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없는 눈물과 끝없는 희망
통증 때문이었는지 혹은 알 수 없는 걱정 때문이었는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일요일 이른 새벽 눈이 떠졌다.
양치하는데 뒷목에서 돌 구르는 소리가 난다.
관절 내에서 기포가 터진듯한 뼈와 뼈가 마찰하면서 사각사각 뚜렷하게 들렸다 말았다 곧 전쟁이 날 것 같다.
등은 국소적으로 꽉 잡힌듯한 통증에 산산이 부서지는 듯한 느낌이다.
명치에는 쇳덩이가 박힌 듯한 답답함에, 숨을 들이쉴 때마다 등 통증은 폐까지 번져 깊은 호흡이 어렵다.
보행도 불안정해 어젯밤에도 넘어졌던 기억이 떠오르며 기분이 영 별로다.
창가를 스치는 늦가을의 아침햇살은 황금빛 물결처럼 부드럽고 찬란하게 퍼져 아픈 나와는 어딘가 모르게 다른 세계처럼 느껴진다.
그 빛은 아픔과 염려를 잠시나마 잊게 할 만큼 우아하고 따스한 아침을 선물해 주었다.
세상은 이토록 눈부시게 아름다운데 거실을 절뚝이며 걷는 내 모습과 그 풍경은 아무리 봐도 어울리지 않는 듯해 어쩐지 우스꽝스럽다.
이 와중에 어제저녁을 거른 탓인지 속이 허기져서 배는 정직하게 신호를 보낸다.
밥을 차려 먹을 기운이 없어 배달앱을 켰지만 이른 아침이라 문을 연 가게는 손에 꼽을 정도다.
텅 빈 속처럼 거리도 아직은 고요하다.
딱히 할 일도 없던 차에, 문득 내일 월요일이 오면 의사 선생님의 얼굴을 보고 말할 용기가 나지 않을 것 같았다.
읽게 될 분의 심정을 떠올리니 내가 피로를 유발하는 것만으로도 손바닥에 땀이 배어 나왔다.
하지만 계속 생각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오히려 시간을 끄는 것이 더 큰 민폐일지도 모른다.
지금 메시지를 보내지 않으면 또 언제 내면의 파동이 일어날지 알 수 없으니 감정의 동요가 다시 찾아오기 전에 반드시 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렬하게 밀려왔다.
이렇게까지 신경이 쓰인다면 결국 그 파동은 다시 찾아올 테니까.
"더 이상 머뭇거릴 이유가 없다!"
가벼운 인사도 아닌, 이렇게 묵직한 이야기를 꺼낸다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 넘겨야만 이 험한 길을 한 발자국 더 나아갈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대감이 나를 이끌었다.
몇 번이고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며, 마침내 보낸다.
"원장ㄴ..."
"원장님, 진료실에서 그..."
"원장님, 진료실에서 그동안 말씀드리지 못..."
휴~ 내가 생각해도 답답해서 속이 터지겠다."
"원장님, 진료실에서 그동안 말씀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제 이야기를 들어주실 수 있으실까요?
사실은, 제가 그렇고, 그런 일이 있었는데요."
몇 분 후, 답장이 왔다.
학회 가시는 열차 안이라며 법적인 조치는 취했는지 2차 피해 등에 대해 염려하셨다.
"어려운 이야기를 용기 내어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님 마음속의 그 용기가 다가오는 순간들을 더 아름답게 바꿀 것을 나는 믿습니다. 내일 뵈요."
말해줘서 감사하다니...
그 말이 이렇게 따뜻할 줄 몰랐다.
나도 앞으로 누군가 힘든 이야기를 꺼낼 때 이렇게 말해줘야지.
한편으로는 어떤 부분에서 안도감이 느껴졌지만 불안감과 두려움이 여운처럼 남아 있었다.
용기를 내어 이야기를 꺼내고 그 말을 누군가가 이렇게 받아준다는 사실에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지기도
했지만 이 과정이 쉽지 않다는 걸 알았다.
