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몸과 마음의 고통에서 치유까지의 여정

by 미리나


★이 글은 '만성통증'과 '자율신경 실조증'을 겪은 개인적인 경험과 증상, 그로 인한 생각을 바탕으로 작성된 내용입니다.

겪고 있는 모든 분들이 동일한 경험을 하는 것은 아님을 말씀드립니다.



내가 겪은 마음의 고통

몸의 고통은 시간이 지나거나 치료를 받으면 나아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마음의 고통은 보이지 않아 어디서부터 치유해야할지 모를 때가 많았다.

몸이 아플 때는 통증이 명확하고 괴롭히는 원인이 분명했다.


하지만 마음의 고통은 이유를 알면서도 벗어나지 못하거나 이유조차 알지 못한 채

무너졌다.


몸의 상처는 시간이 지나면서 아물지만 마음의 상처는 시간이 지나도 저절로 치유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마음의 고통을 마주하는 것이 더 어려웠다.


보이지 않는 상처를 다루는 일은 생각보다 너무나도 느리고 복잡했다.

내 마음속에서 흘러가는 고통이 얼마나 무겁고 깊은지 외부로 전혀 전달되지 않았다.


내 안에서 일어나는 아픔은 나만의 싸움이었고 그 싸움을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었기에 더 강하게 압박을 가했던 것 같다.





나아지기 위해 싸우고, 넘어지고, 다시 일어서는 과정 속에서 배운 건 몸과 마음 둘 다 아프다는 건 나에게 있어 똑같은 의미였다.

그 중에서 마음의 고통은 더 가혹하고 힘겹게 다가왔지만.


감정은 생각보다 훨씬 더 깊고 전면적으로 내 삶을 흔들었다.

나는 치료를 받으며, 내가 배운 것들과 함께 심리학 서적과 인문 서적을 탐독했다.


그 안에서 깨달은 것들이 비수처럼 내 안에 꽂히며 나를 또다시 흔들어놓았고

나는 나 자신을 잡으려 발버둥 쳤다.


매 순간 치열했다. 갈등은 마치 전쟁처럼 나를 압박했다.

나의 감정은 내가 생각한 것보다 더 강하고, 더 위험했다.


가끔 숨이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도 포기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이 고통이 끝나지 않으면 내가 그 어떤 존재로서 다시 일어설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매일이 전투였다.

매 순간이 긴장감으로 가득 찼다.


한 걸음씩 나아가며, 나는 싸워야 했다.

내 안의 상처와 그것을 넘어서야만 하는 절박한 마음으로.





감정은 나를 무너지게 하고 또다시 무너트리게 만들었다.

그래서 그 고통을 '마음의 암'이라 생각했다.

마음의 고통은 형태가 없어서 다루기 정말 어려웠다.


몸의 통증은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 명확하고 약물이나 치료로 경감할 방법이 있는데 마음의 고통은 눈에 보이지 않고 모호해서 무엇이 문제인지조차 파악하기 어려워 더 큰 무력감을 주었다.


불안은 또 왜 이렇게 끝없이 확대되는지, 몸이 아프면 언제 나을까?

이런 생각이지만 마음의 고통과 불안은 계속 꼬리를 물며 커졌다.


앞으로 위대한 공포와 상상이 더해지며 현실보다 더 무겁게 느껴지기도 했다.

불안은 멈추지 않는 파도처럼 그렇게 나의 마음을 잠식해버렸다.

그 기분은 진짜 THE LOVE !!





감정의 진동


정신이 지배당하면 현실까지 왜곡시켜버려서 멀쩡한 현실도 부정적으로 만들어버린다.

똑같은 상황도 위협이나 실패처럼 보이게 만들고 무기력과 회피로 이어지며 몸이 멀쩡해도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막막했다.


아픔을 참지 않고 감정적으로 내뱉었지만 정작 웃을 때마다 내가 감정을 조절할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왜 이렇게 흔들리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억울함과 혼란이 뒤섞인 채 어디에도 붙잡을 곳이 없었다.

토해내고 싶은 감정이 가득했지만 그걸 꺼내 보일 수 없다는 사실이 나를 더 옥죄었다.


외롭다는 감정조차 삼켜야 하는 그 순간이 가장 힘들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정말 가까운 사람들 앞에서는 그런 감정을 드러내는 게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물론, 누구나 감정을 쏟아내는 건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말하지 않아도 알아채고 묵묵히 받아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런 사람들 앞에서는 억지로 숨길 필요도 애써 견딜 필요도 없었다.

