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율신경 실조증 불명열 빠이

길을 잃었다는 건 어딘가로 가려던 의지가 있었다는 것

by 미리나


1. 어느 비둘기의 자기애 보고서

구구. 오늘도 나는 공원 벤치 밑에서 누군가 흘린 과자 부스러기를 줍고 있다. 가끔은 사람들이 던져주는 강냉이 알 수만큼의 가치밖에 없는 존재가 된 것 같아 서글퍼지지만 진짜 문제는 그들이 나를 ‘닭둘기’라 부르는 데 있지 않았다.


내가 나를 날개 달린 '쓰레기통' 정도로 여기며 스스로를 방치해 온 것이 문제였다.




내가 나를 헐값에 시장 바닥에 내놓으면 세상은 기다렸다는 듯 나를 공짜로 부려 먹으려 달려든다. 정작 내가 나를 귀하게 모시지 않으면서 지나가는 행인이 나를 평화의 상징으로 대접해 주길 바라는 건 밑 빠진 독에 강냉이를 들이붓는 격이다.


내 깃털을 정성껏 고르는 태도는 최소한의 방어이며 조류로서의 품격이다.






95세까지 전국의 높은 산을 오르내리시던 내 외할아버지는 96세의 일기로 소풍을 떠나셨다. 내가 보기에 세상만물의 이치를 평생 탐구하셨음에도 임종의 문턱에서 남기신 말은 '아직 할 일도 많고 배울 게 많은데...'라는 나직한 아쉬움이었다. 그 미련은 지식에 대한 목마름이 아니었으리라. 삶의 끝에 다다라서야 비로소 마주하게 된 질문,


‘나는 나를 얼마나 더 깊이 사랑할 수 있는가’라는 궁극의 화두를 다 풀지 못한 아쉬움이었을지도 모른다.




그 말을 곱씹다 보니 내 삶의 태도가 함께 떠올랐다. 나는 그동안 가족과 타인에게 넉넉한 그늘을 내어주는 큰 나무가 되고 싶어 안달하며 살아왔다. 내가 조금 더 고생하고 직장에서는 나만 참으면 모두가 평화로울 거라 믿었다.


타인의 고통을 지켜보는 일은 내 살이 베이는 것보다 불편했기에, 나의 안온함을 깎아 타인의 빈자리를 채우는 쪽을 택했다. 남을 가려주려 무리하게 가지를 뻗는 사이, 나를 잡아주던 중심 뿌리는 속절없이 썩어가고 있었다.


할아버지의 빈자리에 고인 적막 앞에서 아프게 배웠다.




사람들은 흔히 인간을 이기적인 존재라 말한다. 내게는 가장 다루기 어렵고도 가혹했던 것은 이타적 본능이었다. 내가 조금 불편하더라도 주변이 평온하다면 불편함을 감내하는 것이 훨씬 견딜만했기 때문이다.


뿌리가 병든 나무는 자신이 드리운 그늘마저 말라죽게 만든다.


내가 내어줄 그늘을 끝까지 지키기 위해서라도 나는 나를 가장 먼저 사랑해야만 했다.




떠나신 할아버지가 마지막 순간까지 아쉬워하셨던 '배움'의 실체를 짐작하게 되었다. 그것은 타인이라는 광활한 세상으로 나아가기 전에 ‘나’라는 세계를 먼저 구축하는 일이라고.


만약 행복의 핸들을 '남의 눈치'라는 네비게이션에 맡긴다면 도착할 곳은 나 없는 세상이라는 미궁뿐이다. 인생의 끝자락에 이르러서야 "나답게 살지 못했노라"며 무릎을 쳐본 들, 그때는 비상할 수 있는 날개 근육이 모두 빠져나간 뒤일 것이다.