이 길이 나를 어떻게 바꿔놓을지 모르겠지만 조금씩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에 의미를 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동안 마음속 깊이 묻어두었던 것들이 세상 밖으로 흘러나오자 해방감이 밀려왔다.
묵은 감정들이 마치, 물이 넘쳐흐르듯 막힘없이 빠르게 쏟아져 나가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벅찬 감정에 가슴이 뻐근했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자연스러웠다.
오래된 구름이 걷힌 바람에 흩어지는 듯
모든 것이 한순간에 풀어지고 내 안의 숨이 쉬어졌다.
왜 그동안 말하지 못했을까, 왜 나만의 방식으로 감정을 가둬두었을까...
그러나 내 안에 쌓여 있던 것들이 한 번에 풀어진 것은 확실했다.
나에게 가장 필요했던 건 내가 만든 경계선을 넘어 내 안의 진짜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우선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사실 조심스러웠다.
내가 하는 말이 누군가에게 부담이 될까 봐, 아니면 나의 감정이 다른 사람에게 무겁게 비칠까 봐 걱정했다.
이 이야기는 제일 처음 갔던 병원의 초면인 선생님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나 자신을 위한 작은 승리이자 새로운 시작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분은 알까.
길을 잃은 나에게 어떤 언어로도 풀어낼 수 없는 감정들이 덕분에 숨 쉴 수 있다는 것을.
의사 선생님은 내가 병원에 가지 않는 날도, 치료를 중단하고 있을 때도, 원격 진료를 통해 내가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손을 내밀어 주셨다.
길을 잃고 방황하던 나에게 그분의 배려와 관심이 내게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나에게는 치료 이상의 의미였다.
나를 믿어주는 손길이 있어 감사해서 울고, 나 자신이 불쌍해서 다시 울었다.
이 지독한 현실 속에서 내 처지가 서러워서 울고, 고통에 몸부림치며 울고, 제발 나를 데려가 달라고 절규하며 울었던 그날들.
죽고 싶어서 울고, 살아야만 할 것 같아서 또 울었던 나날들.
고통 속에서 눈물이 더 이상 눈을 감추지 못하게 했던 날들.
그 눈물 속에서 내게 다시 일어설 힘이 되어준 그 손길을 기억하며 이 눈물은 절망인가, 희망인가.
끝없는 어둠 속에서도 그마저도 포기하지 않겠다는 마지막 의지인가.
어쩌면 그 모든 감정이 얽혀 있는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찾으려는 몸부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 모든 감정들이 뒤섞여 다시 한번 일어설 용기를 찾으려 한다.
그래,
눈물은 약함이 아니라, 살아 있으려는 몸부림이지.
울면서도 포기하지 않았기에, 나는 아직 길 위에 서 있다.
세상이 버거웠고, 삶은 내게 너무 가혹했다.
그러나 내 곁을 지키던 사람들의 따뜻함과 다정함이, 그들이 건네는 한마디가, 나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끝까지 나 자신을 놓지 않겠다고, 흔들려도 괜찮다고.
누군가 내 손을 잡아줄 때 그 온기를 망설이지 않고 받아들이겠다고.
고통이 클수록 더 단단해질 수도 있다는 것을.
끝없는 눈물이 흐르는 그 순간에도 여전히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는 일이라는 것을 기억하자.
엄마, 혹시 신이 나에게 더 큰 고통을 주어 엄마 없이도 버틸 수 있도록 단련하려 하신 건 아닐까?
그런 어려운 상황을 겪게 하여 스스로 행복을 찾을 수 있는 길을 열어주기 위한 방법이었을까?
고마워 엄마, 나를 이렇게 씩씩하게 키워줘서.
엄마... 그런데 나 너무 힘들어.
고통에 의연해지는 방법을 모르겠어.
당시, 엄마를 갑작스럽게 떠나보낸 지 1년이 조금 넘었지만 그 충격 속에서 여전히 가끔씩 흔들리고 있었기에 더욱 엄마 생각이 많이 나는 때였다.
엄마는 `근긴장성이영양증` 즉 근육이 서서히 저하되는 유전병을 앓고 계셨다.
