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괜찮으시면 저와 같이 교회 가 보시겠어요?
겸손의 치유
의사 선생님은 언제나 조용히 내 말을 끝까지 들어주셨다.
서둘러 결론을 내리거나 가르치듯 설명하지 않으셨다.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내 고통의 무게를 함께 들어주셨다.
그분 앞에 앉아 있으면 말을 고르지 않아도, 조리 있게 설명하지 않아도 모든 걸 말해도 괜찮았다.
내가 지닌 불안과 두려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감정들을 조심스레 꺼내놓으면, 잠시 침묵을 지키신 뒤 한마디를 건네곤 하셨다.
그 말에는 지식이나 이론을 넘어서는 무게가 담겨 있었다.
신속한 해결책은 물론, 오직 ‘당신의 고통을 이해합니다’라는 깊은 공감이 고스란히 실려 있었다.
그 태도에서 나는 참된 겸손을 배웠다.
이론이나 정보, 자신의 전문성을 앞세우기보다 타인의 마음을 먼저 헤아리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깊이는 진정한 앎의 무게이자 사람을 향한 존중이었다.
많이 알수록 더 조심스러워지고 아는 만큼 더 배우고자 하는 마음...
무엇보다 모른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가 얼마나 깊은 신뢰를 만드는지 알게 되었다.
그분은 늘 앞서 걷지 않으셨고, 어디가 길인지보다는 내가 어디로 향하고 싶은지 먼저 물으셨다.
그래서 그 발걸음은 방향보다는 마음을 따라가는 걸음처럼 느껴졌다.
살다 보면 누군가는 나보다 많이 알고, 더 경험이 많고, 어쩌면 더 옳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일수록 한 걸음 물러서서 내 걸음을 기다려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
그건 내가 이 길을 계속 걸어갈 수 있게 해주는 커다란 힘이다.
나는 그분을 떠올릴 때마다 다짐한다.
누군가의 마음 앞에서 쉽게 판단하지 않겠다고.
정답을 말하기보다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주겠다고.
그리고 함께 걷겠다고.
길이 아니라 마음을 따라.
2024년 8월 22일
드릴이 머릿속에서 돌고 있다.
관자놀이가 흔들리며 진공청소기가 뇌를 빨아들이는 듯한 당김이 느껴진다.
뇌 속에서는 연주자들이 타악기를 두들기며 축제를 벌이고 있다.
즐겁지 않은 소음으로 가득한, 나만의 폭풍 축제.
머리는 폭풍우 속 배처럼 흔들리고 온 신경은 그 중심을 붙잡기 위해 필사적으로 저항한다.
유난스럽고 집요한 두통...
그래도 열은 없으니 감사해야 하나.
더위 먹은 건가.
한참 두통에 시달리며 고통스럽던 그때, 주치의 선생님께서 괜찮냐는 연락을 주셨다.
"요즘은 좀 어떠세요?"
통제감과 안도감 사이에서 나는 늘 심리적 줄다리기를 했다.
혼자 있을 때 열이 나면 불안은 금세 찾아온다.
"만약 더 심해지면 어쩌지?"라는 생각이 꼬리를 물고 대처는 자꾸 늦어지는 것 같고 내 마음속에는 불안이라는 압박감이 자리를 잡는다.
불 꺼진 방 안에서 타오르는 촛불 하나를 지키는 느낌이다.
꺼질까 봐, 타오를까 봐, 무력감과 경계심 사이를 오간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병원에 도착해 열이 나는 상황은 전혀 다르게 느껴진다.
의료진이 있고, 장비가 있고, 내가 뭔가를 하지 않아도 누군가 바로 도와줄 수 있다는 사실이 나를 안정시킨다.
"마침 여기서 열이 나서 다행이다"라는 생각까지 든다.
비 오는 날 우산은 못 챙겼지만 편의점 앞 간이 천막 밑에서 비를 피하고 있는 기분.