2. 감정 수용과 용기

그동안 기쁜 감정만 금쪽 같은 내 자식처럼 품에 끼고 살았고 슬픔이나 불안은 불청객처럼 차갑게 문전박대해왔다. '너는 왜 이렇게 자주 아프니?' 라며 스스로를 쪼아대던 날들. 이제는 나의 어둡고 찌질한 모습에도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했다, 그럴 만했지'라고 말해주려 한다.


타인의 시선이라는 새장에 갇혀 남의 평가에 일희일비하는 건 나 자신을 노예로 등록하는 일이다.


세상이 나를 찬양한들 내가 나를 혐오한다면 그 모든 박수는 공허하다. 그건 그저 화려하게 치장된 쓰레기통이 아닐까.


착한 비둘기가 되겠답시고 모든 부탁에 구구거리며 고개를 끄덕이는 건 나 자신에 대한 가혹한 범죄이기도 하다.


고로, 내 날갯짓에도 분명한 한계가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3. Doing보다 Being

나는 성과를 냈을 때만 나를 기특해했다. 알을 잘 낳았을 때, 멀리 날았을 때만 말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전신주에 멍하니 앉아 있는 날에도 나를 안아줘야 한다.


나의 가치는 무언가를 해내는 Doing이 아니니까. 이곳에 깃털을 세우고 존재하고 있는 Being에 있으니까.



내가 나의 가장 친한 친구가 되어주면 세상은 비로소 나를 함부로 걷어차지 못한다. 나를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일은 이 세상을 가장 우아하게 비행하는 법을 익히는 일이다.


자, 이제 다시 깃털을 골라볼까. 오늘은 나라는 샘이 아직 마르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해두려 한다. 구구.




지난해 1월, 브런치 작가승인 후
3월부터 이 연재를 써왔다.



나는 대단한 ‘쫄보’다. 어느 정도냐면 내 SNS는 가족조차 가차 없이 차단 목록에 올리는 평화주의자다. 가장 가까운 이들의 시선조차 검열의 대상이 되는 내게, 익명의 파도는 너무나 무서웠다. 주변에서는 일주일 내내 내가 여기저기 노출되고 있다며 박제된 캡처본을 갈무리해 보내왔다.


손바닥만 한 액정 안에서 내 삶이 무한 복제되고 하루에 구독자가 백 명씩, 낯선 이들이 내 방 문고리를 따고 들어오는 것 같은 속도로 늘어났다. 누군가에겐 놀라움의 징조였겠지만 내게는 실체 없는 시선들이 몰려오는 습격 같았다.




알고리즘이라는 보이지 않는 손이 나를 넓은 잔디에 세워둘 때 환호보다 먼저 찾아온 것이 공포였다. 안전장치 없는 공중부양, 혹은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속도로 타인의 삶에 침투하고 있다는 당혹감. 불편한 사람들의 빗장을 걸어 잠갔던 겁쟁이에게 이 무분별한 환대는 재난에 가까웠다.




누군가의 눈에 띈다는 건 박수받는 일이었지만 내밀한 상처까지 실시간으로 중계당하는 위기였다. 지금은 그 무서운 속도감 속에서 평온을 찾으려 한다.


광장의 소음이 아무리 커진대도 내가 지켜내야 할 것은 거울 속 나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용기뿐임을 잊지 않기 위해서다.





25년 4월 1일 만우절
거짓말처럼 마침표가 찍혔다.



인스타 기록



“구름을 놓치지 말라”는 말은
고통 이후에도 경이를 잃지 말라는
따뜻한 당부가 아니었을까.



작년 2월, 만성 통증과 암환우분들이 모인 단톡방에서 나는 삶의 가장 벅찬 축포를 맞이했다. 열이 드디어 떠났다는 소식 때문이었다. 그동안 원장님께 지리멸렬한 통증의 기록들을 수시로 쏟아내곤 했다. 바쁜 걸음을 걷는 분의 귀한 시간을 훔치고 있다는 미안함이 늘 마음 한구석에 묵직한 부채처럼 남아 있었다.