손가락조차 굳어가고, 쥐었다 펴는 것조차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나에게는 꾹꾹 눌러가며 문자를 보내셨다.
목이 아파 잠을 못 잘 때면 늘 너 때문에 잠을 못 잤으니 병원에 다녀오라고 하셨다.
내가 의사 선생님을 자랑했을 때 엄마는 그 좋은 선생님이라고 칭찬하셨다.
나만 좋은 병원, 좋은 의사 선생님께 치료받는 것이 미안할 정도로 엄마의 몸 상태도 결코 좋지 않았다.
내가 어떤 모습이어도 밤이든 낮이든 언제든지 연락하면 반겨줄 사람이 엄마였다고 늘 생각했었다.
그런데 지금, 엄마가 있었다면 나를 보며 얼마나 마음 아파하셨을지 그럴 때마다 차라리 잘됐다!
그렇게 생각하고 만다.
그때만 해도 나는 약을 잘 챙겨 먹었고 약국 약보다 병원의 처방약이 나를 좀 더 나아지게 해 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 당시에는 그냥 '이 약을 먹으면 좋아질 거야'라는 기대감이 컸고 약을 꽤 복용했다.
장시간 치료를 받으면서 그리고 약을 잘 쓰지 않는 근본치료를 하는 의사 선생님을 만나 내 통증에는 약을 먹는 것만으로는 모든 게 해결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그냥 병원에 가고 약을 먹는 것에만 의존했을 뿐,
내가 어떤 변화나 성장을 해야 한다는 걸 알지 못했다.
치료라는 것에 대해 너무 간단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치료는 약을 먹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진 병과 함께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 내 몸과 마음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에 대해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다는 걸 배웠다.
의사 선생님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평소처럼 평온하고 환하게 맞아주셨다.
늘 그러셨듯이, "잠을 잘 잤는지, 어제는 어떠셨냐"라고 물으실 줄 알고 여기저기 불편하다고 말할 준비를
하던 찰나.
오늘은 "얼굴이 좋아 보이네요!^^
주말에 날씨가 좋았는데 어떻게 보내셨어요?"
오늘 오면서 보니 구름이 가을 햇살에 몽글몽글 떠있더라며 얘기하시는데 그 표현이 너무 듣기 좋았다.
나는 어제의 메시지 때문에 오늘은 맞장구를 치기가 조금 뻘쭘했다.
그래도 좀 어떠냐고 물으셔서 고통을 꺼낸다는 게,
"전신이 다 아파서 죽을 것 같아요."
"이 정도 가지고 죽긴 뭘 죽어요." ㅎㅎ
통증과 불안이 얽히면 자꾸 급발진을 하게 되는데 그럴 때마다 농담 섞인 한마디로 내 마음에
브레이크를 밟았다 떼시며 차분함을 되찾게 해 주신다.
그 말 한마디가 경직된 마음을 풀어주는 것 같았다.
나는 왜 정신과 의사 선생님보다 통증 재활 의사 선생님이 더 편하고 좋을까?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올 때마다 함께 대기해 주는 귀요미 내 친구냥!!
애착쿠션이 되어버렸다.
서울에서 놀러 온 친구가 동행해 주어서 찰칵!
저렇게 짝다리를 하면 그나마 중심 잡기가 편해서 통증이 덜 느껴진다.
의사 선생님께서 거동에 문제가 있으니 혹시나 하는 마음에 MRI를 찍어오라고 하셨다.
그쪽에서는 MRA도 찍자고 해서 같이 찍었다.
몇 년 전 진단받은 뇌하수체 종양 외에는 특별한 이상은 없다고 하셨다.
그런데 영상의학과에서는 약간 커졌다고 하더라, 걱정이 된다고 하니까 조금 커졌다고 해도 걱정할 정도는
아니라고 프로락틴 뇌종양은 흔한 편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시야가 흐릿해지면 꽈리?? 대학병원 수술이 필요할 수도 있다고 덧붙이셨다.
시야 이야기에 눈을 괜히 비벼보았다.
정말 뇌에 이상이 있는 건 아닐까? 불안했다.
