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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arpe PM Dec 29. 2022

첫 번째 발자국

-나는 누구인가?

어린 날을 돌아보면, 하루에도 몇 번씩 장래희망이 바뀌곤 했다.

하고 싶은 게 너무나도 많아 매일이 행복하고, 새로운 미래를 꿈꾸는 일이 즐거웠다.

하지만 꿈 많은 아이의 세상은 정형화된 규칙 속에 흐려져만 갔고,

남들이 그렇듯 대학에 가서, 남들이 그렇듯 졸업을 하고 보니

정작 나의 꿈은 이미 사라져 버린 채 세상 속에 던져졌다.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의 장장 12년에 걸친 의무교육의 가르침 속

학생으로서의 첫 번째 덕목은 그저 '공부를 잘해야 한다'라는 것이었다.

태권도 선수를 준비하던 중학생인 나를, 부모님은 학업에 정진시키고자

우리 집은 학구열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노원구 은행사거리로 이사했다.

작은 내 세상이 무너진 그날, 나는 '공부를 잘하기로' 마음먹었다.

새로운 환경에서 맞이한 중학교 3학년은 꿈과 희망 대신, 좌절과 원망뿐이었다.

공부에 아무런 기초가 없었으니 그럴 수밖에.


내가 선택한 방법은 학교 수업은 제쳐두고 특히나 부족한 수학 기초부터 쌓는 것이었다.

중3교실에서 초6수학 문제집을 풀던 사람은 아마 나밖에 없을 것이다.

이때는 뭐에 씐 것처럼 정말 하루종일 수학문제만 풀었다.

나의 이런 노력이 빛을 발한건지 고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교과과정 진도를 따라잡고,

입학 후에는 더 이상 수학은 내 걱정거리가 되지 못했다.

하지만 고등학교 입학 후에는, 본격적으로 대입을 위한 과정이 필요했다.

꼬박 3년간의 하루 4시간의 수면과 밤늦게까지 이어지는 강행군은 나를 지치게 만들기 충분했다.

대망의 수능을 치르고 나서 든 첫 번째 생각은 '이제 놀아야지', '하고 싶었던 일 다해야지'가 아닌

'이제 좀 쉴 수 있겠다'라는 안도감이 나를 슬프게 했다.




대학교 시절의 나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수능 점수에 맞춰 성북구 정릉동 인근의 국민대학교를 지원하였다.

특별히 가고 싶은 학과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철학과 심리학에 흥미가 있었지만 나는 이과였고, 컴퓨터공학이 비전이 좋다는 말에 지원하였다.

그냥 그게 끝이다. 대학에 가면 무언가 대단한 것이 있는 것처럼 아이들을 응원하지만,

정작 본인이 원하는 학교, 원하는 학과에 가는 아이들이 몇이나 될까.

물론, 고된 고등학교 시절에 대한 보상심리와 성인으로서의 자유로움이 어우러진 나의 20살은

'20살'이란 단어에서부터 뿜어져 나오듯 풋풋함과 싱그러움에 터질 만큼 반짝이던 청춘으로 기억된다. 


어려서부터 게임을 좋아하고, 컴퓨터와 친근했기에 막연히 잘 해낼 것이라 기대했던 나에게

"Hello World"로 시작된 C++수업은 정신 차려보니 따라가기에 급급하였다.

'잘 해내야지'라는 생각보다는 '어떻게든 해야만 해'라는 생각으로 과제를 간신히 수행할 수 있었다.

나의 대학 시절에는 빠질 수 없는 친구들이 있다.

각자의 이런저런 고민거리와 시시콜콜한 농담으로 숱한 밤을 함께 술잔은 기울이던 나의 동기들 중에는 

코딩으로는 '재능충'이란 말이 아깝지 않은 동기가 한 명 있었다.

내가 밤낮을 고민하여 작성 한 코딩 과제를, 그 친구는 제출 마감 40분 전 술자리에서 작성하여 제출하였다.

그 결과는 알고리즘 적으로는 내 과제가 더 좋으나, 단순 코드 효율로는 그에 미치지 못했다.

이때 내색은 할 수 없었지만, 스스로 엄청난 박탈감에 휩싸였다.

'코딩은 저런 애들만 하는 건가?', '나는 코딩에 재능이 없는 건가?'라는 질문이 자연스레 나를 향했고,

나의 부족한 부분을 스스로 충당하려 노력했지만, 이는 공부가 아닌 센스라는 것이 나를 슬프게 했다.

추후에 학년이 올라가면서, 코딩만이 컴퓨터공학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지만, 

안타깝게도 이는 시간이 좀 더 지난 후의 일이다.


군대를 다녀온 이후의 대학생활은 말 그대로 혼돈이었다.

전역 시기가 학기 중이었기에, 한 학기 휴학하며 의류매장에서 아르바이트한 후 돌아온 학교는

나의 공백기 간 중 학부의 커리큘럼이 모조리 바뀌어, 기존의 C++ 이 아닌 JAVA로 강의가 진행되었다.

물론 C++이나 JAVA나 코딩 언어라는 점에서 다른 점은 없고, 휴학 기간 동안 복학을 준비했기에

당장의 '코딩'을 못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당시 입문자 입장으로는 중국어 배우다가 일본어 쓰라는 격이려나.

대학생활을 열심히 하려 마음먹고 복학한 나에게는 초장부터 그렇게 맥이 빠질 수 없었다.

나뿐만 아니라 동기, 선후배에 이르기까지 복학생들의 입장을 정리하여

담당교수님께 '복학생을 위한 JAVA 강좌를 열어달라' 요청하여 교외 시간에 특강을 수강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해당 학기는 여전히 페널티 요인을 떠안을 수밖에 없었고, 익숙하지 않은 JAVA로 더듬더듬 코딩 과제를 작성한다 하더라도, 기존 재학생과의 실력적 공백을 메꾸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때부터였을까, 개발자로 진로를 정한 동기들과 무언가 다른 길을 걷기로 마음먹은 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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