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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술관옆산책로 Feb 20. 2024

내 앞에 놓인 내 인생의 모퉁이

3개월 휴직을 했다. 

이 회사를 다닌지 13년만이고, 두어번의 이직을 하면서 근로소득자로는 20여년이 된 참이다.   


그 20여년간 이직을 하는 사이사이 한번에 2주를 쉬었던 것이 가장 긴 휴식이었으니 이번에 나를 위한 꽤 긴 시간을 갖게 된 것이다. 


일하는 동안 좀 수월한 해도 있고 몹쓸 해도 있긴 했다만 작년은 그 동안의 피로가 누적된 것에 더해 코로나 이후 넘쳐나는 일을 기존의 반도 안되는 인원들이 해대느라 심적으로 육체적으로 번아웃이 왔다. 


"휴직을 하겠습니다..." 했더니 윗분들이 토를 달지 않고 "다녀오라" 했다. 회사의 제도 안에서 휴직의 사유가 타당하면 휴직이 불허되지 않기에 내 휴직에 브레이크가 걸릴 일은 없다 생각했지만서도 혹시라도 불편한 기색을 옅보이는 윗분들이 있다면 가는 기분 찜찜할 것이었는데, 다행이었다. 


설이 시작되기 전 마지막 퇴근을 하는 기분은 묘했다. 언젠가 회사를 그만 둘 날에 대한 연습을 한 기분이다. 지금은 3달후, 혹은 6개월 후 돌아올 것이지만  머지 않은 시간 후 이 회사를 정말 떠날 때 들 기분이 상상이 되었다. 


번아웃이 와서 쉴지언정 아직 회사에 대한 애정이 많음을 느낀다. 


두어 달 전 나를 잘 아는 윗분이 "너는 아직 일을 좋아하는 걸로 보여" 하셨었다. 힘들어서 못해먹겠다.. 소리를 달고 사는 동료, 선후배들처럼 그 소리를 나도 좀 해봤더니 돌아온 반응이다. "아니그든요!"같은 날선 반응이 나오지 않고 그냥 옅은 웃음이 났다. 내가 얼마나 힘든지 설득할 에너지도 없었고, 그럴 필요도 없었으며, 그냥 그 분 방식으로 나를 위로하는 말이었음을 잘 알아서다.  


내가 내 체력과 시간과 열정을 고갈시키며 달려온 날들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나는 최선을 다했고, 더 했고, 이제 쯤 그 관성에서 벗어나 다시 내 일, 또는 다른 내 일을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는 판단이 섰을 뿐이다.


내가 생각해도 신기할 만큼 나는 지금의 내 일에 미련이 없었다. 하고 싶은 프로젝트를 할 만큼 했고, 열심히 했고, 성과도 좋았다. 그래서 미련이 없다. 


일에 미련이 없으니 언젠가 할 회사를 그만 둘 결심은 조금 더 수월할 것이다.


설 전 잠시 안녕의 퇴근을 하면서 느낀 묘한 감정은 대부분 훌륭한 동료 선후배들과 좋은 시스템을 가지고 있는 회사에 대한 존중감이다. 직장인으로 이런 회사에서 이런 동료들과 함께였으니 퍽 운이 좋았다. 


그런 회사를 떠날 때, 아쉬움이 남지 않도록

좋은 기억은 잘 싸서 더 미래에 꺼내보며 기분 좋을 수 있게,

나쁜 기억은 또 잘 싸서 조금씩 흘려보낼 수 있게 

그런 준비를 지금부터 찬찬히 할 생각이다. 

나는 지금 내 인생의 모퉁이를 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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