빗줄기는 그대로지만 마음은 훨씬 가볍다.
같은 상황이어도 어디서, 누구와 함께 있느냐에 따라 감정은 불안에서 감사로 바뀐다.
자율신경의 증상 중 두통도 생길 수 있다지만 증상이 하나 끝날 만하면 꼭 다른 게 튀어나왔다.
그럴 때는 몸이 아프다기보다 뭔가 계속 “고장 나는 기계”가 된 기분이었다.
이른바 인간 종합수리센터 같은 삶.
몸은 분명 나 자신인데도 자꾸만 낯설고 버거웠다.
한동안 주사치료, 물리치료, 도수치료를 성실히 받았다.
치료사 선생님은 항상 두통에는 이 부위가 좋습니다!!라고 말하며 정성껏 치료해 주셨고 병원에 계신 다른 선생님들과도 신기할 만큼 좋은 호흡을 자랑했다.
병원 치료실이 아닌 작은 커뮤니티 카페에 온 듯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선생님은 악어새다. 유착된 부위를 잘 찾아 치료해 주시는 모습에서 내가 지어드린 별명이다.
별명이 마음에 드셨는지 '악어새'라는 이름이 좋다고 하셨다.
통증과 함께 하면서도 주위 사람들과의 소통을 통해 나름의 조화와 균형을 맞춰갔다.
그들의 말 한마디가 찬 바람 속에서 한 줄기 따뜻한 바람처럼 내 마음의 틈을 메워주었다.
그 고마움은 시간이 지나도 결코 퇴색하지 않을 것이다.
당시, 톡으로 SNS로 소통을 많이 했다.
나의 치료는 주사 치료와 도수 치료로 구성된다.
이 비율에는 수치 이상의 전략(?)이 담겨 있다.
주사는 통증이나 염증, 자율신경 반응처럼 몸 안에서 벌어지는 기전적인 문제에 직접 개입하는 역할을 해주는 것 같다.
신경, 염증, 통증 회로에 빠르게 손을 대고 망가진 회로를 차단하거나 조율하면서 몸의 기초 상태를 안정시켜 준다.
급한 불을 끄고 혼란스러운 몸을 진정시키는 강력한 수단이다.
몸이 감당하지 못하는 자극에 반복적으로 노출되면서 이제는 스스로 회복할 힘을 잃은 상태에서
나는 이 빠른 개입이 필요했다.
그에 반해 도수 치료는 보다 보조적인 역할에 가깝다.
근육, 관절, 움직임의 미세한 부정렬을 바로잡고 주사가 마련한 안정 위에 균형을 더한다.
기초공사가 끝난 건물 위에 벽을 세우고 틈을 메우고 창문을 달아주는 것처럼.
주사치료는 전쟁의 공격, 통증의 불을 끄는 소방수라면, 물리 및 도수치료는 무너진 도시를 재건하는 작업이자, 그 자리에 꽃을 심는 원예사다.
하나는 급박함에 반응하고 다른 하나는 회복을 시켜준다.
2024년 8월 24일
치료사쌤과 인증샷!
중간에 몸 상태가 좋아 몇 달 쉬기도 했지만 벌써 치료를 시작한 지 1년이 훌쩍 넘었다.
의사 선생님의 영향도 크지만 몇 달을 무통으로 지낼 수 있었던 건 치료사 선생님의 힘도 컸다.
내가 열이 나 구석에 앉아 있으면 다른 환자분을 문 앞까지 배웅한 뒤 꼭 내 곁에 와서 살피며 한마디씩 건네주셨다.
몇 달간을 무통으로 살아낼 수 있었던 건 의사 선생님의 진심도, 그리고 그 진심을 손끝으로 이어간 치료사 선생님의 정성과 기술 덕분이었다.
남의 몸처럼 낯설게 느껴졌던 시간 매일같이 무너지는 날들에 모두가 따뜻한 손길로 나를 붙잡아 주었다.