아, 정말 병원이라는 곳은 더 많은 걱정거리를 주는 곳 같다.
모르는 게 약이라더니!
치료를 받고 집에 가기 위해 택시를 탔는데 운전석 너머로 기사님께서
"아이고! 다리를 다쳤나 봐요? 목발이라도 하셔야겠어요"
치료를 받고 있다고, 주사도 맞고 물리치료도 병행하고 있다고 말씀드리자
"요새는 뭐, 못 고치는 병이 없더라예! 힘내세요."
소박하고 단단한 위로가 감사했다.
창 밖을 바라보니 늦가을의 공기가 볼을 스칠 만큼 차갑게 느껴졌지만 어딘가 은은한 따뜻함이 배어 있었다.
노랗게 물든 은행잎들은 바람을 타고 나직이 흩날렸다.
바람을 따라 나무들은 가볍게 춤추고 부드러운 햇살은 잠시 비추었다가 구름에 가려지곤 했다.
순간순간마다 세상의 모든 것이 잠시 멈춘 듯, 그 짧은 찰나의 순간들이 참 아름다웠다.
거리는 바쁜 걸음들로 가득했지만 계절은 묵묵히 제 몫을 다하고 있었고 사라지는 것과 남아있는 것들이 한데 어우러져 가을의 마지막 페이지를 차곡차곡 채워가고 있었다.
오랫동안 흐릿했던 것들이 서서히 시야에 들어왔다.
낡은 가로등에 기대 선 나뭇가지, 도로 위에 겹겹이 쌓인 낙엽들,
길 모퉁이에 소박하게 자리한 작은 화분 하나까지.
고된 시간을 지나며 무심히 스쳐 왔던 잊고 지나쳤던 풍경들이 이렇게도 깊고 아늑했다니.
잠시나마 아픔을 잊고 계절이 건네는 따뜻한 위로 속에 머물 수 있어 기분이 좋았다.
저녁에는 그동안 읽고 싶었던 책을 잠시 펼쳐 들었다.
집 앞 화단에서 슬쩍 주워온 예쁜 나뭇잎을 책갈피로 사용하기로 했다.
나뭇잎은 지금 나와 닮은 것 같았다.
그 잎사귀처럼 굳건하게 자리를 잡아가며 언젠가 다시 펼쳐볼 때마다 더 단단해진 나를 느끼고 싶다.
그때는 지금의 아픔이 전혀 다른 색으로 물들어 있기를.
병원 다녀온 것만으로도 신체적 피로는 극에 달했고 자꾸만 힘이 풀려 주저앉을 때면 고관절 통증이 뼛속까지 느껴진다.
움직임을 멈춘다면 모든 것이 퇴행할 것이라는 직감이 나를 또 일어서게 한다.
사이클을 타다가 참지 못하고 내려왔다.
걸음이 시원찮아 멀리 돌아다닐 순 없었지만 산책도 했고, 치료도 잘 받고, 집 앞 음식점에서 따뜻한 한 끼를 챙겼으니 그걸로 만족해 본다.
견뎌야 한다는 걸 알지만 지금은 그마저도 버겁다.
하지만 통증은 신체의 경고이자 회복의 시작점이기도 하다.
극도의 고통 속에서도 인간은 움직일 수 있고 움직임이 생존이며 재건이다.
한 걸음 내디뎌야 다시 나아갈 수 있다.
나는 아직 멈추지 않았다.
언젠가 다시 일어설 수 있음을 믿으며 계속 나아갈 것이다.
힘내자 나야.
이제는 정말 그만 아프고 싶다.
원장님, 그동안 제 마음속 깊은 곳에 묻어두었던 이야기를 꺼내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지만
원장님께서 그 이야기를 받아주신 덕분에 조금 더 가벼워진 것 같습니다.
특히, 치료 효과가 잘 나타나지 않던 시점에 제 마음의 짐을 털어놓을 수 있게 된 것이 정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원장님의 이해와 배려 덕분에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는 용기가 생겼고 조금씩 치유되고 있음을 느낍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