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곤실레의 작품 위주로
처음 에곤실레의 그림을 대량으로 접한 건 일본의 도쿄도 미술관이었는데, 사진을 찍을 수 없는 미술관 정책 때문에 본 기억과 감정이 휘발되는 것을 부여잡느라 애를 먹었다. 보고도 내 것이 되지 못한 도둑 감상 같아서 내내 아쉬웠었다.
그러다 이렇게 세계 최대의 에곤실레 작품 소장 미술관에서 원껏 맘껏 그림들을 보게 되니 격세지감 같은 감정도 몰려오고...
그의 스타일에는 사람들마다 호불호가 있는데 동시대 최고의 화가였던 클림트가 실레를 보고 본인의 시대가 저물고 있음을 직감했 듯 그의 천재성에는 토를 달기 어렵다.
그럼에도 나는 호와 불호의 어중간한 어느 지점에서 어떤 스타일은 좋고 어떤 스타일은 부담스럽다는 것으로 내 선호를 정리했다.
일단은 에곤실레의 반항하는 이미지의 그림들은 좋고, 툭툭 튀어나오는 도발적 시선의 그림들엔 감탄하며, 경계를 넘은 듯한 그림들은 버거웠다가, 많은 시간이 지난 지금은 그의 풍경화들이 좋다.
도쿄에도 대여 나왔던 에곤실레를 대표하는 그림. 두번째 대면이다.
그를 유명하게 한 그림은 이 것은 아닐 진대 그를 대표하는 그림은 이 자화상일 것이다. 월리의 초상화와 나란히 걸려있다 (도쿄에서도 이랬나... 가물하다... 그니까 사진을 찍게 해줬어야지...) 대중들이 받아들이기에 딱 적합한 정도의 자화상이다.
첫번째 자화상과 마찬가지로 가장 많이 알려진 자화상 중 하나. 수채화 같은 느낌으로 실레의 그림 중 가장 산뜻하다. 종이에 블랙초크와 과슈를 가지고 그렸다.
자화상들은 비슷비슷한 시기에 다양한 앵글과 표현방식으로 그려졌다. 자기혐오와 자기애가 복잡하게 섞여 보인다.
우는 여자 뒤의 사람은 삐에로 같기도 악마같기도 그녀의 다른 내면 같기도 한 그림. 실레는 두 사람을 한 캔버스에 넣어 타자 같기도 그림 속 그 사람의 다른 모습같기도 한 구성을 많이 했다.
도쿄에서도 본 듯한 그림. 보통 엄마와 아이를 표현할 나오는 사랑가득 담긴 정서가 아닌 삶의 두려움과 공포를 이미 알아버린 다 큰 어른아이같은 아이와 감정이 읽힐 듯 말 듯한 엄마
이번에도 아이와 엄마의 사랑스러운 모습은 아니다. 게다가 이미 엄마는 죽어있다. 태 안의 아이는 아직 세상을 알수 없으나 그가 맞을 세상이 어떨지... 실레는 어머니에 대한 인식이 그다지 좋지 않았나.. 그의 개인적인 경험이 어머니를 대상화 하는 방식에서, 이후 여성과 연인을 대하는 방식에서도 나타나는 것인가
그 중 가장 평범하다면 평범한 그림이다.
1900년대 초반 이런 그림이 대중 앞에 섰다. 지금도 논쟁적일 듯 하다.
일반적 남녀로는 이상 할 것이 없지만 남성과 여성의 의상이 이들이 성직자임을 알려준다. 그들의 시선은 세상을 향하면서도 그들의 행위는 멈춤이 없다.
대단히 도발적인 그림
앞의 사람은 실레임이 분명한데 뒤의 사람도 그로 보인다. 뒤의 또다른 그는 생명이 소멸된 듯 하다.
실레는 죽음을 살았던 사람일까
그가 죽음에 대해 지속적으로 고민한 흔적의 그림들
예수의 변모 (Transfiguration of Jesus, 예수가 제자들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바꾼 사건) 사건을 가져와 실레식으로 재해석한 그림인 듯.
예수의 드러내심, 계시를 차용한 것일까
죽음과 삶을 그의 예술의 소재로 자주 사용한 이상 종교적, 기독교적 고뇌와 고민의 지점 또한 그의 예술의 소재가 되는 것은 자연스럽다.
실레의 이런 스타일의 그림 중 어두우면서도 서정적인 느낌이 드는 그림
실레의 여성편력이 그 자신의 결혼, 아이에 대한 애정, 집착과는 이율배반적인 면이 있더라도 그의 삶을 응원했다만 그의 삶은 유난히 짧았다
그는 1918년 28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당시 전세계의 5천만 인구를 날린 스페인 독감이 원인이다. 그래서 1918에 작업된 위 세 작품은 미완성작이다 (한 번에 여러 작품을 그렸구나)
미완성작인 채로 그것이 완성작이 된 작품은 소재가 무엇이건 묘한 여운이 남는다.
나의 실레에 대한 여정은 결국 이런 풍경화나 정물화에 와서야 쉼을 얻었다. 그렇게 깊고 어두운 내면을 그려내는 작가임에도 자연과 마을, 사물을 바라보는 눈은 깊어서이다.
이 글을 굳이 굳이 쓰는 것도 실레의 외설적이고 포르노적인 그림으로만 그를 바라보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서 였을 수 있다.
자연도 이렇게 메마르게 표현하지만 그것이 또 새로운 사람이다
단정하게 쌓아올려진 책들은 묘한 안정감을 주며
이런 집과 마을을 표현하는 방식은 감탄을 금치 못한다.
특히 원근을 무시하고 모든 시점을 관람객의 앞으로 끌어와 2D같은 느낌이 들게 하는 그림이 좋다. 좁은 캔버스 안에 다닥다닥 사물을 배치하고도 복잡하다기 보다 정교한 밀도감으로 풍부한 감상을 할 수 있게 해주는 것도 좋다.
색감도 더할 나위 없다. 지붕의 작은 파티클 하나하나에 담긴 무수한 색채감이나 창문의 오밀조밀함도 좋다. 한 그림안에 지붕이나 창문처럼 작고 다채로운 색감과 벽면이나 하늘처럼 크게크게 비워 놓은 공간이 이렇게 자연스럽게 대비되다니...
직선의 그림들만 쭉 보다가 이렇게 그림의 좌우를 부드럽게 나누는 곡선을 보는 즐거움은 또 어떠한가
그리고 실레의 삼촌이자 가디언을 그린 그림. 그가 이렇게 정상적(?)인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는 사실에 묘하게 안도되는 순간이다. 클림트가 슈베르트를 그린 그림과 자연스럽게 중첩되었다.
레오폴트는 빈의 자랑으로 삼기에 충분한 미술관이다. 작품들도 오스트리아의 국보급이자 전세계의 자부심인 클림트와 에곤실레의 주요작품들을 두루 가지고 있고 전시방식, 운영방식 모두 훌륭하다.
빈미술사 박물관에는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카페가 있다. 빈미술사를 이틀동안 가면서 이틀 내내 카페에 들러 커피를 마셨었는데 레오폴트도 광장에 이리 아름다운 유럽식 카페가 있으니 다음엔 꼭 이 곳에서 맛있는 커피한잔을 즐기는 여유를 가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