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우리츠하위스 미술관은 페르메이르의 <진주목걸이를 한 소녀>를 보기위해 갔었는데 네덜란드가 본국이자 다작 작가인 렘브란트의 작품이 많이 전시되 있는 것은 이상할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 <튈프교수의 해부학 수업> 이 있는 것은 몰랐어서 '내가 너무 페르메이르만 염두에 두고 왔구나...' 렘브란트옹께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이 그림을 그릴 당시 렘브란트는 고작 25세.
원래는 암스테르담 외과의들로 부터 초상화 의뢰를 받은 것이고 그 설정이 튈프교수의 해부학 수업인거라 등장하는 사람들의 얼굴과 다양한 표정들이 잘 드러나게 그려졌다.
죽은 시체를 두고 해부학 수업을 하는 장면이니 소재 자체도 흥미를 끌거니와 젊은 천재화가의 등장을 말해주듯 작품의 완성도 역시 뛰어나다. 젊은 렘브란트는 등장인물의 시선처리를 다양하게 함으로서 그림에 역동성을 주었고 특히 튈프교수 왼쪽 옆의 인물은 재미있는 표정과 함께 관객쪽으로 시선을 주고 있어 눈을 마주친 나는 무언가 말을 걸어야 될 것 같았다.
빛과 어둠의 적절한 사용도 그림의 깊이감과 몰입감을 한층 높였다.
24세에 피에타를 완성한 미켈란젤로가 떠올랐다.
빛을 활용함에 흑백의 완벽한 대비도 아름답지만 이렇게 형형하게 대상을 비추는 방식도 아름답다.
시므온이 노래하는 장면에서 모든 빛을 끌어 당겨 주인공을 환하게 비추는 것으로 종교적이고 영적인 어떤 모먼트를 달성한 듯 했다.
너무 많이 접하여 새로울 것 없는 자화상일지라도 새로움이 작품을 감상하는 가장 큰 이유가 아니기에 볼 때마다 거스를 수 없는 어떤 힘이 그의 얼굴을 오래도록 들여다 보고, 생각하고, 대화하게 한다. 특히 노년의 렘브란트 자화상은 보는 이의 거울 같은 느낌이 들게 해 그 보다 젊든 늙든 이미 저 나이를 지났든 다가오든 렘브란트의 시간을 함께 느끼고 나의 시간을 그의 얼굴에 대비시키게 만든다.
오묘한 힘이다.
본인의 자화상을 잘 그리듯 다른 이도 렘브란트답게 그린다. 성경이나 신화속 인물이어서 그 사람을 보지 않았을지라도 그의 인물표현은 압도적이다.
대상의 미적 아름다움보다 내면이 드러나도록 하는 그의 마법은 내가 만일 모델로 그 앞에 서게 되면 내 모든 면을 꿰뚫어 볼 것 같아 움츠러 들 듯도 하다.
사울왕과 다윗
후에 왕이 되는 다윗인데 지금 그림에선 아주 왜소하게 표현되어 있다.
거친 붓질도 좋고 명암도 좋고 이국적 정서가 베어나오는 것도 좋았다.
아프리카인을 그릴 때의 렘브란트는 조금 더 익살스럽고 부드럽다. 앞의 사람은 행색이 노예는 아닌 듯 수준급이고 표정도 밝다. 그에게 턱을 기댄 뒷 사람의 어두운 표정과는 사뭇 다르다.
두 사람의 표정이 대비가 되면서 재미있어진 그림
라익스 뮤지엄에서 대대적인 프란스 할스 회고전을 보고 왔지만 이렇게 또 다른 미술관에서 그의 작품을 대하니 반갑고 좋다.
웃음없는 초상화가 생소하긴 하다만 오늘도 미소짓게 하는 프란스 할스의 초상화들
미술관들에서 이런 스타일의 그림을 만나면 거의 대 피터르 브뤼헐이고 아주 적은 확률로 그의 아들들인데, 브뤼헐 가를 제하고 나면 또 아주 가끔 아베르캄프를 만나게 된다.
