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름이 나를 구했다

2) 자율신경 치료 후 달라진 변화(강박)

by 미리나


2023년, 늦여름 그때의 내게 삶이란 공간을 점유하는 영유권 주장이 아니라, 시시각각 침범하는 ‘오염’과의 비루한 사투였다.


나를 이 모양 이 꼴로 만든 게 그날의 빌어먹을 사건이었는지, 아니면 태생부터 글러 먹은 예견된 붕괴였는지는 이제 와서 따져봤자 의미도 없고 입만 아프다.


수도꼭지를 비틀며 손등이 걸레처럼 헤지는 고통은 차라리 명료해서 다정하기까지 했다. 진짜 나를 환장하게 만든 건 내 살결에 닿은 무언가가 이식했을 이름 모를 '타자'의 존재감이었다.


무단 침입한 그 불길한 전율이 곰팡이처럼 번지며 나라는 인간을 성실하게 잠식해 들어갔다.




몇 달을 끌어오던 불안의 끝에서 나는 결국 집 앞 정신과로 달려갔다. 뭔가 큰 조치가 내려질 줄 알았다.


약이 확 늘어나거나 내 삶의 방향이 통째로 바뀌거나. 그런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그대로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자율신경 치료를 시작한 뒤로는 그 문을 다시 열지 않았다.




혼자만 전시 상황이었던 날들의 기록


코로나가 기승을 부릴 때도 이 정도로 유난스럽지는 않았는데 지구적 재난의 기세 뒤에 숨어, 광적인 위생 관념을 교묘히 정당화했다.


말이 좋아 청결이지, 그것은 명백한 강박의 소치였다. 시장에서 식재료든, 문 앞까지 도착한 택배 상자든 내 손에 포획된 이상 예외는 없었다.


알코올이라는 엄격한 세관을 통과하지 못한 물건은 냉장고라는 성소에 입성할 자격이 박탈되었다.




하루에도 열 번씩 자행되는 핸드폰 소독. 액정 위의 지문보다 미시적인 세균이 창궐하는 것이 더 무서웠던 날들. 멀쩡한 키보드 덮개를 두고도 굳이 자판 알을 하나씩 빼서 소독액으로 목욕을 시켜야만 안도했다.




그때의 나는 세상 모든 먼지가 나를 노리는 저격수라고 확신했다. 공기 중에는 보이지 않는 불순한 기운이 부유하고, 문손잡이마다 찜찜한 음모가 도포되어 있는 것만 같았다.


나의 뇌는 친절하고 잔인하게도 24시간 내내 재난 주관 방송을 송출했다.


"위험. 위험. 위험.”


머릿속 채널은 브레이킹 뉴스 전문 방송처럼 단 한 번도 평온한 정규 방송으로 복귀하지 않았다. 뉴스 스위치는 ‘위험’에 고착되었고, 리모컨은 행방불명됐으며, 배터리는 언제 폭발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과충전 된 광기를 띠고 있었다. 몸은 늘 한껏 당겨진 고무줄 같아서, 누가 툭 건드리기만 하면 사방팔방으로 튕겨 나갈 태세였다.


비극은, 아무도 나를 건드리지 않았다는 점이다.




혼자 고무줄을 당겨놓고, 혼자 팽팽해져서, 혼자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나의 불안은 고효율적인 에너지라 외부의 동력이 없어도 자기가 알아서 땔감 삼아 활활 타올랐다.


다른 사람들은 적당히 이완된 채 흐물흐물 잘만 흘러가 보이는데 "나만" 홀로 해제되지 않는 1인용 전시 상황 속에 고립되어 있던 것이다.


세상은 저출산을 걱정하고 있었지만, 내 방구석은 먼지의 과잉 번식과 미시적인 세균의 창궐을 걱정하느라 잠 못 이루었다.


나의 평화는 그렇게 스스로가 선포한 계엄령 아래 자가 격리당하며 말라가고 있었다.




어깨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24시간 경계 근무 중이었다. 국가가 부여한 국방의 의무는 끝났지만, 몸은 여전히 정체 모를 ‘불행’이라는 적을 막기 위해 철책을 세우고 있었다.


사실 나는 결벽증 환자가 아니라 그냥 겁이 많은 사람이었다. 먼지를 닦아내는 건 청결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먼지 더미 뒤에 숨어 있을지도 모를 ‘혹시’가 무서웠을 뿐이다.