원장님은 내가 던지는 소통의 소음들을 신호로 반겨주셨다. 소통을 즐기시는 그분의 성향은 나에게 커다란 면죄부가 되어 아픔을 조금 더 솔직하게 꺼내 보일 수 있었다.




단톡방 축하는 긴 치료를 졸업하고 지구별 여행자라는 근사한 직함으로 세상에 복귀해도 좋다는 찬란한 합격 통지서 같았다. ‘환자’라는 꼬리표를 떼어내고 전 세계를 누비는 ‘여행자’로 신분이 수직 상승하던 것 같았던 황홀한 순간을 잊지 못한다.


돌아보니 대단하고 거창한 기적은 없었다. 다만, 잿빛 속에서도 작은 희망의 불씨를 찾아낼 줄 아는 영혼의 눈이 생겼다. 어쩌면 이러한 시력을 갖게 된 것은 내 생애 가장 거대한 기적이었다.




인생은 때때로 짓궂은 극작가처럼 시나리오를 써 내려간다. 몸을 휘감던 불길이 완전히 사그라진 바로 그날, 나의 가이드는 거짓말처럼 소임을 다하고 떠나셨다.


세상의 모든 농담이 진담처럼 허용되는 만우절에. ㅎㅎ


내게 ‘여행자’라는 새 이름을 지어주고 손바닥만 한 작은 행복을 놓치지 말라던 다정한 가이드.


그분은 본인의 안내 여행을 내가 완치되고 멈추는 순간에 맞춰 마치 마법처럼 끝내셨다.


그런데 치료가 종료되어 병원 밖 일상으로 돌아온 뒤에도 '랜선 가이드'가 되어 끝까지 열을 체크하며 돌봐주셨다.



내게 주신 마지막 처방전은 사환이 찾아낸 그 손바닥만 한 행복(구름)을 놓치지 않고 열이 내린 이 몸으로 세상을 여행하라는 특명이었음을. 그것은 내 인생 지도 위에 세워진 따뜻한 이정표이자 당신과 내가 함께 써 내려온 투병기 위에 손수 찍어준 가장 눈부신 마침표였다.


'사환의 걸음일지라도 포기하지 말고 이 행성을 누려야지...'


가이드가 내어준 선한 마음들을 등불 삼아 지구별을 혼자서도 씩씩하게 유랑하려 한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가야 할 길


고통은 철저히 일인칭의 영역이었으나, 나의 궤적을 뒤따르는 누군가의 시선이 닿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고립이 아니었다. 조난된 영혼에게 당도한 뜨거운 무전이었고 나라는 섬이 망망대해에 버려진 게 아니라는 구원의 신호였다. 내가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방황할 때 내 발밑의 진흙탕을 묵묵히 함께 바라봐 주신 김정훈 원장님.




그분의 언어에는 종교적 도그마가 주는 압박이 없었다. 특정 신앙의 좁은 틀로 가두지 않고 모두가 공유하는 보편의 언어로 나의 고통이 머무는 영토를 넓혀주셨다.


고통을 거창한 훈장이나 성스러운 순교로 포장하지 않고
밟고 지나가야 할, 축축한 삶의 터전으로 인정해 주는 정직한 시선과 담백한 온기에 기대어 비로소 나는 고통과 화해할 수 있었다.




고통은 참으로 고약한 성질을 지녔다. 그것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않는 한, 남는 것은 악에 받친 저항뿐이다. 비명에 가까운 저항은 통증을 끝을 알 수 없는 가사노동처럼 무의미하게 에너지를 갉아먹는다.


나는 이 무익하고도 처절한 항전에서 비굴하지 않은 품격 있는 항복의 미학을 배우고 싶었다. 고통이라는 파도에 몸을 맡겨 주저앉지 않는 법을 익히는 고도의 지혜 같은 것 말이다.