치료 이상의 것을 받았다는 걸 돌아보면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인기가 많으셔서 요즘도 예약의 차질이 생긴다.
나는 그 당시, 어떤 위기의 상황에서도 감정을 통제하고 문제를 빠르게 해결하는 방식에 익숙했다.
공감보다는 논리적 구조화, 감정의 언어보다는 사건 정리, 처리, 수습을 우선하는 태도였다.
무엇이 불편한지를 느끼는 것보다 그 불편함을 얼른 정리해 없애버리는 쪽이 더 맞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감정을 표현하거나 들여다보는 일은 늘 피로했고 무엇보다 그 감정의 책임이 나에게 돌아올까 봐 부담스러웠다.
"왜 그런지는 나중 문제고, 저는 지금 이걸 어떻게 수습할지가 더 중요해요.
감정 얘기는 복잡하고 괜히 내 책임처럼 들리는 건 더 싫어요."
내 솔직한 마음이었다.
특히 통증이 극한에 달했을 때는 감정은 자연스럽게 뒤로 밀려났다.
의식은 생존이라는 단 하나의 명령에 집중했다.
슬픔도, 억울함도, 외로움도 감정의 ‘꺼짐’ 버튼을 누른 듯 유유히 사라졌다.
아니다, 감정이 아예 사라졌다기보다 통증의 무게 아래 눌려 '비활성화'되었다.
그렇게 감정은 일시적으로 물러나고 의식은 그 모든 에너지를 지금은 살아야 한다! 는 목적에만 집중했다.
그때는 정말, 본능만 남은 것 같았다.
"움직이지 마. 숨 쉬어. 이대로만 있어."
살기 위해 남겨진 최소한의 명령들.
그 외의 모든 건 일시 정지된 상태.
통증은 감정을 압도하는 생존의 언어였다.
이해도 해석도 필요 없었다.
살아남기 위해 오직 ‘지금 여기’만이 존재했다.
그런데 통증이 조금 가라앉고 나면 밀려났던 감정들이 다시 돌아왔다.
마치 대기하고 있던 감정들이 순서를 기다렸다는 듯이.
"아까 진짜 아팠잖아."
"이렇게까지 힘든데 왜 하필 지금 또야?"
감정은 돌아오고, 또 무너지려 하고, 또 이겨내고 그렇게 반복됐다.
하지만 참 이상하게도 정말 죽을 것 같은 통증의 ‘중심’에 완전히 닿았을 때 더 맑고 단호해졌다.
의식은 또렷해졌고 숨소리 하나, 고개를 돌릴 때의 각도 하나까지 모두 선명하게 느껴졌다.
'여기가 아프고 이렇게 움직이면 더 불편하고...'
통증의 디테일도 또렷해졌고 감정은 거기에 덮이지 못했다.
"통증과 감정 사이의 경계"
그 사이 어딘가에서 나는 아프면서도 이상할 정도로 맑았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분명히 살아 있었다.
저와 같이 교회에 가 보시겠어요?
2024년 9월 1일 일요일
작년 봄, 원장님께서 다니시는 교회에 가고 싶다고 말했던 순간을 기억한다.
어디서 이런 용기가 솟아난 걸까.
누구에게도 쉽게 꺼낼 수 없는 말.
어떤 의사에게도, 어떤 자리에서도 간절함을 이렇게 솔직하게 드러낼 수 없었다.
오래된 나무의 가지가 비바람 속에서 조금씩 부러져 가듯 그 말을 꺼내기까지 얼마나 많은 망설임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왔을 때 그리 낯설지 않았다.
그렇게 나도 모르게 내가 의도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조금씩 풀어내고 있었다.
2024년 4월 28일
종교를 넘나드는 원장님을 뵈면 유년 시절 어려운 사람들을 다 안아주던 목사님 같았고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시는 부처님 같았으며 세상의 모든 자비를 품은 하나님 같았다.
