 공간이 된다. 마음은 방치하면 흉기가 되고 훈련하면 도구가 된다.
가장 파괴적인 무기를 가장 따뜻한 도구로 바꾸는 일!
그것은 세상 누구도 대신할 수 없고 오직 나 자신에게만 허락된 가장 귀하고 깊은 선물이다.♡
부족함은 나의 ‘특기 목록’을 하나씩 늘려주었다.
첫 자취 시절.
부모님과 함께 살 땐 몰랐다. 내 돈 내산이 아니라는 사실이 얼마나 나를 가볍게 해 줬는지를.
생활비가 빠듯하자 자연스레 과외나 시급 좋은 알바만 골라하게 됐고 계산하는 법과 선택의 무게를 함께 배우게 되었다.
실패와 서툼을 받아들이고 조금씩 밀어붙이며 나를 설득하는 방법이었다.
부족함은 나를 더 나답게 만들었고 작은 성취들은 나만의 기록이 되어 특기 목록에 쌓여갔다.
라면 물도 못 맞춰 겨우 끓이던 내가 요리책을 펼쳐 들고 연습하기 시작했다. 가족들이나 친구들이 “너 그때 만든 찜닭이 먹고 싶다”거나, “진짜 맛있었어”라고 말해줄 때면 내가 만든 음식을 맛있게 먹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꽉 찼다. 그 부족함이 없었다면 이 행복도 몰랐을지 모른다.
몸이 불편하지 않고, 어디 하나 아픈 데도 없는 날.
그건 정말 복된 하루다. 완벽하게 건강한 사람들이 부러웠지만 이제 그렇지 않다.
건강을 잃어봤기에 숨 쉬는 일, 걷는 일,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나는 일들이 한없이 감사하게 느껴진다.
그동안 먹고, 자고, 싸고, 일하고, 쉬는, 기계처럼 반복되던 날들이었다. 내 몸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른 채.
스위치만 켜고 꺼내듯 살아왔는데 이제는 설명서를 찾아 읽는 중이다.
아는 것이 두려움을 줄여주고 내 몸을 이해하는 일이 곧 나를 지키는 일일 테니까.
그렇게 공부하고, 찾아보고, 의사 선생님께 되묻고, 그날의 증상을 정리해 적어가며 치료과정을 기록하니 조금씩 몸과 친해졌다.
병원 가는 건 싫고 주사 맞는 건 더 싫다. 가끔은 이 모든 걸 그만하고 싶을 때도 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런 기회들이 쌓여서 나만의 노하우가 되었다. 나만의 방법이 생기고 내 몸의 언어를 알아듣게 되었다.
더 놀라운 건 내가 찾아낸 작은 방법이 누군가에게도 도움이 되었을 때다.
“그 이야기 듣고 저도 도전해 봤어요.”
“그 말이 위로가 되었어요.”
"함께 치료받는 것 같아서 치유되었어요"
"통증 일기 정말 좋았어요"
"덕분에 주치의 선생님과 상의 후, 약을 줄이거나 단약 했어요"
심장이 번개 맞은 듯한 감정의 파동! 삶의 통증을 뚫고 마주한 살아 있음이라는 벅찬 진동!
그 짜릿한 에너지는 온 세포를 깨워 폭죽처럼 터져나간다. 치유와 환희, 해방이 섞여 살짝 도취 속으로 빨려든다.
왜일까? 나는 왜 이렇게 모든 감정을 한꺼번에 몰아 받는 걸까.
희열은 내일, 환희는 다음 주... 해방은 날 잡고 오면 안 되나?
좋은 것도 한꺼번에, 무너지는 것도 순식간에 감정은 훅 들어왔다가 뒤통수를 치고 쓱 빠져나간다.
아픔이 준 작은 면죄부 / 환자 아닌 '나'로 살기
이것도 자율신경실조증의 증상이라면 차라리 좋겠다.
그렇다면 나는 내 상태를 굳이 해명하지 않아도 될 테니까.
"나는 이래서 그런 거야."
그 한마디로 나를 지킬 수 있을 것 같다.
사실 자율신경실조증은 당당한 척 걸음을 똑바로 뻗어도 속으론 위축될 때도 있다.