원장님은 내가 매일 아침 조금씩 쥐어짜 내던 초라하고도 앙상한 용기에 눈부신 이름을 붙여주었다.


그 이름은 다름 아닌 ‘행복한 삶’이었다.






5월, 글쓰기에 한창 몰두하던 그 무렵이었다. 원장님은 내 글 아래에 답글을 남겨주셨다. 단어와 단어 사이, 행간에 스며든 흔적들은 한 번 읽고 나면 좀처럼 지워지지 않아 마음에 고스란히 보존되었다.


삶의 잉크가 모두 말라버렸다고 느껴질 때 다시 펜을 적시기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것처럼 나의 화폭을 붙들어 준 이젤 같았다.






힘을 빼는 연습은 힘을 주는 연습보다 훨씬 어렵고 고결하다. 오늘만큼은 애써 저항하지 말고 그저 몸이 이끄는 대로 푹 쉬어보는 건 어떨까? 아픈 몸으로 저항하느라 온 에너지를 쏟아붓고 나면 남는 건 텅 빈 허무함과 지독한 탈진뿐이다. 흡수해서 버릴 건 버리고 남겨진 상처를 양분 삼아야 다시 일어설 생명력을 얻는다. 독(毒)도 잘 다스리면 약이 되듯 지금의 아픔은 나를 더 깊은 바다로 나아가게 하는 해류가 될 것이다.





누군가의 손길이 한 사람의 세계를
이렇게까지 다시 열 수 있구나



행복은 달콤한 시럽처럼 늘 매끄럽게 흐르지 않는다. 차라리 묵혀둔 씨앗이 두꺼운 껍질을 뚫고 '벌컥!' 하고 비명을 지르며 터져 나오는 절절한 태동에 가깝다.


너무 미미하여 온 신경을 곤두세워야 겨우 들리는가 싶다가도, 때로는 그 기세가 너무도 맹렬해 감은 눈꺼풀 아래를 사정없이 울려댄다. 외면하려 고개를 돌려도 잔상으로 남고 억지로 덮어두려 해도 증발하지 않는 완강한 생명력이다.




내가 한 사람을 삶의 경유점으로 삼아 바라본 세상은 예전보다 조금 더 부드러워졌고 조금 더 멀리까지 시야가 닿았다. 내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길들이 내 발밑에 정갈하게 펼쳐져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마음속에서 부풀어 오른 이 아름다운 축복은 수시로 나를 건드린다. 칼끝처럼 예리하게 심장을 찔러대던 날카로운 기억들도, 이 벅찬 온기 앞에서는 묵은 사슬처럼 속절없이 녹아내린다.


이 고마움을 과연 어떤 말로 다 옮길 수 있을까. 이제 나는 억지로 언어를 옮기려 애쓰지 않는다. 자칫 붙들고 늘어지다가는 그 귀한 감정이 상처 입을 것만 같아서다. 그저 닿을 듯 말 듯한 이 울림을 피부로 받아들이며 살아갈 뿐이다.


구태여 설명하려 들면 이 마음은 논리에 포획되기도 전에 저만치 달아나 버릴 것만 같으니까.




다시 쓰는 고백 (행복한 환자)


누군가는 내 이름 앞에 붙은 ‘행보칸’이라는 수식어를 보고 조소 섞인 숨을 흘릴지도 모른다. 그들에게 ‘환자’라는 꼬리표는 인생이라는 긴 레이스에서 잠시 속도를 늦춘 이에게 붙여진 번호표이거나, 더는 쓰이지 않을 것이라 단정 지은 낡은 기계의 소음처럼 들릴지도 모르겠다.


만약 그런 질문이 내게 배달된다면 나는 뻔뻔하고도 명징하게 대답하리라.


“아픔에 온몸을 내맡겼던 그 비참한 소외의 시간들이 지금 내 삶의 온기를 빚어냈노라고.”