각 종교가 전하는 위로와 평화가 한 사람에게 모여 있는 듯했다.
어린 시절 교회는 너무 강압적이어서 마음이 숨 막히곤 했지만 원장님은 나와 같은 모태신앙임에도 전혀 그렇지 않으셨다.
그래서 마음 놓고 교회에 가고 싶다는 설렘과 기대를 느꼈던 것 같다.
원장님이 다니시는 교회도 자유로울 거라는 막연한 생각.
제 환자분이 이렇게 좋아졌습니다.
이것은 제가 한 일이 아닙니다.
교회분들 앞에서 하신 말이다.
고통을 함께하며 회복을 시켜준 의사가 자신이 한 일이 아니라고 한다는 건 어떤 마음에서 나오는 말일까?
말로 다 할 수 없다.
기쁨과 감사, 안도감이 뒤섞여 눈물이 핑 돌았고 그간의 고통과 불안이 한꺼번에 풀려 나가는 느낌이었다.
나를 위해 이렇게 기뻐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나를 바라봐주는 시선이 이렇게 따뜻할 수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가슴을 벅차게 했다.
두려움보다 믿음과 안도감을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경험 덕분이었다.
교회 1주년이라고 했다.
나는 초대받은 손님처럼 발을 들였고 도착하자마자 맛있는 밥이 차려져 있었으며 여기저기서 흘러나오는 웃음과 담소가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몸이 아파 한때는 영혼까지 주저앉을 듯했지만 이 날만큼은 꼭 잘 고쳐진 가전제품처럼 반짝이고 싶었다.
설정값도 초기화됐고 작동도 멀쩡하다며 나 자신을 은근슬쩍 자랑하고 싶기도 했다.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여러사람들과 밥을 먹었지만 속으로는 “이제는 조금 괜찮아졌어요”라고 누군가에게 조용히 들려주고 있었다.
목사님을 처음 뵙던 날,
그분은 아주 자연스럽게 내 손을 잡으시더니 직장 이야기, 가족 이야기 등을 조심스레 물어오셨다.
어쩌면 그런 관심은 누군가를 처음 만났을 때 예의처럼 주고받는 대화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날의 관심은 새롭게 다가왔다.
세상이 조금 느리게 흐르고 내 마음이 조금 넓어진 듯했다.
아무것도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 속에서 나는 오랜만에 자연인처럼 숨을 쉬고 있었다.
교회의 형제자매분들도 마찬가지였다.
처음 보는 분들이었지만 낯섦보다 환대가 먼저였고 말없이 먹을 것을 건네고, 눈빛만으로 안아주고, 심지어 내 아픔에 눈시울을 붉히며 꼭 안아주는 분도 계셨다.
그 모든 것이 익숙하지 않아 낯설게 느껴졌지만 그 낯섦이 나쁘지 않았다.
잊고 있던 일상의 작은 여유, 진심으로 누리지 못했던 따뜻함이 이 공동체의 손끝, 말끝에서 고스란히 느껴졌다.
나는 무언가를 ‘다시 찾고’ 있었다.
사람은 진심으로 치유받는 순간이 얼마나 드문가.
그런데 이 세상에 이렇게 따뜻한 의사가 있고, 이렇게 포근한 병원이 있으며, 이토록 진심으로 나를 반겨주는 교회가 있다는 게 그날의 나를 적잖이 당황스럽게 했다.
세상이 그 잠깐만큼은 “당신을 위해 존재하고 있어요”라고 속삭이는 듯했다.
그리고 나는 그 속삭임을 믿고 싶어졌다.
그건 도저히 우연으로만 넘기기엔 너무 큰 선물이었다.
그 무렵 나는 병원과 교회를 오가며 왠지 마음이 통통 가벼워진 듯한 기분을 느꼈다.
거리의 풍경도 낯설게만 보이던 그 길이 이제는 특별해졌고 어쩌다 보니 나만의 회복 루트가 된 것 같아 흐뭇했다.
