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자율신경 치료 후 달라진 변화(소통+말)
이 글은 저의 개인적인 치유 기록이자, 고통의 문턱에서 저를 끌어올려 주신 저의 주치의, 대구 행복한 H병원 김정훈 원장님의 귀한 조언을 함께 담은 기록입니다. 글의 하단에는 '통증'과 '집착'의 메커니즘에 대해 직접 남겨주신 글(캡처)을 덧붙였습니다. 도움 되시길 바라며 공유합니다.
'생존 모드'에서
'소통 모드' 로의 전환
2025년 3월, 치료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고 나서야 2023년부터 치료해 왔던 과거를 복기할 여유가 생겼다. 이만큼 좋아진 내 모습을 보며 흐뭇한 웃음 짓는다. 자뻑이라 해도 좋다. 그사이 나는 성격이 완전히 바뀌어 정말 다른 사람이 되었으니까.
그런데 나는 아주 '가성비 있게' 침묵하는 줄 알았다. 감정 소모도, 관계의 피로도도 줄고, 말실수로 후회할 일도 없으니 이 얼마나 효율적인 인생인가. 당시 내게 침묵은 훈장이었고 적은 말수는 신중함으로 포장하기 좋은 도구였다.
입을 닫는 것이 삶의 '미니멀리즘'인 줄로만 알았다.
내 몸이 살기 위해 쳐놓은 ‘입술의 바리케이드’였음을 그때는 미처 몰랐다.
1. 전두엽이라는 깐깐한 검열관
교감신경이 날뛰는 몸은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내게 속삭였다. “오늘도 전쟁이야, 정신 똑바로 차려.” 뇌는 상시 5분 대기조였고 근육은 언제든 튀어 나갈 수 있게 땅땅하게 수축되어 있었다. 이런 비상사태 속에서 한가하게 ‘수다’라니.
그 시절 누군가에게 말을 많이 한다는 건, 나라는 밑천을 드러내는 위험한 일이었다. 상대의 반응이라는 불확실한 주식에 내 전부를 거는 도박과도 같았다.
전두엽은 깐깐한 검열관이 되어 모든 말을 난도질했고 편도체는 시도 때도 없이 경보기를 울려댔다.
"이 말을 하면 이상하게 보겠지? 이건 너무 튀나?"
모든 말은 입 밖으로 나오기도 전에 자체 검열로 소멸했다. 밖으로 나가지 못한 생각들은 안에서 썩어 문드러졌고 ‘반추’라는 이름의 마음 식중독이 되어 나를 괴롭혔다.
2. SNS라는 안전한 방호벽
비대면 소통에 매달렸던 건 소통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사실 도망치고 싶어서였다. 텍스트는 안전했다. 거기엔 사람의 서늘한 눈빛도, 목소리의 떨림도, 즉각적인 역습도 없으니까.
주변의 응원은 고마웠지만, 그들이 나의 고통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기에 연결될수록 오히려 더 고립되는 기분이었다.
SNS는 내 불안을 잠시 흡수해 줄 '에어캡(뽁뽁이)'일 뿐, 나는 벙커 안으로 점점 더 깊이 잠겨가고 있었다. 어릴 적 겪었던 '말해봤자 소용없다'는 체념의 기억들.
몸이 약해지자 그 낡은 유령들이 다시 나를 점령했다. 몸은 뇌보다 눈치가 빨라서 늘 먼저 결론을 내렸다.
“말하지 마. 여기는 위험해.”
3. '신경의 배선도'를 읽어준 사람
그전까지 나는 의사 선생님들 앞에서 자주 작아지곤 했다. 설명이 길어지면 핀잔이 돌아왔고, 증상이 모호하면 의지의 문제라는 말이 뒤따랐다. 진료실 문을 열 때마다 마치 낙제점이 적힌 성적표를 받으러 가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원장님은 달랐다. 내 성격을 교정하려 들지 않았고 의지를 시험대에 올리지도 않았으며 꼬여버린 내 ‘신경의 배선도’를 먼저 펼쳐 드셨다.