시린 소외의 계절이 빚어낸 전유물이기에 내가 스스로를 ‘행복한 환자’라는 모순의 이름으로 명명하는 이유다. 바닥으로 굴욕적인 헛발질들이 내 삶의 지지반등을 위해 대지를 짓누르던 가장 묵직한 하중이었다.




추락하여 바닥에 닿는다는 것은 절망의 끝이 아니다. 다시 튀어 오르기 위해 발바닥에 닿는 가장 단단한 지지대를 발견하는 경이로운 사건이다. 지금 내 몸안에서는 나를 세상 밖으로 밀어 올릴 야생의 근육들이 요동치고 있다. 이 삶은 오롯이 나의 것이며 '나'라는 여행자를 광활한 지평선 위에 세운 주권 또한 나에게 있다.


누구도 내 인생의 티켓을 대신 끊어줄 수 없으며 내 비극의 서사를 멋대로 마침표 찍게 두지 않을 것이다. 나는 지금 가장 찬란한 삶, 어디론가 가로지르고 있으니까.




질문이라는 이름의 은총



인생이 수직으로 꺾여 내려가던 절벽 끝에서 나는 그분을 만났다. 그날 이후 내 신경계는 매일같이 기괴한 파티를 열었다. 통증이 해일처럼 밀려와 온몸의 회로를 태워 먹어도 내 삶을 ‘불행’이라는 값싼 라벨로 분류하지 않았다.


그렇게 부르기엔 이 고통의 맛이 너무도 진하고 비릿했기 때문이다. 무채색으로 흐려지는 일반적인 불행과 달리, 나의 통증은 지나치게 화려한 원색의 폭발이었다.




2년 전, 삶의 끈을 놓아버리려 했던 건 세상을 향한 거창한 복수극이 아니었다. 유통기한이 지난 우유를 싱크대에 부어버리듯, 맛이 간 삶을 정리하고 싶었던 소박하고 시시한 충동! 그것은 끝내고 싶다는 절규이자, 다시 태어나고 싶다는 처절한 비명이 아니었을까.


즉효성 약물들이 약속하는 가짜 평온 대신, 한 의사의 바른 뒷모습을 바라보는 일을 택했다. 그분의 ‘질문’들이 내 영혼의 가장 후미진 곳을 조심스레 건드릴 때마다 쏟아져 나오던 진실들이 묘하게 내 호기심을 자극했기 때문이다.




어떤 판단의 얼룩도 섞이지 않은 채 오직 나의 주파수만을 수신하던 경청. 내면의 지하실까지 나를 끌고 내려가 끝내 나 자신을 대면하게 만들었던 질문들은 녹슨 메스처럼 내 위선을 정교하게 벗겨냈다.


나는 ‘질문이라는 은총’에 떠밀려 스스로 파두었던 동굴의 벽을 긁고 올라와 마침내 빛을 마주했다.




돌이켜보면 참으로 우습고도 아이러니한 결말이다. 수없이 삶을 쓰레기통에 처박으려 획책했지만 이 삶은 유기견을 다시 품에 안듯 나를 물어다 햇볕 아래에 내려놓았다.


이런 깜찍한 집착이라면 차라리 기꺼이 즐겨주기로 했다. 어차피 이 여행의 티켓은 환불이 불가하니까.


단 한 번도 내 손을 놓지 않았던 나의 삶.
이제는 그 집착이 진심으로 고맙다.



버텨낸 계절이 또 쌓였다.



예전의 나는 ‘나’를 대접하는 법을 전혀 몰랐다. 수행이나 배움이라는 것이 내가 원하는 바를 이뤄주는 비법서인 줄 알았으나, 막상 손에 쥔 건 남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만드는 고도의 연기 교본뿐이었다.