그리고 잊지 못할 그날의 김밥.
김밥이 뭐, 김과 야채에 밥 말아 놓은 거지.
하지만 교회에서 먹은 그 김밥은 확실히 달랐다.
속재료는 평범했지만 그 안에는 진심이 꽉 들어차 있었다.
그날의 김밥은 “이 정도면 먹고 살아볼 만하지 않겠어?” 하고 내 등을 토닥이는 듯한 맛이 났다.
돌잔치처럼 나눠주었던 떡 한 조각도 마찬가지였다.
고작 떡 하나 먹었을 뿐인데 속으로는 “괜찮아, 아직 너 안 끝났어!!”라는 메시지가 포장도 없이, 첨가물도 없이 쫀득쫀득 마음에 들러붙었다.
나는 그렇게 조금씩 내가 잃어버린 마음의 부스러기들을 주워 담았다.
다시 조금 더 나아질 거라는 막연한 확신이 김밥과 떡 사이, 단출하고 포근한 교회방에서 피어오르고 있었다.
목사님께서는 원장님이 어떤 의사인지를 궁금하다며 물으셨다.
나는 그 질문에 오랜 친구를 자랑하듯, 원장님에 대한 나의 깊은 신뢰와 존경을 숨김없이 이야기했다.
그 이후로, 나는 몇 번 더 교회를 갔다.
삶도 지구별 소풍이고
교회도 소풍처럼 가는 거예요.
원장님은 종종 그런 말씀을 하신다.
그리고는 웃으며 덧붙이신다.
“전도요? 그냥 좋은 소풍길 같이 걷는 거죠. 억지로 데려가는 게 아니잖아요.”
그 말을 들을 때면 나는 마음이 간질간질했다.
정말 신앙이나 삶을 그렇게 가볍게 말해도 되는 걸까?
세상이라는 정글을 헤쳐 나오느라 먼지투성이가 된 내게 ‘소풍’이란 말은 철 지난 봄 소풍 안내장을 들이대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묘하게도 그 말은 무르익은 볕처럼 마음을 데웠다.
원장님은 그 가볍고 둥글둥글한 말 안에 삶의 무게를 눌러 담는 법을 아는 분 같았다.
사실 나에게 ‘전도’라는 단어는 꽤 무거웠다.
마음이 가기 전에 책임이 앞서고
"내가 뭘 말해야 하지?"
"괜히 혹시 부담스럽게 느껴지진 않을까?"
이런 질문들이 덜컥 따라붙었다.
그런데 소풍이라는 말은 그 무게를 툭 털어내 버린다.
그분이 말하는 전도는 누군가를 설득하는 게 아니라 그저 햇볕 좋은 날 손에 김밥 들고 걷는 일에 가깝다.
처음 들었을 땐 솔직히 좀 어색했다.
유년시절 일기장에나 나올 법한 말 아닌가.
그렇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생각날 때마다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소풍이라는 말은 늘 끝이 있다는 걸 전제한다.
그래서인지 더 소중하고, 더 아름답다.
언제든 접고 돌아갈 수 있다는 전제가 지금 이 순간을 더 행복하게 한다.
원장님은 그런 분이었다.
삶을 필사적으로 붙들기보단 그늘진 벤치에 앉아 옆 사람과 김밥 한 줄 나눌 줄 아는 사람.
세상을 잠깐 들렀다 가는 소풍 장소쯤으로 생각하니 모든 게 한결 느슨하고 그래서 더 가벼웠다.
나도 나이를 먹을 만큼 먹었으니 알고는 있다.
삶이 그렇게 잠깐의 소풍 같다는 걸.
다만 너무 아프고, 너무 바빠서 잊었을 뿐.
언제부턴가 소풍길에도 성적표를 들고 갔고 김밥 속 계란말이 하나에도 자격을 따졌고 다 같이 웃는 사진도 홀로 눈치 보며 입을 다물었다.