나에게 편안한 사람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들과 그런 순간을 나눌 수 있다는 것.

그게 생각보다 더 절실한 일이었다.





아무리 힘을 내도 여전히


마음의 고통은 나의 가슴을 짓누르는 것만이 아니라 일상의 모든 감각을 무디게 했다.


내가 겪었던 가장 극심한 몸의 고통조차도 쉬면 가라앉았고, 시간이 걸려도 치료하면 나아졌는데 마음의 고통은 달라도 너무나 달랐다.


어디가 아픈지조차 선명하지 않았다.

손으로 짚을 수도, 약을 발라 덜어낼 수도 없었다.


숨을 쉬어도 가라앉지 않고 시간이 흘러도 사라지지 않았다.

가장 깊숙한 곳까지 파고들어 나 자신을 낯설게 만들었다.


몸이 아프면 통증 자체로 힘들지만 마음이 무너질 때는 그 고통이 삶 전체를 집어삼켰고 몸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반응했다.

심장은 뛰고 속은 뒤틀렸으며 온몸의 근육이 굳어가고 신경은 날카롭게 곤두섰다.


"그냥 힘내!"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


이런 말들 속에서 공감받지 못한 채 벽에 곤두박질 치는 것 같았다.

그러다 보면 점점 혼자가 된다.


고립감이 밀려오고 단절감이 깊어져 그 끝에는 당장 누구에게도 기댈 곳이 없어 절망만 남는다.





자율신경계의 완전한 붕괴, 혼란의 대잔치였다.

몸과 마음이 동시에 무너질 땐 도망칠 구석 따위는 없다.

어디로 가도 무엇을 해도 그 고통은 나를 따라왔다.



내가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믿었다가, 혼돈이었다가


나는 본래 누구에게 깊이 의지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러나 감정을 나누는 법을 알게 된 것은 아마도 그 의사 선생님 덕분일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분을 만났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버틸 수 있었고

그분이 건넨 한마디 한마디가 삶의 버팀목이 되었다.


때로는 말보다도, 그저 거기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위로가 되었다.

그렇게 나는, 스스로를 부여잡고 한 걸음씩 나아갈 수 있었다.


따뜻한 한마디, 공감 어린 시선, 그리고 내 아픔을 가벼이 여기지 않는 태도가 나를 살게 해 주었다.


누군가에게 전적으로 기대지는 않더라도 그런 존재가 있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그때 알게 되었다.


나를 있는 그대로 이해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무너질 것 같았던 순간들을 견딜 수 있었다.


어느 날, 발열 및 통증으로 너무 힘들어 감정이 뒤죽박죽일 때 원장님께서 오늘은

"주사치료를 안 해도 되겠어요"라는 말씀에 갑자기 울컥했다.

어제도 치료를 받았고 주사 후 발열은 바로 좋아졌지만 오늘도 맞고 싶다는 속마음이 새어 나오기도 했다.


일시적인 통증 경감에 내가 너무 의존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사실 그게 중독처럼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들면 한발 물러서서 내 감정을 정리했다.

원장님께서도 내 감정을 깊이 이해해 주셨기에 나 역시 점점 더 솔직해질 수 있었다.


처음에는 내 증상을 전부 말하지 못한 내가 바보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원장님은 마음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감정의 핵심을 정확히 짚어내셨다.


감정의 포인트를 건드리는 그 한마디에 다시 한번 울컥했다.

내 마음을 누구보다 깊이 이해하고 계신다는 사실이 안도감을 주었다.

정신과에 대한 생각조차 희미해질 만큼.


내 앞에 무슨 일이 또 일어날지 모른 채.





불길한 예감은 틀린 적이 없었다고 하던가.

어느 날 진료실 의자에 앉자마자 입술이 바짝 말라갔다.


무슨 일이 있냐며 오늘 많이 힘드냐는 의사의

말에 머릿속이 복잡했지만 더 이상 감출 수 없어 겨우 입을 뗐다.


"원장님, 저… 저기… 정신과에 가고 싶어요.

약을 먹고 싶어요.


의뢰서 적어주시면 안 될까요?"

이 말을 또 하게 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그렇게 속마음을 털어놓자 한참 나를 바라보시더니,

"많이 힘드세요? 여기서 쓸 수 있는 약을 처방해 드릴까요?"