삶이라는 것도 어디서 적당히 고개를 숙여야 천장이 낮은 터널을 무사히 통과할 수 있는지를 익히는 서글픈 기술인 줄 알았다. 타인을 향한 예의는 가식적으로라도 갖췄으되, 정작 비명을 지르는 나를 잠시 멈춰 세우는 법은 배우지 못했다. 내게 속도를 줄이는 건 늘 게으름이라는 낙인이자, 퇴보라는 이름의 유죄 판결이었으니까.




그러다 길을 잃었다. 목적지를 모를 때보다, 내가 누구였는지는 너무 또렷한데 지금의 내가 도무지 낯설 때 더 명확했다.


예전의 삶은 작아져 버린 옷처럼 몸을 조여 오고 새 삶은 아직도 수시로 배송 중이다. 운송장을 아무리 조회해 봐도 늘 곧 도착 예정이라는 문구만 깜빡인다. 그래도 지금 그 사이를 걷는다.


누구에게 자랑할 수도 없는 어중간한 진흙탕 구간을...




배송이 늦어지는 건 그 삶이 물건이 아니고 정성껏 빚어지는 중이기 때문이다. 도착하지 않은 새 옷을 기다리며 벌거숭이로 서 있는 이 시간은 나를 가장 솔직하게 느낄 수 있는 유일한 기회다.


운송장만 새로고침하며 길 잃은 기분에 서성이고 있어도 괜찮다. 길을 잃었다는 건 적어도 어딘가로 가려던 의지가 있었다는 거니까.


자랑할 수 없는 이 애매한 구간은 타인의 예의를 벗어던지고 나와 대면하기 시작한 가장 뜨거운 현장이다.



다음에는 더 건강해진
“지구별 여행자”로 인사드릴게요.



원장님, 다음에 다시 뵙게 된다면 통증의 명세서 대신
당신 덕분에 얻은 눈부신 안부들을 한 짐 가득 안고 가겠습니다. 병색을 말끔히 털어낸 지금, 마침내 제 자리를 찾은 ‘지구별 여행자’의 당당한 발걸음으로 말이죠.


고통의 비명이 환희의 숨소리로 바뀌던 찰나, ‘벌컥’ 절망이 '탁' 풀리며 척추가 꺾이는 듯한 그 소리를 심장 깊은 곳에 보석처럼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제가 갈구해 온 자유의 공기이니까요.




세상은 그 찰나를 곧 잊어버리겠지만 고난의 열처리를 지나 단단해진 결정은 이제 제 내면을 비추는 빛이 되었습니다.
삶의 어떤 풍랑이 와도 그 보석을 꺼내 들고 그날의 해방감을 다시 호흡하게 될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아요.


제게 그것은 삶을 깨우는 태동이었거든요. 한 번 울리고 사라지는 소리가 아니라 필요할 때마다 언제든 불러낼 수 있는 제 영혼에 새겨진 천연 비상약이 되었습니다.


마음이 기울 때마다 꺼내먹으면 신기하게도 아무리 짙은 어둠이라 해도 더 이상 저를 삼키지 못하리라는 용기가 차오릅니다.




이제 마음속으로 당신께 말합니다.


“원장님, 저 이제 정말 괜찮아요.
보세요. 이렇게나 활짝 웃고 있잖아요.”




질병 너머의 삶을 다시 세워주신 원장님, 자율신경실조증과 만성통증, 그리고 모두가 고개를 젓던 불명열까지. 끝이 보이지 않을 것만 같던 터널에서 김정훈 의사라는 따뜻한 의학을 만났어요. 마음까지 돌봐주시고 재활해 주신 덕분에 병원에서의 시간은 그 어느 때보다 뜨겁게 성장했습니다. 보여주신 ‘포기하지 않는 마음’은 제 남은 삶의 가장 큰 이정표가 될 것입니다.




고통을 딛고 배움으로 나아가게 해 주신 다정한 인술의 은혜에 깊은 존경과 진심 어린 감사를 드립니다.


당신이 열어준 그 문 밖에서 저는 매일 톡톡 터지는 행복의 거품들을 만끽하며 잘 살아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