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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술관옆산책로 Jan 18. 2024

탕탕평평(蕩蕩平平): 글과 그림의 힘 _ 국립중앙박물관

김두량의 삽살개 그림을 보러 갔다. 삽살개 그림으로는 조선회화사 원탑인 김두량의 그림이 이번에 <<탕탕평평>>이라는 전시기획으로 대중 앞에 나선다기에 놓칠수 없다. 


탕탕평평 (蕩蕩平平) : 글과 그림의 힘 
23.12.8 ~ 24.3.10
국립중앙박물관 (1층) 특별전시실 


전시는 영조 즉위 300주년을 기념해 영조와 정조가 나라의 중심에서 '탕평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글과 그림의 힘'을 어떻게 활용했는지에 주목한 기획이었다. 소박하게 삽살개를 보러 간건데 조선 역사 상 가장 훌륭한 임금들의 문치(文治)의 역사를 들여다 볼 수 있어 횡재한 기분이었다. 


김두량 <삽살개> 1743, 영조19년

입구 초입부터 내가 그리 보길 원하던 삽살개다. 


어찌나 리얼하게 제대로 그려놨는지 밤이 되면 그림에서 튀어 나와 박물관을 돌아다니며 컹컹 짓을 것 같다. 세붓으로 한올한올 표현된 털이나 네 다리의 움직임, 동글게 말린 꼬리와 형형한 눈빛까지 그야 말로 완벽에 가깝다. 조선 개의 위상은 이 삽살이가 세웠다. 


예술적 아름다움에만 정신 못차리고 보고 있는데 설명판이나 성우의 나래이션에선 눈을 부릅뜨고 이빨을 드러내며 아무 때나 짖는 삽살개를 영조는 탕평을 반대하는 신하들의 모습으로 비유했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그리도 보인다. 도화서 화원이었던 작가 김두량이 이런 주군의 마음을 받들어 이런 명작을 남긴 것이고, 그 그림에 영조가 직접 글과 글씨를 썼다. 


사립문을 밤에 지키는 것이 네 책임이거늘 
柴門夜直 是爾之任

어찌하여 낮에 또한 이와 같이 짖고 있느냐
如何途上晝亦若此 

글/글씨 영조 

그 날엔 이 그림이 삽살이에 빗대어 신하들을 꾸짖는데 쓰였을 지언정, 지금 내 눈엔 조선의 기상이 형형하게 느껴지는 조선뽕 제대로 박힌 영물 그 자체다. 



<강세황 초상> 1783, 정조7년 / 그림 이명기, 글 정조, 글씨 조윤형 / 비단에 색 / 진주강씨 백각공파 종친회 소장 (국립중앙박물관 기탁) / 보물

이번 <<탕탕평평>>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그림으로 나는 강세황의 초상화를 두번째로 들었다. 


남준이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우리 선조이기도 하고, 인물로도 매력적이어서 표암의 초상화가 저 멀리 보이자 모든 것을 건너 뛰어 일단 그 앞으로 갔다. 강세황의 초상화로는 표암 자신이 70세에 그린 자화상을 언젠간 보기를 소망하나 그 전에 이명기가 그린 이 강세황 초상도 내 미술품 위시리스트에 있었기에 눈이 인지하자 마자 발이 튀어 나가 버렸다. 


이명기의 그림임을 확인하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주욱 따라가며 찬찬히 그림을 보았다. 우리 옛그림을 보다 보면 화제가 쓰여 있는 경우가 많은데 어차피 한자를 읽고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은 없으니 그림만 본다. 어찌보면 반쪽이 감상인데 그렇다고 우리 그림을 보기위해 이제 한문공부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어차피 못 읽는 글이다 보니 그 쪽으론 눈이 잘 안갔는데, 설명판을 보니 글은 정조가 하사하고 조윤형이라는 분이 글씨를 썼다


내 기억으론 강세황은 본인 포함 삼대가 기로소에 들어간 대단한 집안출신이다. 이 그림도 정조가 강세황이 기로소에 들어가는 것을 기념하고자 당대 최고 초상화가인 이명기에게 명하여 그리게 했다고 한다. 그리고 강세황이 죽은지 2년 후, 그를 아끼는 마음을 담아 글을 지어 내린 것이 초상화에 적혀 있는 것  


그러니 그림은 당대 최고 화가 이명기, 글은 성군이었던 정조, 글씨는 명필가인 조윤형이 쓴 삼박자가 완벽한 그림이다. 


<박문수 문무공신 전신상> 진재해 추정, 1728, 영조4년 / 보물 & <박문수 문무공신 반신상> 작가미상 1750, 영조26년 / 보물

강세황 초상화 그림 옆에는 나에겐 '어사'라는 수식어로 각인된 박문수의 초상화도 있었다. 


꼬맹이 때 이정길 배우가 분했던 MBC드라마로 봤던 인물이 실제로는 그 배우와는 전혀 딴판의 외꺼풀의 얄상한 인물이구나...


(찾아보니 이후에 유준상배우가 분한 MBC동일의 어사 박문수 드라마가 있던데, 이 드라마는 전혀 모르겠고, 내가 기억하는 드라마는 1981년 드라마였다. 완전 찐 애기 시절인데 이걸 기억하네 내가...내 인생 처음으로 기억하는 드라마급이구나...) 


사진이 없던 시절, 초상화라도 남길 수 있던 사람들은 얼마나 축복인가...