그러니 주치의 선생님의 그 말 한마디가 기억될 수밖에 없다.
부담 없는 말이었지만 깊었고 뭔가 묵직했다.
신앙도, 삶도 끌고 가는 게 아니라 같이 걸으며 풍경을 나누는 것!
나에게도 그 말은 뿌리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누군가에게 이 소풍길을 권하려 한다.
“소풍길엔 김밥이 있고 끝이 있어도 그 끝이 반드시 슬픈 것만은 아니에요!! 함께 걸어요, 오늘 날씨가 이렇게 맑고 좋은데요"
다음 날, 월요일.
치료를 받기 위해 병원에서 다시 마주한 원장님은 같은 사람이었지만 그곳과 교회에서 느껴지는 온기는 사뭇 달랐다.
그럼에도 두 장소 모두 내 마음에 신뢰와 안심을 쌓아주었고 환자인 내게는 위로와 안전의 공간이 되었다.
나의 상처는 해결된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다.
상처는 흔적으로 남아 때로는 나를 흔들었고 또 때로는 나를 일으켜 세우는 힘이 되었다.
교회에서 느낀 따뜻함 병원에서 마주한 의사 선생님의 세심한 시선, 그리고 간증 속 벅찬 은혜와 기쁨까지.
이 모든 경험은 상처와 함께 공존하며 흔적을 품고 배운 것들을 안을 때 비로소 상처는 나를 약하게 만들지 않았다.
상처와 경험이 서로 엮여 매 순간 나를 지키고 성장하게 했다.
그날 이후로 조금씩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예전의 나는 종종 바랐다.
통증도, 감정도 느끼지 못하는 무감각한 내가 되기를...
그때는 아픔만이 전부라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안다.
감각을 지닌다는 것, 통증을 느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값지고 소중한 선물인지.
만약 무감각했다면 화상의 뜨거움도, 겨울바람의 차가움도 모른 채 지나갔을 것이다.
삶의 온도와 깊이를 동시에 경험하는 이 선물을 놓쳤을 테니까.
모두 다 구름처럼 지나갑니다.
가장 짙고 무거운 구름도 머무르지 못하는 순간의 존재일 뿐, 그 구름 속에 갇혀 허우적대던 내 고통도 본래 흐름의 일부였음을 이제야 깨닫습니다.
구름은 고정된 형태를 거부하고 늘 변화를 택하는 자유로운 몸짓, 어둠을 갖고 있어도 언젠가 눈부신 햇살로 흩어질 운명이 담겨 있습니다.
나의 상처와 감정은 깊고 어두운 바다에 있는 구름.
스스로를 무겁게 짓누르지만 바람에 실려 멀어져 가는 길 위에 있습니다.
강물이 세상의 시간을 담아 흘러가듯 내 마음 또한 그 흐름에 몸을 맡기며 아픔과 흔적을 남기지만 구름처럼 머무르지 않는 흐름의 일부임을 잊지 않으려 합니다.
모든 순간은 지나가고 나는 그 밀도 속에서 자신을 마주하며 구름이 흩어지는 그 자리에서
비로소 자유와 평화를 만납니다.
구름은 머물지 않습니다.
우린 살면서 누구나, 정말 누구나 삶이 송두리째 무너지는 듯한 순간을 겪습니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아픔, 누구에게 꺼내 말해도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그 고통.
어쩌면 지금... 그 순간을 지나고 있는 사람도 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때 느꼈던 고통이 지금도 선명한가요?
그때는 영원할 것 같던 절망이었는데 어느 날 문득 그 고통의 색이 바래 있는 걸 깨닫게 됩니다.
그게 바로 지나간다는 것의 위대함입니다.
지금이 너무 힘들어 햇빛조차 눈부신 고통처럼 느껴질 수 있어요.
하지만 그 빛이 나를 찌르는 게 아니라 언젠가 다시 따스하게 감싸줄 것이라는 것을 나는 이제 압니다.