세상을 거부하고 싶었던 것도 아니다. 다만 기대했다가 무너질 실망을 피하고 싶었다. 오지도 않은 상처를 예방 접종하듯 미리 막으며 살았다.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보호 중입니다.”


“아직 아무 일도 안 일어났잖아요.”
“일어날지도 모르니까요.”




남들은 확률이 0%에 수렴한다고 말할 때, 나는 0.1%의 구멍으로 들이닥칠 재앙을 상상하며 참호를 팠다. 그 가능성만으로도 내 삶은 제3차 세계대전이었고 종전 선언 없는 전장의 유일한 패잔병이었다.


혹시 아플까 봐. 혹시 나만 혼자 남겨질까 봐. 혹시 공들여 쌓은 내 평범한 하루가 실수로 박살 날까 봐.


일어나지도 않은 미래와 싸우느라 오늘을 사는 법을 잊어버린 불안이라는 거대한 제국에 포로로 잡혀 살고 있었다.




늘 대비 태세였다고 고백하는 게 맞겠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고성능 안테나를 달고 나왔고, 우주의 신호뿐 아니라 이웃집 재채기까지 증폭해 온 것이다.


요즘은 고무줄을 살짝 내려놓는다. 완전히 풀지는 못해도 끊어질 정도로 당기지는 않는다.


오늘은 내 안의 과잉 경호원에게 가만히 말해본다.


“고생 많았어요. 이제 근무 교대합시다. 당신도 이제 좀 쉬세요.”




자율신경 치료 후, '유난'이라는 지옥에서 탈출한 후기


터질 듯 팽팽하던 신경의 줄이 툭, 끊어졌다. 자율신경 치료라는 게 이토록 허무한 것이었나. 그렇게 나를 쥐 잡듯 잡던 강박이 빠져나간 자리에 남은 건 고상한 평화가 아닌 뜻밖의 '게으름'이었다.


"사람이 이렇게까지 망가... 아니, 바뀔 수 있을까?"


어제까지는 알코올 소독제 없이는 안심하지 못하던 유난스러운 '청결 광인'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대충 던져둔 옷더미 사이에서도 묘한 안락함을 느낀다니.


지문이 덕지덕지 묻은 핸드폰을 만지면서도 "뭐, 죽기야 하겠어?"라며 태연히 넘긴다.


그토록 신성시했던 '위생'이라는 굴레를 비웃듯 던져버리고 나니, 이제야 좀 사람 사는 냄새가 난다.




사실 우리는 '철저함'이라는 멋진 말로 스스로를 고문하며 산다. 이걸 해야 인간다운 것 같고 안 하면 큰일 나는 줄 안다.


부러지지 않으려 버티는 것보다 적당히 휘어지는 것이 더 강인한 삶이다. 나를 방치하는 시간은 나를 가장 귀하게 대접하는 안식의 의식이 된다.


직장을 쉬며 도태될까 전전긍긍했지만 세상은 나의 부재가 무색할 만큼 무심하고도 눈부시게 제 축을 돌리고 있었다.




그리고 좀 게을러지면 어떤가. 빳빳하게 날이 서서 피 말리던 '완벽주의자' 시절보다 적당히 흐트러져서 침대에 누워있는 지금의 내가 훨씬 더 인간다운데.


신경줄을 갉아먹으며 지키고 있는 그 '철칙'들은 안 지켜도 아무 일 안 일어난다. 오히려 그 줄을 좀 놔버려야 숨이 좀 더 잘 쉬어진다.




누군가는 내게 깔끔한 성격이라며 덕담을 건넸지만 생존을 위한 비명이었다. 도를 지나친 모든 집착과 강박은 이름표만 바꾼 ‘정신적 골절’이다.


뼈가 어긋난 줄도 모른 채, 나는 그것을 제자리라 우기며 손을 씻어댔다. 사실 보이지도 않는 공포를 몰아내려는 나만의 엑소시즘이었다.


"손을 많이 씻지 않으면, 샤워를 충분히 하지 않으면, 핸드폰 액정에 지문이 남으면 네 일상은 오염될 거야."


이 말도 안 되는 경고에 매번 굴복했다.


