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증이라는 가짜 뉴스에 속지 않는 법
이 기록은 의학적 기준이 아닌, 경험과 지식이 부족한 한 개인이 겪은 감정의 언어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러니 옳고 그름의 잣대보다는 치유의 길을 배워가는 한 사람의 목소리로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수동 패치 매뉴얼
비슷한 통증의 굴레에서 고통받는 동지들에게 나의 서툰 경험을 나누고자 한다. 우선 이것부터 말하고 싶다.
통증은 우리 몸이 내린 돌이킬 수 없는 '확정 판결'이 결코 아니올시다.
그것은 어쩌면 뇌가 지레 겁먹고 촐싹맞게 요란을 피우던, 조금 철없는 경고였다는 걸 나는 한참 뒤에야 알게 되었다.
왜 '후회'와 '앎'은 늘 이토록 뒤늦게 당도하는 것일까. 후회란 과거의 나에게 부치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애달픈 답장임이 분명하다. 또한 앎이란 소를 잃고 나서야 뒤늦게 고쳐 짓는 '마음의 외양간'과도 같다고 본다.
지금의 지혜를 잣대 삼아 그때의 무지를 심판하는 일만큼 부질없고 서글픈 일이 또 있을까.
그러나 외양간을 고치는 마음이 비단 허망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늦게나마 도착한 이 답장이 오늘을 버텨내는 우리에게는 분명 새로운 길을 열어주는 이정표가 될 것이라 믿는다.
글에서 자주 언급했던, 한때 나의 심장은 ‘맵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할 만큼 아려왔다. 타오르는 듯한 흉통은 안에서부터 번졌고 명치는 밧줄로 옥죄는 것 같고 장기가 오그라드는 듯한 통증에 숨 쉬는 일이 버거웠다. 그럴 때면 머릿속을 떠돌던 어설픈 의학 상식들이 불길한 예언처럼 번뜩이곤 했다.
내 멋대로 작성한 자가 진단서에 ‘심근경색’이라는 네 글자를 서둘러 휘갈겨 쓰고는 곧장 심장내과로 직행했다. (나의 뇌는 이미 종말이라도 맞이한 듯 비장하게 브리핑을 마친 상태였다. ㅠㅠ)
아파 죽을 것 같은데
정상이라고요?
의사 선생님께 운명을 맞이할 순교자 같은 표정으로 증상을 쏟아냈다. 단번에 심장초음파를 찍어달라고 했지만 우선 심전도와 혈액검사를 하고 흉부 X-ray를 찍고 의심 소견이 있을 때만 초음파를 진행한다는 것을 설명해주셨다. 폐에 물이 찼는지,기흉은 아닌지, 특정 동맥의 문제인지...
열거되는 의학 용어들에 두려움은 배가 되었지만 결과지는 무심할 정도로 말끔했다.
“정상”
멀쩡하다니 참 다행인가 싶다가도, 명치에 얹힌 돌덩이는 사라질 기미가 없었다.
과잉보호 모드에 한 뇌가 비상 상황을 '풀 옵션'으로 그것도 오바 육바로 섞어 출력해 버린 셈이다.
나는 똑똑한 척하는 나에게 넌지시 핀잔을 줬다. "미리나, 진정해. 인생 종말로 해석하는 몹쓸 상상력 좀 넣어둬."
뇌의 오보에 속아 마음까지 무너져 내렸던 허망함을 당신들은 겪지 않았으면 좋겠다. 우리 뇌는 생각보다 겁이 많고 호들갑을 떠는 '삼류 소설가'일 때가 많으니까.
그럴 땐 통증이라는 텍스트에 집착하지 말고 엔진 과열된 뇌에 냉각수나 좀 부어주시라. 휴식이라는 연료, 당분이라는 달콤한 뇌물, 이완이라는 느긋한 여유 말이다.
이렇게 한다고 당장 낫는다는 말은 아니다. (그랬으면 내가 지금 이러고 있겠나.) 다만, 적어도 뇌의 장단에 맞춰 같이 춤추다 쓰러지는 일은 막아야 하지 않겠는가.