발열이라도 찾아와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르면 늘 누군가의 시선을 조심조심 피해 다니는 느낌이다.
보이지 않는 병은 말을 해야만 증명되니까.
병이라는 이름표가 꼭 필요한 건 아니지만 가끔은 그걸 달고 "그렇단다" 하고 말할 수 있다면 뒷주머니에 작은 면죄부 하나 넣고 사는 기분일지도 모른다.
조금은 덜 외롭고 덜 흔들릴 것 같아서... 그냥 문득 그런 엉뚱한 생각이 든다. 나는 여전히 기쁘고, 서럽고, 환하고, 불편한 그 어중간한 중간지점에서 또 살아간다.
그리고 이런 행복을 느끼게 해 준 건 내 건강이 어설펐던 덕분이었다.
뒤처지고, 부족하고, 어설펐던 시간들은 무한한 도화지 위에 흩뿌려진 색조 같았다. 그 순간들은 절망이 아니었고 나만의 그림을 완성할 기회였다.
또, 의외의 축복이었다.
고통은 문을 걸어 잠그기보다 열어두는 편이 덜 망가졌다. 고통은 그렇게 나를 뚫고 지나갔고 나는 그 통로 끝 어딘가에서 내가 누구인지 조금 더 알게 되었다.
완벽하지 않아서 배울 수 있었다.
흠이라고 여겼던 모자람은 가능성이었고, 멈춤처럼 느껴졌던 불편함은 통로였다. 나는 또 얼마나 많은 배움을 이 몸을 통해 지나갈까.
그래서 오늘도 조금 불편한 몸과 함께 조금 더 나를 배운다.
같은 종이에 베인 상처라도 시험 당일이면 신경 안 쓰이고 우울할 땐 너무 아프게 느껴진다. 그렇게 나의 뇌는 자극이 없어도 고통 기억과 감정 반응만으로도 통증을 만들어냈다.
"나는 아플 거야"
"또 그 고통이 올 거야"
"나는 왜 이 모양일까"
이런 감정이 실제로 통증 신호를 강화시켰다. 몸이 얼마나 똑똑한지 감정을 기억한다.
트라우마, 상처, 억눌린 감정은 근육 긴장, 자율신경 이상 등으로 남는다. 감정을 해소하지 않으면 몸이 그것을 '증상'으로 말한다.
내가 만성통증에, 자율신경실조증에 원인 없는 발열까지 겪으며 알게 된 건 통증과 자율신경이 감정과 참 친하다는 것이다.
그러니 내가 감정을 자꾸 나열하는 이유는 딱 하나, 사실은 나도 잘 모르겠기 때문이다.
통증이 몸만 아프게 하는 게 아니란 걸 알면서도 감정과 얽히고 설킨 이 미로 속에서 나는 자주 길을 잃고 헤매는 중이다.
그래서 이렇게 또 감정들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을 수밖에 없는 거다. 어쩌면 통증보다 더 아픈 건 내 마음 그 끝 모를 혼란일지도 모른다.
자율신경치료는 그 균형을 맞춰주었고 여러 가지 증상(예: 빈번한 감정기복, PMS, 심계항진, 공황 등)을 좋아지게 해 줘서 만족하며 살아가고 있지만 더 좋아지고 싶다.
오래 아파본 이들 중 마음을 다루는 병원을 지나오지 않은 이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런 길을 비난하려는 건 아니다. 아니, 그것은 비난받을 일조차 되지 못한다.
통증은 감정의 그림자이며 그 영향은 90%, 아니 어쩌면 전부일지 몰라서...
나라는 사람을 곁에 두고 천천히 배운 진심이라 오해 없이 전해지길 바랄 뿐이다.
오랫동안 통증과 함께 살아가며 나는 나 자신을 환자가 아닌 한 사람으로 마주했다.
때론 강한 척하지만 사실은 연약하고 여린 나였다는 것.
살아낸 나를 사랑한다.
감정이 통증의 시작이며
증폭 지속에 매우 깊게 관여한다
물리적 원인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뇌와 몸은 감정이라는 필터를 통해 통증을 생성하고, 유통하며, 기억에 퇴적시킨다.