속으로 "그래, 먹자. 나 지금 열도 나고 너무 힘들어. 내 감정에 충실하자." 생각했다.

"네..."


하지만 이어지는 질문이 나를 또 얼어붙게 했다.

"그런데... 왜 드시고 싶으세요?"


약 5초 동안 머리가 멍해졌다.

‘이유라니.’


나의 힘듦을 어떻게 설명할지 몰라서 입안에서만 맴도는 답답함이 밀려왔다.

발열도 있고 온몸이 아프고, 오늘만큼은 잠을 편히 자고 싶다고 대충 둘러댔던 것 같다.


가만히 듣고 계시다가

"○○약을 먹으면 이렇게 저렇게 (기억이 안 나므로 생략)… 일단 3일만 드셔보실래요?"


그러고는 눈을 마주치며 약간은 차분하면서도 단호하게 덧붙이셨다.

"대신, 계속 먹지 마시고 졸린 약이니까 정말 힘들 때만 드세요."


그 마지막 한마디가 강하게 박혔다.

‘정말 힘들 때만.’


그 조건들은 너무 많은 것처럼 들렸고 괜찮으니 먹지 말라는 의미로 들렸다.

(먹지 않았고 다음 날 괜찮아졌다ㅠㅠ)에휴





지금 내가 겪고 있는 고통과 혼란을 약을 먹든 맨정신으로 버티든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목소리가 필요했던 것 같다.


스스로를 제대로 알지 못한 채 누군가가 정확하게 내 상태를 알면 좋겠다는 무모한 나의 생각.


그렇지만 치료를 받으면 받을 수록 나의 한계의 부딪히면서도 인내심을 길러갔고 내 몸이 가진 놀라운 회복력을 자주 경험했다.


내 자신을 이해하고 스스로 이겨낼 수 있는 힘을 키워가며 나는 진정한 치료의 의미를

알게 된 것이다.


원장님은 나의 의견을 존중하면서도 생각하게 만들고 나를 성장시킬 수 있는 그런 방법으로 이끌어주셨고 나는 정말 많이 배웠다.


그 분이 나에게 보여준 모습은 내가 만났던 어른들 중에서 가장 훌륭한 어른이었다.

늘 배우고 성장하시며 나에게도 큰 영향을 주셨으니 말이다.


나는 이제 당장 회복이 안 느껴진다고 해서 더 이상 주사를 많이 맞고 싶다든지, 혹은 또다시 아픔이 나를 찾아올까 하는 걱정은 서서히 사라졌다.


불안과 두려움은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흘러간 물처럼 지금은 내 마음에 자리 잡은 평온함에 자리를 내어주었다.


그간 겪었던 모든 고통은 나를 더 성장시켰고 이제 나는 그 어떤 고통도 예전만큼 두렵지 않게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가고 있었다.





몸은 나아가지만 마음은 여전히 길을 찾는 중

(급한 마음과 느린 회복의 시간)


감정의 회복은 끝이 보이지 않는 긴 터널 같았다.

몸의 상처는 치료 경과를 확인하며 나아지고 있다는 증거를 눈으로 볼 수 있지만, 마음의 상처는 그렇지 않았다.


재활과 치료는 계획을 세우고 한 걸음씩 단계를 밟아가면 되지만 감정의 회복은 그렇게 명확하지 않았다.


언제쯤 괜찮아질지, 어디까지 와 있는지 가늠할 수 없는 적이 많았다.

돌아보면 보이지 않던 회복도 알아서 척척 진행되고 있었다.


내가 내 몸에 신뢰를 못하다니 쯧쯧...





어디까지 버텨야 하는지 지금 가고 있는 길이 맞는지조차 알 수 없고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길을 잃은 채 헤매는 절망처럼 보이는

그 길이 아무리 더디고 막막해 보여도 나는 나아가고 있었다.


그 막막함이 몸의 고통보다 더 잔인했지만 아무튼 해냈다.

내가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직시하며

그렇게 조금씩, 아주 천천히, 나를 돌보는 법을 배우고 있었다.