과부하로 뒤엉킨 정교한 회로를 대하는 기술자처럼 “왜 이렇게 되었느냐”라고 다그치기보다 “어디에서 과전류가 흘렀을까”를 먼저 살피셨다. “더 버텨보세요”라고 하지 않고 “이 회로가 안심할 수 있게 합시다”라고 말씀하셨다. 그 태도는 나를 변명하지 않아도 되는 자리로 옮겨놓았다.
문제가 나라는 인격 전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잠시 혼선을 일으킨 신경의 언어에 있다는 설명은 생각보다 큰 위로가 되었다. 그날 이후 나를 고쳐야 할 ‘결함’이 아니라 조율이 필요한 ‘존재’로 바라보게 되었다.
모든 변화는 이 따뜻한 이해에서 시작되었다.
사랑은 무조건 기적을 만든다고 한다. 사랑이 있으면 불가능도 가능해지고, 절망도 희망으로 바뀐다고 믿는다. 그러나 내가 깨달은 사랑은 기적을 일으키는 마력이 아니라 기적이 오지 않는 순간에도 끝까지 자리를 지키는 힘이었다.
사랑이 병을 단번에 낫게 하거나 기울어진 상황을 한순간에 뒤집는 마법이 되지는 못할지도 모른다. 간절히 바라던 결과가 끝내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 아직 상처가 남아있고, 현실은 여전히 냉정하게 흘러갈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등을 돌리지 않는 것. 결과가 눈에 보이지 않아도, 희망이 희미해져도 곁에 머무는 것. 그것이 내가 알게 된 사랑의 본질이다.
누군가 사랑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그 사람이 좋아하는 것을 해주는 것보다 싫어하는 것을 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하지만 한 사람을 통해 또 다른 사랑의 모습을 배웠다. 사랑은 함께 머물며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마음이라는 것을.
기적은 상황을 바꿀 수 있지만, 사랑은 사람을 포기하지 않는다. 어쩌면 우리가 기대하는 사랑은 눈에 보이는 극적인 변화일지 모른다. 그러나 내가 알게 된 사랑은 손을 놓지 않는 일이었다. 무너지지 않도록 서로를 붙들어주는 힘. 이제 나는 그렇게 믿는다.
지나온 시간들을 되돌아본다. 기적 같은 완쾌를 약속하는 대신 “아쉽지 않게 치료해 주겠다”던 그 한마디. 끝까지 함께해 주겠다는 누군가의 존재는 삶을 버티게 하는 가장 큰 힘이 되었다.
원장님은 나를 잠시 과부하로 뜨거워진 엔진처럼 대하셨다. 지난주의 사소한 감정과 작은 통증까지 놓치지 않는 그 다정함은 나를 다른 병원에는 쉽게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 사람으로 만들어버리는 치명적인 부작용(?)을 남겼다. ^^
4. 안전해지니 터져 나온 ‘안전의 부산물’
치료가 진행되고 부교감신경이 기지개를 켜자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굳게 닫혔던 입술의 바리케이드가 스르르 풀린 것이다. 말이 지능이나 성격의 문제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세상이 더 이상 지뢰밭으로 보이지 않으니 비로소 사람의 얼굴이 보였다. 설명하고 싶고, 나누고 싶고, 함께 웃고 싶어졌다. 지금 내가 뱉는 말들은 대단한 용기의 산물이 아니다.
내 몸이 이제는 안전하다고, 그러니 마음껏 떠들어도 좋다고 내어준 ‘안전의 부산물’ 일뿐이다.
5. 당신은 너무 오래 버틴 것이다
사람들은 말한다. 논리로 설득하고 의지로 이를 악물면 어느 날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나도 그렇게 믿었다. 그런데 나는 설득으로 변한 게 아니었다. 자율신경이 “아, 이제 안 도망가도 되겠구나” 하고 안심했을 때 변했다. 아니, 주치의 선생님 말씀처럼 나는 새로운 사람이 된 게 아니라 "원래의 나"로 돌아온 것이다.