그래도 무언가를 완벽하게 통제하고 있다는 착각, 그 알코올 향 짙은 냄새가 나를 잠시 숨 쉬게 했던 건 사실이다.



자율신경 치료는
‘전쟁 통제실’을 폐쇄해 버렸다.



처음에는 고치고 싶지 않았던 게 아니다. 고칠 수 없었다. 뇌는 ‘불안’이라는 고고도 미사일을 요격하기 위해 24시간 레이더를 돌리는 전시 체제였다.


스스로를 '정신병'이라 하면서도 멈추지 못했던 이유는 단순했다. 멈추는 순간, 거대한 불안의 파도가 아무 방어도 없이 나를 덮칠 것 같았다.




신경의 전원이 내려가자 나를 몰아세우던 불안의 음성이 희미해졌다. 강박이라는 엔진도 더는 굉음을 내지 않았다. 그렇게 팽팽히 달궈져 있던 예민함이 식으니 장엄할 만큼 느긋한 게으름이 찾아왔다.


이제 세상이 안전하다는 전제 위에서 허락된 무해한 이완이었다.



불안과 강박은 끈적끈적한 점성과 닮았다. 생각이 머릿속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고 계속 나를 괴롭힌다. 청결에 매달렸던 것도 끈적한 불안에서 도망칠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불안과 강박은 끈적한 점성과 닮았다. 한 번 달라붙은 생각은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내가 청결에 매달린 이유도 어쩌면 그것이었다. 끈적한 불안에서 잠시라도 나오고 싶어서.




나는 이런 재질이 아니었다고, 끝까지 믿고 싶었다. 내가 물건이라면 마치 새것이 된 기분이었다. 낡아 닳아버렸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포장을 벗긴 새 물건처럼 반짝이는 느낌.


너무 놀라, 원장님께 감사하다고 하고 싶어진다. 그러면 지난번처럼, 조금도 놀라지 않은 얼굴로 말씀하시겠지.


“미리나님이 원래 가지고 있던 성분이 드러난 거예요.”

무언가 새로 생긴 게 아니라 잃어버렸다고 착각했던 나를 되찾았다는 뜻이었다.




치료 전에 나는 건조하고 딱딱한 고목나무 같았다면, 지금은 물기를 머금은 유연한 버드나무 같다.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팽팽하던 거문고 줄이, 어느새 삶은 소면처럼 힘을 풀은 것이다.


핸드폰은 지문이 묻은 채로 아무 데나 놓여 있고, 키보드 덮개 아래 먼지는 자기들끼리 반상회를 열든 말든 상관없다. 알코올 향으로 가득했던 코끝에는 이제 사람 사는 냄새, 적당히 눅눅한 생활의 기운이 감돈다.




결벽이 빠져나간 자리에는 나를 조금쯤 방치해도 괜찮다는 용기가 돋아났다. 이 무력과 게으름은, 쉼 없이 닦아내느라 지쳐 있던 영혼이 길게 내쉬는 숨인지도 모른다.


나는 이제 필요할 때만 손을 씻고, 대충 털어낸 먼지 위에 앉아 사과를 사각사각 씹고 귤을 깐다. 이 비루하면서도 위대한 평온을 사랑한다.




진정한 치유는 내 삶에서 위협이 존재할지라도 기꺼이 등을 보이며 잠들 수 있는 배짱을 회복하는 일이었다. 흉터 하나 없는 매끄러운 영혼보다 아름다운 건, 수많은 자국을 몸에 새기고도 '이게 나야'라고 말하며 웃을 수 있는 넉넉한 흉터들의 연대였다.




김정훈 원장님의 말씀들은 내게 퓨즈가 타버린 세상에 다시 전기를 들어오게 한 결정적인 회생의 불꽃이었다.


원장님은 나를 기계처럼 완벽하게 수리해 놓으신 건 아니다. 사실 그런 신의 영역 같은 치료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를 안도시켰고, 다시 웃게 만드셨다.


치료 과정 속에서 나는 굳어있던 표정을 풀고 진심으로 행복해졌다.


남들이 보기엔 조금 느슨해 보일지 몰라도, 나를 다시 행복하게 해 주셨으니 내게는 이것이 가장 완벽한 치료다.


나는 이제 더 이상 무거운 무장을 하지 않고도 충분히 잘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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