뇌의 공포 소설에 속지 않기
뇌가 벌이는 '창작 활동'을 감시해야 한다. 지금 내 뇌가 쓰고 있는 시나리오가 '다큐멘터리'인지, 아니면 말도 안 되는 '심령 공포 소설'인지 구별하는 연습이 필요하다. 자율신경은 버튼만 누르면 고쳐지는 최신형 기계가 아니었다.
매일 수동으로 마음의 태엽을 감는 일, 이제 그 번거로움을 기꺼이 껴안기로 했다.
참 의미 있는 일이 되었고 내 마음은 정복해야 할 거친 대상이 아니라 귀 기울여야 할 여린 생명체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불안을 걷어낼 수 없다면 길을 잃지 않고 걷는 법을 배우면 그만이다.
완벽하지 않은 나를 매만지는 반복적인 다정함이 나를 살렸고 가장 단단한 신뢰가 되었다.
완벽하게 스무스한 자동 복구란 없다.
나를 매일 정성껏 돌보는 수고로움만이 있을 뿐이다.
자율신경 실조증은 몸의 조절 장치가 날뛴다. 교감 선생님 신경은 있지도 않은 사자를 잡겠다며 24시간 풀가동 중인데 이완을 담당해야 할 부교감 선생님 신경은 파업하고 퇴근해 버린다.
의사 선생님들은 이걸 두고 신경전달물질의 불균형이다, 항상성의 붕괴다 등등 설명하겠지만 당사자에게는 훨씬 더 크게 다가온다. ㅠㅠ
나 역시 초기 치료 때는 주치의 선생님께 “지금 당장 죽을 것 같다”는 SOS 신호를 사방팔방으로 쏘아 올리는 가련한 조난자였다. 내가 쫓기듯 외치던 그 사자는 애초에 실재하지 않았다.
무단결근한 부교감신경을 달래 복귀시키는 일은 치료가 어느 정도 진행된 뒤에야 알게 된 사실이다.
다시 말하지만 자율신경은 '의지만으로' 길들여지지 않는다.
우울과 불안은 번져가는 곰팡이 같은 것이다.
뇌가 '통증'이라는 가짜 뉴스를 연일 속보로 내보내는데 마음인들 버틸 재간이 있겠는가. 이토록 정교하게 고통을 창조해 내는 걸 보면, 인간의 생존 본능이 얼마나 대단한지 새삼 실감하게 된다.
뇌는 나를 너무나 살리고 싶어서 확성기를 붙들고 고래고래 외치는 중이다. 방식이 좀 무식하지만, 온몸이 두들겨 맞은 듯 아프고 혹시나 마음이 주저앉더라도 스스로를 ‘환자’라는 좁은 액자에 가두지 말기를 바란다.
당신은 감도가 지나치게 높아진 안테나를 단 사람일지도 모른다. 성능이 너무 좋아 잡음까지 다 잡아내는, 조금 과하게 충성스러운 장비를 달고 있을 뿐.
완치는 통증 점수가 0이 되는 일이 아니다.
그건 교과서가 좋아하는 결말이고 내 몸은 아직 그 챕터에 관심이 없다. 나는 이걸 회복이라고 부르기로 마음을 먹었다. 뇌가 또다시 비극 소설을 집필하기 시작할 때 첫 문장을 읽자마자 이렇게 말한다.
“이 설정. 지난 시즌에 봤어요. 작가님 오늘은 연재 쉬세요.”
통증이 있더라도 예전처럼 대본을 받아 적지는 않는다. 뇌는 사소한 감각에도 의미를 부여하고 불안을 클리프행어로 남기는 재주가 있다. 그런데 독자가 늘 성실할 필요는 없다.
오늘도 뇌의 가스라이팅에
시달리는 동료들이여!!
부디 그 소설에 ‘좋아요’를 누르지 말길 바란다. 알고리즘은 반응할수록 더 가져온다. 당신의 몸은 지금도 열심히 일하고 있다. 당신이 눈치채지 못한 마음의 과적을 들고 과로 수당도 없이.
통증에 배신감을 자주 느끼는 나지만 그것은 항의서였다. 말로는 도저히 처리되지 않은 감정이 어쩔 수 없이 물리적인 방식으로 제출한 민원 같은 것.