가끔 원인보다 더 집요한 걸 보면 몸과 마음은 서로를 복제하듯 고통을 주고받으며 춤춘다.
물리적 자극보다 감정에 더 의존하는 경우가 훨씬 많다. 그러니 통증은 아무 잘못이 없어 탓할 수도 없었다.
감정이 입을 빌리지 못해 몸을 통해 말할 뿐이니까.
통증은 슬픔의 언어 없는 '통역자' 같다.
고통은 신경의 반응이기도 하지만 몸은 아픈 만큼 마음도 기억하고 마음이 기억한 고통은 다시 몸으로 돌아와 흔적을 남긴다.
감정이라는 필터를 통과하며 통증은 해석되고 저장되며 원인보다 더 집요하게 기억된다.
감정이 좋지 않으면 몸이 아픈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겉껍질은 멀쩡해 보이지만 속 알맹이는 이미 상했을 수도 있지 않은가. 겉만 보고는 모른다.
몸도 겉으로는 멀쩡해 보인다. 그래서 사람들은 말한다.
“그 정도면 괜찮잖아.”
하지만 속은 곪고 있다.
아무도 모르게.
나는 통증을 그렇게 느낀다. 감정이 상처 입고, 눌리고, 덮어지고, 꾹꾹 눌러 담기면 언젠가는 그게 몸으로 새어 나온다고.
귤을 한참 들고 있다 보면 껍질 안쪽이 부풀고, 말랑말랑해진다. 보이지 않지만 느껴진다.
감정도 그렇다. 말하지 않아도, 아프다. 숨겨놓아도 통증이 시작된다.
감정은 빛이고 몸은 그걸 투과하는 필름이다.
슬픔이 짙어지면 빛이 어두워지고 그 어둠은 필름 위에 통증이라는 그림자를 드리운다.
그래서 내 통증의 99%는 감정이라고 말하고 싶다. 예외도 있겠지만 만성 통증&자율신경실조증은 다르다.
묵은 감정들이 지금도 내 몸 안에서 작은 불꽃처럼 타고 있는데 누가 보면 단순한 근육통, 관절통이라 말하겠지만 사실은 감정이 한 자리에 오래 앉아 있었던 자국이다.
안타깝게도 몸이 보내는 신호는 늘 늦었다.
마음이 먼저 느낀 고통이 한참 뒤에야 몸으로 번역되었다.
그래서 나는 통증이 오면 내 감정을 먼저 들여다본다. 몸은 가끔 정직한데 감정은 늘 솔직하니까.
2025년 7월 초쯤 입원 당시 주치의 선생님께서 발열에 대해 나에게 말씀하시길,
"생활이 문제를 일으키진 않겠다는 느낌이 길어질수록 불안도는 자연스레 사그라듭니다.
기능이 생활을 해치는 수준이 아니라면 굳이 모든 것을 문제 삼지 마세요."
그 말은 내 귀에 이렇게 들렸다.
"당신은 삶을 살아낼 수 있는 사람입니다."
나는 종종 내 증상에 지나친 해석을 덧붙이며 오늘은 좀 나아졌나, 안 좋아졌나, 인생이 전복될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다.
지금도 충분히 괜찮은데 왜 그렇게 아프다는 증명을 하고 있었을까? 괜찮다는 것은 통증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고 삶을 유지할 수 있을 만큼의 박자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병이 나를 멈추게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몸이 불편하다고 해서 삶 전체를 내려놓을 필요는 없다는 것.
의사 선생님의 말은 참으라는 강요가 아니었고 견디라는 말도 아니었다.
살아 있다는 건 가끔은 병을 잊을 만큼의 작은 평온을 반복해 내는 일인지도 모른다.
기능이 생활을 해치는 수준이 아니라면 굳이 다 문제 삼지 않기!!
(기분에 따라 문제 삼기도 한다)
불편하고 힘들어도 삶은 계속되고 있었다. 나는 병에 갇히지 않는다. 삶을 살 것이고 살아낼 것이다.
감정은 약하지 않기 위해 숨겨야 할 것이 아니다. 행복도, 슬픔도 외로움도, 소외감도, 공허함도
느낀다는 건 여전히 반짝반짝 살아 있다는 뜻이다.