평생 고장 난 줄 알고 분해해 온 기계가 과열 상태였고 나는 불량품이 아니라 과부하 상태였다.
침묵과 강박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누군가에게 말해주고 싶다. 제발 자신을 다그치지 말라고. "왜 이것도 못 하냐"는 말, 이미 세상으로부터 충분히 듣지 않았나. 자신에게까지 그 화살을 쏘지는 말자. 말문은 억지로 연다고 열리는 문이 아니다.
몸이 안전하다고 느끼는 순간, 꽃샘추위를 뚫고 터지는 꽃눈처럼 팡팡 터져 나올 것이다.
그러니 당신은 틀린 게 아니다. 다만 너무 오래 버텼을 뿐이다.
오래 버틴 사람은 고쳐야 할 존재가 아니라 잠시 쉬어야 할 존재다.
1년 전, 병원 환우들의 단톡방에 질문을 드렸던 적이 있다. 여전히 잔재하는 불안 속에서 나의 변화가 단순한 우연인지 혹은 올바른 방향인지 궁금해졌다. 병원 카페에 나를 위한 장문의 답글을 공유해 주셨는데 글을 읽으며 묘한 감정들이 교차했다.
"내가 이런 대접을 받아도 되는 걸까" 싶은 미안함과 안도감, 그리고 깊은 경외감까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것이 진정한 돌봄의 형태인가, 아니면 그동안 내가 너무 메마른 곳에서 버텨온 것일까.'
지극정성이 나를 의존적으로 만들까 저어했는데 진정한 돌봄은 다시 일으켜 세우는 힘이 되었다. 누군가 끝까지 곁을 지켜준 경험을 해보니, 나도 타인의 곁에 서줄 수 있는 동행자가 되고 싶어졌다.
내가 가장 위로가 되었던 부분이다. 나무를 피하려 하면 나무에 부딪히고, 길을 보려 하면 길을 지나가게 된다.
우리 삶의 통증도 그렇다. 고통이라는 나무가 다 사라져야 길이 열리는 것이 아니라 길은 나무들 사이사이에 나 있었다.
고통을 없애줄게!!라는 말보다 당신 안의 길을 믿어보자!! 는 말이 더 깊은 위로가 되었다. 우리는 고통이 없는 세상을 걷는 게 아니라 고통 사이로 난 길을 발견하며 나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이미 그 길을 볼 줄 아는 사람이다.
감정은 통제 불가능한 영역이라 오해하곤 했다. 불쑥 치밀어 오르면 '미성숙'이라 여겼고 오래 머물면 '나약함이라' 이름 붙였다. 감정이란 모름지기 다스리고 눌러야 할 것, 혹은 없는 편이 나은 불청객이라 배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감정을 깊이 들여다보면 난폭한 돌발 변수가 아니다. 외부 세계를 향해 열린 내면이 상황을 해석하고 의미를 읽어낸 끝에 제출하는 가장 정교한 보고서 같다.
분노는 말한다.
당신의 경계가 침범당했습니다.
슬픔은 속삭인다.
소중한 것을 잃었으니 충분히 애도하십시오.
불안은 경고한다.
아직 안전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나는 아직 감정에 서툴고 어리석다. 그렇지만 감정에 대해 정말 많이 배울 수 있어 행복했다.
감정은 이분법적으로 재단할 대상이 아니라 나의 심리적 상태를 투영하는 고유한 정보다. 그 신호에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면 감정과 싸우게 되고, 정보는 왜곡된다.
판단을 잠시 내려놓고 "이 감정은 무엇을 말하려는가?"라고 묻는 순간, 감정은 '극복의 대상'이라는 무거운 짐을 벗는다.
억눌러야 할 적이 아니라 해석해야 할 언어가 되는 것이다.
그때부터 감정은 나를 휘두르는 주인이 아니라 나를 이해로 이끄는 친절한 동반자가 된다.
감정은 사라져야 할 적이 아니라 마땅히 읽혀야 할 나의 언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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