자율신경실조증과 만성통증은 감정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스트레스, 불안, 그리고 작은 감정의 미세 흔들림조차도 증상을 악화시키거나 완화시키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내가 아닌 모두의 회복을 꿈꾸며, 동화 속 주인공은 나야 나


치료를 받으며 알게 된 것은, 감정의 요동은 다 다를지라도 이 증상이 비단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누구나 크고 작게 자율신경의 균형이 무너지는 경험을 하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통의 크기는 다르겠지만 이 증상을 알고 나니 주변의 많은 사람이 비슷한 불편함을 겪고 있다는 게 눈에 보였다.


그리고 치료 효과가 점점 느껴지면서 나처럼 힘들었던 사람들도 결국은 나아질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 생겼다.


모든 사람이 이렇게 회복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 막연한 상상에 빠져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그 상상 속에서 나는 동네 붕어빵 사장님, 길을 걷던 사람들까지 한 명 한 명 손을 잡고 병원으로 데려가고 싶었다.


"이렇게 좋아지셨네요!" 하며 덩달아 기뻐해 주는 몇몇 선생님들께도 말했다.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이 입에서는 생각과는 다른 말이 나오고 있었다.


진짜 하고 싶었던 말은 ‘정말 감사합니다’였는데, 감정이 북받쳐 제대로 표현할 자신이 없어서 장난스러운 농담으로 바꿔버렸다.


내가 겪은 변화와 회복의 과정이 원장님뿐만 아니라 선생님들 덕분도 크다는걸, 그리고 그게 얼마나 큰 의미인지 꼭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들의 눈에 촉촉이 맺힌 눈물을 보고 나까지 괜히 감성적으로 보일까 봐 아니, 사실은 이미 함께 울었던 날이 많아서 이번만큼은 가벼운 농담으로 대신했다.


사실은 그 말 뒤에 더 하고 싶은 말이 많았는데...

너무 좋아서, 너무 감사해서, 이 기분을 어떻게든 전하고 싶었다.


그렇게 웃으며 넘겼지만, 사실 그날은 중요한 미팅이 있어서 메이크업이 지워지면 안 되는 날이었다.


"이 치료를 받으면 나처럼 다 나아지겠지?"

"이 험한 세상도 조금은 더 따뜻하고 행복해질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나는 마치 동화 속 주인공이라도 된 듯, 자신감에 차서 날아갈 듯 들떠 있었다.

치료를 받기 전의 나를 떠올리면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어둠 속에서 길을 찾지 못해 헤매던 시간이 있었는데 이제는 내가 누군가를 이끌어줄 수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조금씩 회복되던 몸과 마음은 다시 무너지기를 반복했지만, 그 반복조차 소중한 경험이 되었다.


이따금 나를 끝없이 이해해 주시던 그분이 때로는 이해되지 않았고, 그런 그분을 이해하려는 내 모습조차 스스로 이해하기 어려운 적도 있었지만


그 따뜻한 마음 덕분에 나도 점점 더 용기를 내고 다시 살아갈 힘을 얻을 수 있었다.





나를 이끌어준 사람들 그리고 나의 회복


어느 정도 힘이 생겼을 때 병원 리뷰를 적었다.

내가 도움을 받았듯 누군가도 이 글을 보고 도움을 받을 수 있기를 바랐다.


그 마음은 진심으로 가득 차 있었고 내가 받은 그 은혜와 사랑을 나누고 싶었다.

병원에서 종종 마주친 환자분들과 여러 선생님들, 그들과 나눈 진심 어린 대화들 속에서 나의 후기를 보았다며 도움을 받았다는 말을 들었을 때 마음 깊이 행복했다.


원장님께서도 내 글을 보고 힐링이라고 하셨을 때 그 말이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 모른다.

원장님은 웃으시며 작가를 해 보는 게 어떠냐고 하셨다.


내가 겪은 고통이 누군가에게 작은 빛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실감했다.

내가 힘들게 울고 아파했던 기억들은 언급하지 않으셨고 나의 행복한 모습들만 기억해 주셨다.





치료 중이라 아직 고통에서 완전히 벗어난 상태는 아니었지만 그때는 더 큰 희망이 느껴졌다.


내가 그 작은 글로 누군가에게 위로를 전하고 있다는 사실이 큰 의미로 다가왔다.

내 경험을 나누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희망이 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니 감사한 일이었다.


나에게 도움을 받았다는 그 말들이 정말 따뜻했고 그 어색한 말들이 여전히 머릿속에 남아있지만 이제 나도 다른 사람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주변에서도 나에게 힘을 얻는다는 말은 치료 내내 쏟아졌다.