고통은 내 전부 같았지만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조금 겪어보니 알겠어요.
우리가 그렇게 주저앉았던 시간도 결국 ‘지나간 이야기’가 되더라고요.
과거의 내가 너무 힘들어하던 그 일!!
지금의 나는 견뎌냈고, 살아냈고, 심지어 웃기도 합니다.
그 사실이 내 안에 숨은 힘의 증거입니다.
구름을 보세요.
머무는 듯하지만 단 한순간도 멈춰 있는 법이 없습니다.
우리 마음도 참 닮았습니다.
그때는 안 믿겼어요.
‘시간이 해결해 준다’는 말이 얼마나 무책임하게 들렸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지금은 알겠어요.
그 말이 얼마나 깊은 진실이었는지를.
지나온 고통은 이름을 잃습니다.
그때는 정말 그랬어요. 하루에도 몇 번씩 무너지고 아무것도 삼킬 수 없고 아무것에도 닿을 수 없었거든요.
죽음 같던 고통도 떠밀려 언젠가는 옅어지고 그 고통은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다만, 이름을 잃습니다.
당신이 지금 겪고 있는 절망도 그래요.
모든 것이 무너졌다고 느껴지는 이 순간도 언젠가‘지나온 어떤 날’이 되어 이야기의 한 줄로만 남을 것입니다.
구름처럼, 잠시 머물다 지나가는 것들처럼...
지금 숨 쉬는 것조차 버겁다면 부디 이 말만은 기억해 주세요.
정말 지나갑니다.
그 고통도, 그 눈물도, 이 계절처럼, 이 구름처럼 다 지나갑니다.
그러니 너무 미워하지 마세요.
지금의 나를.
지금은 지나가는 길목에 서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 길 끝엔 반드시 당신만의 따뜻한 계절이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감정은 약하지 않기 위해 숨겨야 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인간으로서 겪는 가장 진실한 흔적입니다.
행복도, 슬픔도 외로움도, 소외감도, 공허함도 그 어떤 감정도 소중하지 않은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느낀다는 건, 여전히 반짝반짝 살아 있다는 뜻이고 감정은 요동친다는 건 그만큼 마음이 솔직하고 정직하다는 뜻이 아닐까요?
기쁨이 우리의 삶을 밝힌다면 슬픔은 그 빛이 얼마나 귀한지를 알려주는 그림자니까요.
감정은 다만,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를 알려주는 나침반입니다. 그래서 어떤 감정도 절대로 사소하지 않습니다.
저는 감정은 약함이 아니라 깊이라고 생각해요. 우리가 느낀 모든 마음은 이 지구별 여행의 한 페이지를 채우고 있으니까요.
감정은 우리가 살아 있음을 말해주는 가장 근원적인 언어이지요.
사라져야 할 불청객이 아니라 내면을 비추는 거울입니다.
어떤 감정도 함부로 밀어내지 마세요.
주치의 선생님의 지구별 여행의 길동무라는 말이 참 홀가분하고 좋다.
치료의 대상이 아닌 그저 한 사람으로 존중받는다는 느낌은 아픈 지점은 여전한데 마음의 무게가 조금 덜어졌고 지독했던 불안의 틈새로 위로가 베어 들었다.
1년 전, 나는 조금 더 앓고 있었고 조금 더 고립돼 있었다.
아프다는 것은 통증의 문제가 아니었다.
삶이 불투명해지고 모든 가능성이 조금씩 희미해지는 과정이었다.
나는 혼자 있는 걸 즐긴다.
말을 아껴도 괜찮은 시간,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는 공간.
고요해지는 그 자유로움을 나는 오래 사랑해 왔다.
관계의 피로에서 벗어나 자기만의 시간을 갖는 것이 회복으로 느껴졌으니까.
하지만 오랜 시간 아픈 사람은 외롭다.
아플 때의 외로움은 자발적인 고독과는 달랐다.
