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에서 사람으로
***님!! 괜찮으세요?
천천히 하지 그러셨어요.
많이 어지러우세요?"
"원장님, 저 괜찮아요! 얼른 진료 보세요."
"안 괜찮아요. 천천히 한 번 움직여보세요."
어지러움이 며칠 있었던 터라 계속 지속되면 이석증일 수 있다고 하셨는데 다행히 주사 후 생길 수 있는 일시적인 부작용이었다.
.....
"네! 일단 조금만 쉬었다 갈게요."
베드에서 떨어져 바닥에 누웠던 그날의 소동은 작은 불씨처럼 시작되어 확산되는 듯했으나 금세 끝났다.
"앗, 차가워!"
얼마나 누워 있었을까? 20분? 30분?
정신을 조금 되찾아가며 주변의 침묵을 깨뜨리려 했다.
화장실에 가려고 일어나자, 온몸을 감싸는 걱정 어린 시선들이 내게 쏟아진다.
의사 선생님과 주사실에 있던 분들이 나를 향해 떼창을 한다.
도와달라는 말은 입 밖에 내지 못했다.
반복되는 사고로 우려가 커져, 유명 인사가 되어버린 것 같다.
대기실에 길게 늘어선 환자 명단을 보며 의사 선생님과, 대기 중인 환자분들께도 미안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나에게 배경음이 생겼다.
조심, 조심, 천천히
(^-^)
나는 정말 내가 봐도 교과서에도 나오지 않을 특이한 환자였다.
아니, 특이하다기보다는 그냥 ‘트러블 메이커’ 같았다.
매일 넘어지고, 주저앉고, 힘이 풀리며, 내 몸이 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다리가 힘이 풀려 순식간에 땅이 내 발을 쥐고 당기는 느낌이었고
그런 상황은 마치 영화에서나 볼 법한 이야기였다.
몸이 나를 제어할 수 없으니 무력함을 느꼈고 그 고통은 반복되었다.
이쯤 되면 전국에 있는 통증/재활의학과 의사들도 내 몸상태가 궁금하지 않을까?
‘모든 의사가 총출동해서 협진을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이 mystery 한 몸이 왜 이러는지 연구해 봐야 하는 거 아닌가?
몸이 아프면 아이가 된다더니 이해받고 싶어 생각마저 퇴행한 것 같다.
치료를 마친 후 횡단보도를 건너다가 넘어졌다.
빨강불로 바뀌자 한 분이 차에서 내려 손짓으로 모든 차를 멈춰 세웠다.
"잠깐만요!"
연신 고개를 조아리며 감사함을 전하는데 코끝이 시큰해졌다.
차갑게만 느껴졌던 나의 세상이 따뜻해서.
자기 시간을 쓰며 남을 돕는다는 것은 자신의 삶을 나누는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에게는 작은 행동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큰 희망이다.
늦가을 햇살이 유난히 뜨겁게 내리쬐던 그날 저녁.
지금도 소나타 차를 볼 때면 차의 표면까지 반짝였던 그 차주분이 이따금씩 떠오른다.
목에 핏대를 세우며 정차된 불특정 차들에 대고 소리쳤던 그 모습이.
그날 깨진 폰
의사 선생님은 남의 시선을 신경 쓰지 말고 도움을 받는 것에 대해 미안해할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신다.
타인의 시선을 지나치게 의식하면 스스로를 잃을 수 있지만 완전히 배제하는 것도 내게는 어려웠다.
아마도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되 그것에 휘둘리지 않는 균형을 찾으라는 것이었을까 하고 지금은 그 말이 이해된다.
흔히들 "남들은 생각보다 관심 없어"라는 말을 하지만 신경을 덜 쓰고 자신감을 가지라는 위로였을 거라고.
지속적인 타인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은 몸 상태가 좋지 않다는 의미이지만 그보다 더 깊이 자리한 감정은 병원을 자주 찾아야 한다는 부담이주는 주눅감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한국 사회에서는 눈치를 보는 문화가 깊게 자리하고 있다.
타인의 평가를 의식하다 보면 남들과 조금만 달라도 쉽게 눈에 띄게 마련이다.
나는 불행한 일을 겪은 사람, 트라우마가 있는 사람, 비정상적인 사람, 정신이 온전치 못한 환자, 자율신경실조 환자, 만성 통증 환자, 종합병원 환자로 남들이 나를 그렇게 볼 거라고 생각했다.
안타깝게도 가장 날 그렇게 바라보고 있던 건 나 자신이었다.
"아픈 게 네 죄는 아니잖아?"
한때 화제가 됐던 부부의 세계 속 그 대사처럼, 아픔 자체는 나의 잘못이 아닌데.
어떻게 살면 삶을 소풍처럼 살아갈 수 있을까?
그분이 나누는 넉넉한 마음은 상황이나 감정이 역전된 듯 나를 단숨에 녹여주었다.
이분 앞에서는 참 자유로웠다.