감정이 요동친다는 건 그만큼 마음이 정직하다는 뜻이 아닐까. 기쁨이 삶을 밝힌다면 슬픔은 그 빛이 얼마나 귀한지를 알려주는 그림자이자, 살아가는 이유를 알려주는 나침반이다.
그래서 어떤 감정도 절대로 사소하지 않다. 감정은 약한 것이 아니고 깊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통증에 대한 인식이 달라진 만큼 최근에는(2025년 8월 기준) 의사 선생님의 태도도 달라지셨다고 느낀다.
예전에는 '최선을 다해주겠다, 꼭 낫게 해 주겠다'라는 말들이 나에게 안심과 희망을 주었다면 요즘은 관찰하고 분석해 주신다.
과거에 나는, 무조건 ‘확신’을 줘야 안심했지만 지금은 함께 본다는 태도가 더 와닿는다.
오랜 치료로 신뢰를 쌓아가다 보니 알게 된 것 같다.
원장님도 다 알고 계신 거다.
만성 통증에 예민하고 고집 센 성격까지도.
그래서 주사나 물리치료 몇 번으로는 모든 걸 해결할 수 없으니 매번 나를 붙잡고 설득하고 조언하며 같은 말을 되풀이하셨고 때론 눈물을 흘려주기도 하셨다.
그렇게 진심을 다해 마음을 들들 볶는 원장님 앞에서 나는 오래된 굳은 빵이 따뜻한 오븐 속에서 서서히 부드러워지듯, 순해지고, 착해진다.
악랄한 마음이 올라와 모든 걸 포기하고 싶다가도, 이내 그 포기하려던 마음마저 접고 다시 한 걸음 내딛게 된다.
확신보다 동행을 선택했다
"완전히 좋아질 거예요."
이런 말은 급성 질환 앞에서는 통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재발하고 형태를 달리하는 통증들, 특히 꼬리뼈처럼 애매하고 미묘한 부위의 통증 앞에서는 정답이 없는 세계에 가까워진다.
그럴 때 확신에 찬 위로보다 시간이 좀 걸릴 수 있으니 “함께 가 봐요” 같은 과정 중심의 말이 훨씬 더 깊은 신뢰를 준다.
굳이 말로 강조하지 않아도 이제는 그 선택을 하고 계시다는 게 느껴진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에서 “함께 보자요. 지켜보자요”로 바뀐 그 말투 속에는
내 상태를 섣불리 단정하지 않고 함께 걸어가겠다는 태도가 담겨 있었다.
그래서 나의 치료는 치료라기보다는 함께 이겨내고 함께 공부하는 시간에 더 가까웠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을 거치며 내가 나를 바라보는 시선에도 변화가 생겼다.
스스로가 조금씩 성장하고 있다는 느낌.
그게, 생각보다 째지게 기분이 좋았다.
나는 한계를 두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아니 완전 싫어한다. “안 돼”라고 규정하기보다는 내가 직접 해보고 판단할 자유를 원한다.
원장님은 치료를 통제하거나 제한하지 않으신다. 나의 선택과 몸의 반응을 존중해 주신다.
진짜 치료와 돌봄은 제한보다는 격려와 신뢰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내 몸의 불편함을 인정하면서도 시도한 선택을 칭찬해 주실 때마다 나는 친절 이상으로 자율성과 자기 신뢰를 회복한다.
늘 “당신의 몸과 선택을 믿어도 된다”라고 말해주는 듯하다.
내가 만난 다른 의사 선생님들은 통제와 제한으로 안전을 확보하려 했지만 주치의 선생님은 긍정적인 강화로 성장을 이끌어주었다.
완전하지 않아도 함께라서
의사는 환자의 고통에 귀 기울이고 환자는 의사의 헌신에 마음으로 응답하며 함께 치료의 길을 걸어간다.
치유와 돌봄을 넘어 서로의 깊은 상처를 마주하며 회복의 희망을 나눌 때 환자와 의사는 더 이상 ‘의사’와 ‘환자’라는 이름에 갇히지 않는다.