그것은 선택할 수 없는 상태에서 오는 무력감과 단절감이라서.
함께 있어도 혼자라는 생각!
누가 곁에 있어도 내 몸의 고통과 불안은 나만의 것이고 아무도 대신 느껴줄 수 없다는 절대적인 고립감.
언어가 닿지 않는 거리,,, 아프다는 말을 반복해도 그 깊이나 불편함은 완전히 전달되지 않으니 점점 말수가 줄고 침묵에 익숙해진다.
도움받는 일에 대한 죄책감으로 시간이 지날수록 누군가에게 계속 의지하는 일이 미안해지고
"민폐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 더 말없이 견디게 된 적도 있었다.
삶의 리듬에서 밀려나는 느낌!
세상은 계속 움직이는데 나만 정지된 시간 속에 있는 듯한 존재가 소외된다는 느낌...
말수가 줄고 표정이 단조로워지고 아픈 부위보다 고립된 마음이 먼저 시든다.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도 아플 때 느끼는 외로움은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아무도 함께할 수 없는 고통이기 때문에 찾아온다.
고요한 밤이고 싶었는데 무너지는 낡은 집 같은 것이었다.
조용한데 무섭고 평화로운데 텅 비어 있었다.
그래서 ‘길동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울컥했다.
치료해 주는 역할의 누군가가 아닌, 지구별이라는 이 삶의 여정에서 같은 방향으로 같은 속도로 함께 걷겠다는 사람의 고백처럼 들렸다.
중간에 멈춰도 괜찮고 천천히 걸어도 괜찮다는 말!
내가 병든 몸을 이끌고 길 위에서 주저앉더라도 괜찮다고, 같이 쉬어가겠다고 말해주는 듯한 다정함!
의료는 기술이기도 하지만 언어이기도 하다.
그 '말'들이 나를 다시 지금에 붙잡아두었다.
내가 아직 나름 행복하게 잘 살아내고 있구나.
의료현장에서는 종종 죽음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닌다.
특히 만성질환을 앓는 환자에게는 삶은 점점 뒷전으로 밀리고 버텨야 할 목록만 남는다.
그러나 "지구별 여행"이라는 표현은 삶의 끝이 아니라 과정에 주목하게 했다.
죽음에서 눈을 돌려 지금 이 순간에 발을 디디게 만들었다.
삶이 들른 별 하나에서의 짧은 여행이라면 이토록 애써야 할 이유가 있다.
주치의 선생님을 통해 겸손은 자신을 낮추는 게 아님을 알았다.
상대의 삶을 높여주는 힘이라는 것을.
그분의 겸손은 나를 작아지게 하지 않았고 내 아픔을 의미 있는 경험으로 바꾸어 주었다.
약도 치료도 중요했지만 나를 살린 것은 의사의 겸손한 태도였다.
그 겸손 속에서 신뢰가 자라고 신뢰 속에서 회복이 자랐다.
겸손은 치유의 힘이다!!
함께 걷는 누군가가 있다면 서서히 치유의 이름을 갖게 된다.
무게보다는 가벼움, 불안보다는 여유.
이 조합이 조금씩 균형을 잡아가기 시작했다.
삶이 정말 가볍다고 느껴졌다.
이토록 마음이 가벼울 수 있다면 몸이 조금 아프고 불편하더라도 이 여정을 나는 계속 걸어갈 수 있을 것 같다.
행복한H 병원의 김정훈 의사 선생님은 저에게 구세주이자 신 같은 존재입니다.
지금도 이렇게 살아 숨 쉬는 순간마다 감사할 뿐입니다.
내가 구세주라 부를 때마다 원장님은 늘 고개를 저으며
자신의 일이 아니라고 말씀하시지만, 정말 아실까요?
당신 덕분에 내가 얼마나 행복한지,
내 삶이 얼마나 빛을 되찾았는지.
https://brunch.co.kr/@nothing8/2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