"이게 무슨 일이람?"





치료 후 다시 걸을 수 있다는 그 자체는 기적


주변의 지지에 내가 잘 이겨냈다는 생각에 안도했다.

이렇게 좋아진 건 절대 내 힘만으로 된 게 아니다.


수없이 넘어지며 무릎이 까지고 피까지 보였던 날들이 많았다.

제대로 걷는 것조차 힘들었던 시간들.


하지만 그날, 걷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큰 변화를 이뤄냈는지 온몸으로 실감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버거 웠는데 이제는 아무렇지 않게 걸으며 웃고 있는 나 자신을 보며 정말 수고했다며 마음속으로 평소보다 칭찬을 많이 해주었다.


이 모든 걸 가능하게 해 준 주치의 선생님께 감사한 마음이 벅차올랐다.

주사 치료실 바닥에서 나의 눈물 한 방울이 반짝이며 속삭이는 듯했다.


"이제 병원에 자주 올 필요 없어.

이제 이렇게 웃는 날이 많아졌네, 정말 수고했어."


당시 병원은 확장을 앞두고 있었는데 감사의 마음을 표현할 길이 없어 의사선생님을 업고 병원 한 바퀴라도 돌고 싶다는 우스운 상상을 하며 SNS에 농담으로 말하곤 했었다.


한층 더 밝아졌다고 말한 몇몇 친구들은 그런 나를 보며 "오버 치료"된 거 아니냐며 장난을 쳤고 나는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


나를 걱정하느라 속앓이를 했을 가족들과 친구들이 이제는 나를 놀리며 웃고 있다는 것 자체가 너무 좋았다.


그들의 걱정이 행복으로 바뀌었다는 사실이 나에게는 큰 치유였다.

그런 놀림쯤은 기꺼이 받아도 행복했다.





심신을 아우르는 치유


마음을 돌보려면 심리 상담이나 정신과를 전전해야 하는 게 일반적이다.


그런데 나는 자율신경실조증과 만성통증이 감정적인 영향을 받는다는 이유로 몸과 마음을 함께 치료받을 수 있었다.


그 점이 얼마나 큰 행운인지 치료를 받을 때마다 실감했다.

이런 치료가 가능한 병원이 많지 않다는 걸 알기에 아니 거의 없다고 생각하기에,


모든 의사 선생님들이 이렇게 섬세하게 치료해 줄 거라고 생각하면 그건 경기도 오산이다.


나는 운이 좋았다.

몸만 보는 치료가 아니라 내 감정까지 세심하게 살펴주는 의사를 만났으니까.


그렇지 않았다면 나는 여전히 같은 자리에서 헤매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많은 환자들이 병원 쇼핑을 하지.







‘AI가 당신보다 일 잘하겠네’ 할 만큼 과거에 상처 준 의사들도 있었다.

오해 마시라, 하트 뿅뿅 좋은 의사들을 훠~~얼씬 많이 만났다.


‘똥차 가고 벤츠 온다’고 누가 그러던데 나의 회복력은 지금 '롤스로이스'급이다.

의료비를 낸다 한들, 친절과 배려, 헌신은 절대적으로 당연한 것이 아니기에 고생해 주시는 원장님께는 그저 죄송했지만.


하지만 그런 안 좋은 경험 덕분에 좋은 의사를 알아보는 안목이 생겼다고 생각하며 위안을 얻었다.


모든 인간관계도, 그리고 물건도 좋음, 안 좋음이 공존한다.

안 좋은 경험이 있었다면 그만큼 좋은 것을 알아보는 눈도 길러졌다고 생각하면 된다.


실망스러운 만남이 있었기에 더 소중한 인연을 알아볼 수 있고 형편없는 물건을 써봤기에 진짜 좋은 물건의 가치를 알게 되듯이 대조를 통해 배운다.


과거의 아픈 경험이 나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는 분별 능력을 키워주었으니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든든한 아이템을 얻은 것 같았다.






지나간 아픈 경험이 상처 나 트라우마로만 남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면 그것도 의미 있는 배움이 아닐까.


간이고 쓸개고 다 빼줄 정도로 헌신적인 의사에게 나는 마음의 빚을 지는 기분이었다.

시간이 남아서 써주는 것이 아니라 바쁜 와중에도 시간을 내어 써준다는 것은 정말 귀하고 감사한 마음이다.