서로의 어깨를 다독이며 같은 길을 함께 걷는 동반자가 된다.
하지만 의사와 환자는 완전하지 않은 존재다. 서로의 상처를 모두 감싸 안을 수 없고 항상 필요한 말을 해줄 수도 없다.
그렇지만 서로의 부족함을 인정하며 걸음을 맞춰 걷는 것이야말로 진짜 동행자의 모습일 것이다.
이런 인식이 자리 잡게 된 건 언제나 겸손하고 진심 어린 태도로 환자를 마주해 온 김정훈 원장님 덕분이다.
모든 게 망가진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에도 다시 한번 마음을 고쳐먹게 된다.
무너지기 직전의 마음을 간신히 붙잡고 그렇게 오늘도 한 걸음을 내딛는다.
원장님과 몇몇 친구들의 추천과 격려를 받으며 "지구에서 가장 행복한 의사와 나" 글 발행을 올해 3월에 시작해 벌써 5개월 차가 되었다.
내게 주어진 달란트라면, 어떤 이유에서든, 이 경험을 나누지 않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이야기가 누군가에게 작은 위로나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묻어두기보다는 세상과 나누는 것이 맞다고 느껴졌다.
진심을 담아 쓴 글들이 결국 누군가에게 어떤 의미를 줄 수 있을지 그 생각이 나를 계속해서 글쓰기의 길로 이끈다.
"지구에서 아직도 행복한 의사와 나" 2부를 이어가면서 생각지도 못한 많은 분들의 공감과 응원으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많은 분들의 댓글들은 스샷 해두었다.
특히, 의료진들의 메시지는 치유의 길에 있는 행보칸 환자임을 증명케 했다. 어느 선생님은 무척 황송하게도 자신의 환자분들께도 전해주시겠다고.
고통은 고립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경험으로 연결되고 있다는 큰 위안이 되었다.
내가 겪고 있는 아픔이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고 있다는 것은 그 어떤 보상보다 값지게 느껴졌다.
삶은 대단한 의미가 아니라 누군가의 말 한마디를 붙잡고 견디는 일의 연속일지도 모르겠다.
글로 만나는 나, 그리고 나
후일담으로서의 기록을 남긴 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처음엔 모든 게 부끄러웠다.
아프다는 것도, 흔들린다는 것도.
나는 내가 고장 난 기계처럼 느껴졌고 그 고장을 들키지 않으려고 덮고 또 덮었다. 아픈 건 괜찮지만 티 나는 건 두려웠다.
그렇게 꽁꽁 싸맨 마음이 자율신경 치료를 통해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실금이 몸에서부터 마음까지 갈라지더니 어느 날은 울컥, 또 어느 날은 담담하게.
내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들려주고 싶어 졌고 기록은 그 시작이었다.
사라지지 않도록 적어두는 것.
잊히지 않게 붙잡아두는 것.
그건 나만 아는 마음의 지도였고 언젠가 길을 잃을 내게 보내는 구조 신호였다.
나는 내가 아팠다는 증거를 남기고 싶었다.
그 흔적이 부끄럽지 않다고, 고통이 견뎌야 할 짐이 아니라 삶을 뿌리째 바꿔놓는 시작일 수 있다고 기록을 통해 증명하고 싶었다.
맑고 반듯한 시작은 아니었다.
모든 것이 안개처럼 뿌옇고, 방향도 없고, 그냥 아플 뿐이었다.
그런데 나중에 돌아보니 그 뿌연 안갯속이 시작이었다. 이전과는 다른 삶으로 진입하는 문이었다.
만약 아프지 않았다면 이런 기록도 없었겠지.
그렇다면 고통은 내 삶을 한 칸 깊게 눌러준 펜촉 같은 것이다.
살을 찌르고 지나가며 새긴, 그래서 아픈 만큼 또렷한.
말하자면, 그건 처음으로 마음에 작은 목소리가 생긴 순간이었다.
기록 이전의 나와 기록 이후의 나는 다르다.
그리고 그 차이가 나를 조금 더 사람답게 만들고 있다.
2025년 8월 12일 화요일 주사 치료실.