신체화 장애라는 네임은 꽤나 점잖고 학술적이지만 실상은 단순하면서도 얄밉다. 감정을 감정으로 소화하지 못한 체증이 '통증'이라는 엉뚱한 결과물로 출력되기 때문이다. 분노는 위경련으로, 불안은 심계항진으로, 슬픔은 정체불명의 통증으로 말이다.
내가 휴대폰 벨소리나 사소한 노크 소리에도 대포가 터진 듯 소스라쳤던 이유는 몸이 1년 365일 5분 대기조 상태이기 때문일 것이다.
요즘 나는 이 사람 저 사람 말을 믿지 않는다. 생각을 논리로 설득하려는 시도보다 몸을 먼저 구슬리는 게 의외로 잘 먹힌다. 뇌에게 구구절절 말하기보다 몸으로 직접 '공지'를 때리는 거다.
“지금 재난 상황 아님. 특보 해제. 상황 종료.”
'완치'라는 화려한 엔딩은 오지 않을 수도, 어쩌면 평생 안 올지도 모른다. 대신 나는 예전보다 훨씬 덜 속고, 조금은 덜 심각해졌다.
뇌가 써 내려가는 비극의 초고를 읽다가 중간쯤에서 하품하며 책장을 덮을 수 있게 된 것. 그 정도면 꽤 근사한 진보 아닌가.
오늘도 뇌가 세상 끝날 것처럼 호들갑을 떨면 한마디 던져줄 거다.
“어, 알겠고. 그건 내일 업무시간에 다시 얘기하자.”
이 시니컬한 대처가 내가 7전 8기 끝에 얻어낸, 가장 현실적이고도 위대한 회복이다.
치료를 받을수록
증상이 악화되는 것 같을 때도 있었다
이 또한 치료 초반의 이야기다. 주사 바늘이 들어갈 때마다 잠자던 사자의 코털이라도 건드린 듯 억눌려 있던 통증들이 줄줄이 소환되었다.
치료 중기부터는 주사만 맞으면 신기하게도 이완이 되어 잠이 쏟아지곤 했다.
주사를 맞은 자리에서 그대로 잠들어 버리고 자고 일어나 집에 간 적도 허다했다. 이제는 의사 선생님도, 간호사 선생님도 “자고 가세요.”라고 말할 정도였다. ^^;;
원장님께 염증을 건드려서 아픈 느낌이라고 하자, 쉽게 말해 잠재된 것을 활성화하는 것이라며 그 외 여러 가지 설명을 덧붙여주셨다.
여하튼 나는 주사를 맞을 때마다 수면 아래 숨어 있던 긴장과 통증들이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를 넘어 거칠게 표출되었다. 마치 조용한 동네에 시작된 대대적인 ‘재건축 소음’ 같았달까.
그것은 자율신경이 제자리를 찾기 위한 일종의 '재조정' 과정이었던 것이다.
증상을 억지로 누르는 임시방편은 내가 진정 바라던 치유가 아니었다.
과거의 시행착오 때문이라도, 나는 문제의 뿌리를 다스리는 근본적인 치료에 더 마음이 갔다. 나중에는 주사를 더 놓아달라고 조르고 싶을 만큼 치료를 사랑(?)하게 되었다. 글을 쓰는 지금도 그 자극이 그리울 정도니.
내가 이렇게 사랑❤️하는 게 많은 사람이었나 싶다.
이 짜릿한 회복의 기분을 함께 나눌 사람이 없다는 게 못내 아쉽고 외롭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병원에 달려가 대기실 환자분들의 손을 맞잡고 시원한 치유의 과정을 공유하고 싶은 심정이다.
나 또한, 누군가의 또 다른 기적 같은 이야기를 듣고 싶어지는 그런 날.
내게 이 치료는 깊은 곳에 숨어 있던 몸과 마음의 정서적 찌꺼기들을 탈탈 털어낸 뒤 나와 화해하는 과정이었다.
아픔을 덮어버리는 줄로만 알았던 치료는 뜻밖에도 나를 제대로 아프게 했다.
그렇게 나는 비워진 자리만큼 가벼워졌다.
그리고 그 끝에서 비로소 나로 돌아왔다.
아픔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지나가 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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