그런 마음을 받을 때마다 나 역시 누군가에게 그렇게 해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심 어린 시간과 마음이 오가는 관계는 예상보다 훨씬 강한 힘을 주는 것 같다.


그런데 문득 궁금해졌다.

나는 왜 이렇게까지 의사의 인정을 받고 싶었던 걸까?


인정중독처럼, 그 말 한마디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문제아도 아니었고, 반항적인 삶을 살아온 것도 아니었는데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를 바라보며 말씀하셨다.


"정말 감사해요.


이렇게 잘 나아주셔서, 그렇게 살아주셔서

너무 감사해요.


심장이 두근거렸다.


늘 기대에 미치지 못했던 학생이 마침내 장학금을 받아 부모님의 얼굴에 환한 미소를 피워낸 듯한 기분이었다.


벅차오르는 감정이 밀려왔다.

그 한마디가 내 안에서 파문처럼 번졌다.






병을 안고 살아간다는 것


투병 중에도 행복했던 순간들은 차고 넘쳤다.

아팠지만 그 안에서도 웃을 일이 있었고 따뜻한 순간들이 많았다.

그리고 지금은 정말 괜찮아졌다.


그때의 고통은 더 이상 나를 짓누르지 않는다.

이제는 그 시간을 지나온 내가, 누군가에게 조금이라도 더욱 도움이 된다면 그보다 더 바랄 게 없겠다.


몸이 아픈 날도, 마음이 무너지는 날도 많아서

결코 쉽지 않았지만 그 안에서도 배운 것들은 차고 넘쳤다.


병을 극복하는 법만이 아니라 내 몸과 마음을 이해하는 법, 아픔을 대하는 태도, 무엇보다도 내가 어디서 희망을 찾을 수 있는지를 알게 되었다.





그 변화는 생각보다 어마 무시하게 컸다.

처음에는 이 병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조급함뿐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 병을 안고도 살아갈 수 있다는 여유가 생겼다.




아픔을 적으로만 보던 시선을 통해 나를 돌보는 방법을 배우는 시선으로 바뀌었다.


많은 사람들은 불안할 때 정보를 찾지만 안 찾으면 좋겠다.

온갖 정보에 잠식되어 불안을 키우고 그 불안이 병을 더 키우기도 하기 때문이다.


검색을 하면 할수록 ‘괜찮다’는 말보다는 ‘더 심해질 수 있다’는 경고가 가득하고 희망을 본 사람들의 이야기는 의외로 찾기 어렵다.


부정과 절망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회복의 가능성은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의사선생님처럼 나도 누군가를 돕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래서 결심했다!!


서툴지만 무슨 글이든 직접 써보려 한다.


그래도 혹시 또 다른 누군가 내 글을 읽고 나도 괜찮아질 수 있겠구나! 하고 힘이 나지 않을까.


내가 받은 감동은 이루 말할 수 없었기에 환자분들의 치료 과정에서 한 사람이라도 더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원장님께서 바쁜 일상 속에서도 틈틈이 글을 남기시는 모습을 보며 나도 내 경험을 남겨보기로 결심했다.


대환장 파티라 아직 감이 잘 잡히지 않지만 기억을 여기저기 흩뿌리며 정리해 보고 있다.

많은 영향을 받아 농담 삼아 "원장님 닮고 싶어요" 했던 나,


지금은 그 말씀을 따라 하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






그렇게 따라 하기라도 하면 내가 조금은 괜찮아지는 사람이 되는 것 같다.


지금 걷는 이 길은 고통이 아니라고, 이 지구별은 여전히 아름답고 안전하다고 온 마음을 다해 외쳐주셨으니 고통의 늪에서도 회복은 가능하고 그 길을 걸어가고 있는 사람이 여기 있다는 걸 전하고 싶다.


지구별이 안전하다는 그분의 말을 나는 이제 믿게 되었다.

나는 지금 이 순간 1년 전 스스로에게 내뱉었던 모진 말을 바로잡는다.

간절히, 살아가고 싶다.


인생은 고통이 아니라, 나와 우리 그리고 이 세상을 탐구하는 여정이었다.

고로, 나의 행진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이 글을 보며 누군가가 ‘나도 괜찮아질 수 있겠구나’ 하고 한 번이라도 마음을 놓을 수 있기를 바라며.


부디 당신들은 이 고통 안 겪었으면 좋겠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그대로 두어도 아름답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