“원장님, 옛날에 통증일기 쓰라고 해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이제야 알겠어요.
왜 원장님이 그렇게 글을 쓰셨는지 왜 사람들이 마음이 아플 때 자꾸만 글을 붙잡게 되는지요.
원장님이 쓰신 제 이야기도 지금은 전혀 다르게 읽혀요.
신기해요. 이젠 제 얘기를 읽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삶을 엿보는 느낌이에요."
“감정에 빨려들지 않고 빠져나오죠?
그 글 속에 갇히지 않는 건 그때의 미리나 님과 지금의 미리나 님이 달라서 그런 거예요."
나는 일과 기록이나 치료기록은 썼지만 통증일기는 쓸 생각을 못했다.
그 당시엔 몰랐지만 지금은 그 조언이 얼마나 중요한 전환점이었는지 나를 회복시켰음을 주치의 선생님께 고백했다.
고통 중에 글쓰기는 나를 마주하고 정리하는 수단이 되었다.
고통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하지만 고통을 바라보는 내 자리, 내 시선은 지금도 조금씩, 눈에 띄지 않게 이동하고 있다.
고통 자체는 과거에 고정된 사건(?)처럼 박혀 있지만 나는 그 자리에서 조금씩 걸어 나왔다.
예전에는 고통 속에 잠겨 허우적대던 내가 지금은 그 고통을 조금 바깥에서 유리창 너머처럼 바라볼 수 있는 곳으로 와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똑같은 일기를 다시 읽어도 그땐 내가 너무 불쌍하다고 절규했던 글자들이 지금은 참 잘 버텼구나!
혹은 그럴 수밖에 없었겠지! 하는 이해와 다정함으로 다가온다.
기록은 그때의 감정이고 읽는 건 지금의 감정이다.
글은 아팠던 순간의 감정을 병 속에 밀봉하듯 봉인해 둔 것이고 지금의 나는 그 병마개를 열고
지금의 감정으로 다시 그 냄새를 맡는다.
어떤 날은 거기서 회복의 냄새가 나고 어떤 날은 치유되지 않은 마음이 울컥하고 올라와 눈물을 흘리게도 한다.
글은 그대로인데 마주하는 내 감정이 변한 것이다.
감정은 고통과 함께 출발하지만 둘이 나란히 걷진 않는다. 언제 멈췄다가 언제 튀어나올지 몰라서 기억보다 뒤늦게 무너지고 생각보다 오래 남는 것 같다.
그래서 고통의 단계를 지날 때마다 나는 서로 다른 얼굴을 한 감정들을 마주한다.
그 감정들은 이름도 없고, 방향도 없지만 기록은 그 얼굴들을 붙잡아 준다.
다시 읽는다는 건 그 얼굴들을 마주 앉아 바라보는 일이다.
일기장은 그때의 나를 붙잡고 있지만 나는 그 이후로 수많은 감정과 경험을 지나 조금은 다른 내가 되어 있었다.
며칠 전, 우연히 1년 전의 일기를 다시 읽었다. 유치해서 차마 공개는 못 하겠지만 과거의 내가 지금의 나에게 보낸 편지 같았다.
보낸 사람도 나고, 받은 사람도 나인데 그 사이를 건너온 시간과 성장이 다르게 읽히게 만들었다.
내가 쓴 글인데 다시 읽으면 자꾸만 다른 책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나는 그 다름 속에서 내가 얼마나 멀리 왔는지를 알아차렸다.
자율신경 치료를 통해 나아진 것들.
심계항진, PMS, 목디스크, 등줄기 타는 통증, 견갑골 쑤심, 불안장애, 우울, 트라우마...
진료 기록지 한 페이지에 꽉 찰 병명들이 줄줄이.
병명 나열이 뭐 대단한 훈장도 아니고 남사스러워서 이쯤에서 멈춘다.
가끔 재발할 때면 물리치료나 도수치료도 받곤 했다.
2024년 6월.
대학병원에서도 고개를 젓던 불명열이 마지막 보스처럼 남아 있다. 원인 모를 고열. 이쯤 되면 몸이 아니라 인생 전체가 열받은 게 아닐까 싶다.
분노조절이 안 되는 육체라고나 할까.