넘어져도, 울어도, 아파도.
무엇보다 환자로 규정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바라봐 주었기에 온전히 안전과 자유를 느낄 수 있었다.
몸이 내 뜻대로 움직이지 않으면서 꿈과 현실을 넘나들며 감정과 통증을 솔직히 표현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도 배우게 되었다.
이제 더 이상 비정상도, 정상도 아니다.
사람은 상황에 따라 이렇게도, 저렇게도 될 수 있으며, 때로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하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고정된 틀 안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것이다.
의사 선생님은 공감 능력이 뛰어나시고 따뜻한 리액션으로 큰 위로를 주신다.
그 덕분에 안심하고 마음을 열게 되는 것 같다.
"환자가 행복해야 우리도 행복하다."
이 말처럼, 환자들의 행복을 최우선으로 생각하신다.
그 철학에 공감하며 나도 언젠가, 이렇게 말씀드린 적이 있다.
"저도 꼭 나아서 행복하게 해 드리겠습니다."
내가 건강을 되찾으면 원장님도 더 큰 에너지를 얻으시고 그 에너지는 나뿐만 아니라 다른 환자분들께도 긍정적인 영향을 줄 것이다.
환자들은 그 에너지를 원장님께 되돌려 주고 그 에너지는 다시 나에게 돌아와서 선순환의 흐름을 만들지 않을까?
이런 긍정적인 흐름이라면 치료라는 건 몸의 회복과 함께 서로에게 힘이 되는 여정이 될 것이다.
고통을 말로 풀어내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그 덕분에 내 상태를 더 명확히 전달할 수 있었고 나 자신을 더 잘 이해하게 되었다.
억누르던 감정을 꺼낼 수 있게 도와준 그분 덕분에, 내 세상을 좀 더 자유롭게 펼칠 수 있었다.
이제는 감정을 망설이지 않고 표현한다.
병원 선생님들과도 자주 만나는데도 그때마다 서로 눈을 마주치며 반가운 미소를 나눈다.
그곳에서는 따뜻한 시선과 진심 어린 교감이 일상이었고 그것이 큰 위안이 되었다.
아이들만이 따뜻하고 안전한 것을 필요로 하는 게 아니다.
성인들도 마찬가지다.
나이가 들수록 마음속에 쌓이는 무게와 감정의 복잡함이 커지면서 아이들보다 더 유약한 것 같다.
그래서 더 많은 위로와 안정이 필요하다.
누군가가 내 감정을 이해하고 함께 나누면 삶의 큰 힘이 된다.
고통 속에서도 따뜻함은 있었다.
감정들이 풀려나면서 진정으로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행복한 일만 가득했다면 내 이야기는 한정적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기쁨과 슬픔, 도전과 극복, 그 모든 것이 결합되어 이야기를 만든다.
문학이든 영화든, 사람들은 어려움을 겪고 그것을 극복하는 이야기에 공감을 한다.
갈등과 변화가 있는 곳에서 서사가 탄생한다.
만약 삶이 행복한 일들로만 채워졌다면 사색도, 내면을 성찰할 수 있는 기회도 없었을뿐더러
극복해야 할 장애물도, 성장도, 감정의 깊이도 부족했을 것이다.
고통이 있었기에 삶을 더 입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었고 그 경험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어주었다.
몸도, 마음도, 생각도 반복을 거듭하며 다져지고 정리되어 지금까지 해온 모든 반복들이 날 여기까지 데려왔다고 믿는다.
지금 쓰는 이글도 마찬가지다.
처음에는 흐트러지고, 어긋나고, 다시 고치고
다듬어가며 반복하고 또 반복이 쌓여 '완성'이라는
지점에 닿는다.
그때는 몰랐지만, 고통도, 삶도 그렇게 다듬어지는
것이었다.
나의 변화와 성장을 기꺼이 축하해 준 그들의 응원을 받으며 신기한 일들이 하나씩 모락모락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약해진다는 것은 후퇴가 아니라 다른 차원의 시야를 얻는 것이다.
몸과 마음이 약해지면 자연스레 한 걸음 물러서게 되지만 그 자리에서만 볼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예전에는 놓쳤던 세상의 결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더 깊이 들여다볼 수 있는 눈이 열린다.
감정과 몸의 상태를 솔직하게 표현하는 것 그 자체가 치유의 시작이다.
작은 것에 연연하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깨달음도 그런 넓어진 시야에서 얻은 또 하나의 삶의 경험이다.
몸이 아프기 전처럼 버텨주지 않더라도 그만큼 더 많이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이 고마워진다.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을 걷는 것 같고 왜 이 길을 지나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는 순간들이 많지만 그 터널 속에서 발견하는 작은 희망들이 나를 계속 견딜 수 있게 만든다.
고통을 겪고 나서야 알게 된 것들이 있고 그 이해가 삶을 더 깊고 풍요롭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애매한 균형처럼 보이지만 그게 진짜 삶의 이유일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