그의 업적이 글로만 내려오는 것보다 초상화가 있으니 훨씬 더 구체적이고 입체적으로 다가온다. 


조선에 성과가 좋은 어사가 박문수만 있는 것은 아닐 것인데 드라마로 만들어질 정도로 역사적으로 좀 더 주목을 받는 이유가 어쩌면 이런 초상화가 있어 그 인물에 대해 상상할 여지가 훨씬 더 많고 구체적일 수 있기 때문일 수 있다. 그러기에 글로건 그림으로건 기록은 진실로 역사의 승자가 될 확률을 높여준다... 는 좀 다른 쪽으로 결론이 가버렸다:)  


영조의 탕평정치를 뒷받침한 박문수의 38세와 60세 때의 두편의 초상화는 동일인물의 나이듦을 보는 재미는 덤으로 20년 사이에 그림 기법의 차이를 바로 볼 수 있어 대단히 흥미롭다. 


(좌) <영조의 시> <<어제 갱화첩>> 1737, 영조13년 / (우) <심환지에게 보낸 편지> <<정조어찰첩>> 1798, 정조22년

왼쪽은 나라에 가뭄이 들어 영조가 정성을 다해 기도를 올리자 비가 내린 것을 매우 기뻐하며 영조가 지은 시이고, 오른쪽은 심환지 흉을 보는 신하를 호로자식이라고 칭하며 거침없는 감정을 표현한 정조의 편지이다. 


후자는 편지이므로 정조의 글씨가 맞는데, 전자가 영조의 시 일지언정 직접 쓴 글씨인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이 글이 영조가 직접 쓴 시이자 글이 맞다면 영조는 단아하고 깔끔한 글 솜씨를 갖은 분이다. 


정조의 글씨는 비록 흘려 씌여 있지만 정자로 쓸 때의 글씨도 내 기억에 상당히 반듯하고 수려했었다. 글씨는 단순히 글, 그 자체가 아니라 서화라는 예술의 범주가 있을 정도이니 두 성군은 글씨마저 예술적으로 아름답다는 것에 내가 왜 이리 흐뭇한지 모르겠다. 


사도세자에서 장헌세자로 / 장조 추상시호 옥인 / 1776년 (정조 즉위년) / 보물, 세계기록유산
사도세자를 왕과 같이 높이기 / 장조 추상존호 금인 / 1795 (정조19년) / 보물, 세계기록유산

정조는 그의 아버지 사도세자를 내내 마음에 두었다 즉위년부터 사도세자를 장헌세자로, 정조 19년엔 존호도 세자에서 장조로 높였다. 하여 처음엔 옥인으로 그 다음엔 금인으로 인장을 만들어 임금의 격식을 갖추었다.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 간 신하들이 아직 눈 시퍼렇게 뜨고 있을 것인데도 정조는 아버지를 왕으로 선포하고 선포한 글에 이 금인을 찍었을 것이다. 금인이 찍혔으니 왕인 것이라고 선언하듯이. 


글과 기록의 힘이며, 형식이 내용을 보완한다. 


<화성원행도> 최득현 김득신 등 7인 / 1795년 (정조19년)

조선이 기록의 나라라는 것은 이런 원행도를 통해서도 드러난다. 


차비대령 화원들이 이 그림을 그릴 때 거대한 역사의식이나 사명감이 있었겠지? 

그렇지 않고서야 이리 세세하고 꼼꼼한 그림이 몇백년을 걸쳐 내려오면서도 퀄리티가 손상되지 않을 수준으로 그릴 수 있겠나? 


리움에서 <환어행렬도> (김득신 외, 1795년) 를 본 적이 있는데 위 8폭 병풍의 7번째 폭과 거의 같다. 


설명판에는 이 병풍처럼 화면높이 151.8cm 정도의 대병은 궁중에 3건, 주요 담당자에게 13건이 보내지고, 현재 8폭 병풍으로 4건이 전해지고 있다고 하니 리움의 것은 이 중 일부인 가 보다. 


[참고사진] <환어행렬도> 김득신 외 1795년경 / 리움

같은 장면을 복사 수준으로 여러 개를 만들어 둔 경우를 본 것은 또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수요일은 저녁 9시까지 국중박이 여는 날이라 평일이지만 이 날은 꼭 이 전시를 보고 싶었다. 계획은 6시 반경 퇴근을 하면 6시 45분엔 국중박에 도착을 하니 2시간정도 보면 충분하겠다.. 였다. 그런데 원래 일이란 그런 것인 듯 광고주 컨펌이 늦어지고 처리할 일들이 계속 생겨 7시 50분이 되서야 그나마 일을 끊고 사무실을 나설 수 있었다. 고민이 됐다. 


가면 50여 분 밖에 못보는데 작은 전시라고 했으니 갈까.. 작아도 50분이면 쫄리는데 담에 갈까.. 담에 가려면 곧 또 출장이라 2주는 후에 와야 되는데...


근데 그날 하루가  좀 더 그지 같았다. 이 전시라도 못보면 가까스로 눌러 두었던 화난 감정이 다 튀어 올라 올 듯하여 나중에 다시 오는 한이 있더라도, 오늘 10분을 보더라도 보러 가자, 가서 삽살이만이라도 보자.. 싶어 간 전시였다. 


오길 잘했다, 보길 잘했다. 


미술은 역시 내 숨구멍이고, 오늘 또 남준이가 미치치 않기 위해 미술을 보고 자전거를 탄다는 말을 떠올렸다. 


고맙다, 남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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