그래도 끝은 있겠지! 설마 이게 평생 시리즈물은 아니겠지!
시즌 파이널이 언젠간 오기를, 드라마는 좀비물보다 힐링물로 끝나기를 바랄 뿐이다.
2025년 8월 12일 화요일
자율신경실조증 회복기를 주제로 행복한 H 병원 유튜브 촬영을 했다.
같은 증상으로 고통받는 분들에게 희망을 전해달라고 하였지만 정작 나는 자랑질을 잔뜩 해버렸다.
“이만큼 회복했어요!”라는 말속에 은근한 자부심과 철 지난 감정 과시가 섞여 있었달까.
참고로 그날 컨디션도 썩 좋지 않았다. 내내 몸은 움찔거리며 신호를 보냈지만 되도록 들키지 않으려 애썼다.
병원 한 번 다녀오는 것만으로도 탈진하는 내게, 고작 1시간 촬영이었건만 끝나자마자 파김치가 되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너무 행복했다. 며칠 밤새 몇 번을 깨고 열이 올라서 고통받으며 뒤척였는데도 괜히 기분이 좋았다.
신체와 감정이 따로 노는 상태.
지금 쓰고 있는 이 회복기도 과거를 돌아보며 치유받는 과정이다.
문제는 그 과거라는 게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라는 데 있다.
아직도 치유 중인 내가 회복기를 쓰고 있으니 이건 수영을 배우는 사람이 수영 강좌를 여는 꼴이랄까.
허우적대면서 “이렇게 하면 됩니다!”라고 말하는 내가 스스로도 좀 웃기다.
그럼에도 이렇게라도 쓰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어딘가에서 치유는 조금씩 진행되고 있는 것 같다.
몸도 마음도 아직 완전히 낫지는 않았지만, 회복기를 나누고 싶다.
완벽한 상태에 도달한 뒤에야 말할 수 있는 게 아니라 부족하고 어설픈 지금 이 순간을 어떻게든 살아내고 있다는 그 사실 자체에 의미가 있다고 믿기 때문에.
그리고 나는 과거의 기록도 남기고 싶고, 지금의 기록도 남기고 싶다.
그 둘을 나누는 경계가 모호한 만큼 내 회복 역시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이어지고 있으니까.
그런데 가만 보면 이렇게 앞뒤가 뒤엉키고 감정이 먼저 튀어나오는 걸 보면 아무래도 내 글도 자율신경실조증에 걸린 것 같다.
몸이 건강했을 땐 수십 가지 걱정이 있었지만 몸이 아플 땐 단 하나였다.
"건강하고 싶다."
그래서 굳이 아파서 좋은 이유는 작은 것에 행복을 더 많이 느끼게 해 주고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게 무엇인지 단숨에 보게 해 준다는 것이다.
용서, 미움, 원망 같은 짐은 긴 여행길에 불필요한 돌멩이처럼 내려놓게 된다.
불필요한 욕심과 소음을 걷어내고 ‘살아있음’이라는 한 가지 소망에 마음을 모으게 해 준다.
자존감은 한순간에 솟아나는 샘물이 아니다.
벽돌을 차곡차곡 쌓듯, 시간과 지켜냄이 모여야 단단해진다.
매일 좋은 말을 스스로에게 선물하며, 쌓아가고 지켜가고, 건네는 훈련 속에서 조금씩 길러가는 것이다.
한없이 무너져도 괜찮다.
쉬면, 다시 일어설 힘은 더 강해진다.
***글이 길어 다시 한번 사과드립니다.***
이렇게 귀한 시간을 내어 제 긴 글을 읽어주시는 이유가 궁금할 정도예요.
‘그럼 짧게 쓰면 되지 않느냐’고 하실지 모르지만 제게는 그게 너무 어려운 일이 되었습니다.
늘 글을 쓸 때 굳게 다짐하면서도 말이죠.
말이 넘쳐흘러 스스로도 감당하기 힘들지만 어쩌면 자율신경실조증이 준 작은 선물인지도 모르겠어요.
스스로를 관찰하고 이해하는 힘을 조금씩 길러주었니까요.
모두 건강하고 행복하셨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