이 그림이 아베르캄프
브뤼헐 보다 조금더 경쾌한 구성과 색감을 갖는다. 소재도 브뤼헐은 종교적인 것도 시대적인 것도 많이 택해 무게감 있는 거장의 느낌인데 내가 마주한 아베르캄프는 이런 류의 가벼운 풍속화를 주로 그렸던 듯 하고
'As the Old Sing, So Pipe the Young'
나이든 사람들이 노래를 하면 젊은이들은 파이프를 탄다? 파이프를 문다 (= 담배를 피다)?
설명판은 나쁜 본보기는 나쁜 행동을 낳는다는 의미의 그들 속담이라고 한다.
그러고 보니 얀 스테인의 왁자한 그림 속엔 한 여성/엄마는 술을 높이 쳐 들고, 남자는 아이에게 담배를 가르치고 있다. 담배를 가르치고 있는 것도 그 상황에 간난쟁이가 있는 것도 지금의 시선에선 불편하긴 하다만 내 어릴 적, 실내 어디건 남자 어른들이 담배를 피던 걸 생각하면 1600년대야 말해 뭐해
그림 속의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하등 좋은 영향을 줄 것 같지 않다. 알기론 이런 그림들은 이런 행동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적 의미를 주기 위해 당시 집안에 걸고 반면교사로 삼았다.
교훈적 의미의 풍속화인건데 그런 의미를 떨쳐버리고 보더라도 그림속의 흥겨움과 에너지, 사람들과의 관계성 등이 잘 드러난 훌륭한 그림이다.
이번에도 각종 가금류들이 난무한 마당의 왁자한 모습
제목은 여인의 초상화인데 알려지기는 각종 조류들의 마당이라니 알려진 제목에 나도 한표
Maria라는 사람은 그림 중앙에서 빛을 환하게 받고 있는 소녀겠지?
많은 것들이 비교적 어두운 가운데 이 소녀만큼은 마당의 소란과는 별개로 지금 초상화가 그려지고 있는 것을 아는 듯 양에 우유를 주는 자세를 부러 취해주고 있는 것 같다. 주위를 모두 지우고 나면 아주 그럴 듯한 초상화.
얀 스테인은 이런류의 그림을 그리는구나...
빛을 어찌나 잘 쓰는지 실물의 볼륨감, 입체감이 가히 어떤 경지에 이른 것 같다.
루벤스는 브뤼셀 왕립미술관에서 그의 어마어마한 위상을 봤는데 (포스팅 전) 마우리츠하위스에서 작지만 이렇코롬 훌륭한 작품을 마주하니 다시 한번 경탄을 금치 못하겠다. 그림인 것은 확실한데 그림 밖으로 주인공 두명이 튀어 나올 것 처럼 생기가 있으니 말이다.
설명판은 루벤스가 이탈리아에 있을 때 카라바조의 영향을 받은 듯하다 전한다.
루벤스는 이 그림은 팔지 않고 스스로 가지고 있었는데 아마도 제자들을 가르치기 위한 목적이었던 듯하다고
성모승천을 그리기 위한 모델링
루벤스는 성모승천을 포함한 성경의 극적인 장면을 초대형 캔버스에 여러편 남겼는데 그런 대작들 이전에 이렇게 소규모로 연습을 거쳤나 보다.
브뤼셀 왕립미술관엔 워낙 큰 대작들을 전시해 두어 고개를 위로 들고 아래로 내리며 봤는데 이리 작은 그림으론 한눈에 다 담기고 좋으네
한스 홀바인의 독특한 배경처리 법과 다소 경직된 듯하나 위엄있게 인물을 표현하는 방식이 잘 드러난 초상화
모피로 내피를 두른 겉옷과 붉은 소매의 이너가 초상화의 인물이 대단한 가문의 사람임을 단적으로 드러내 주고 손에 앉힌 독수리로 말미암아 그 위엄이 극에 달한다. 독수리(꿩?)가 이 인물 가문의 상징새 일 수도 있고
미술관에 이런 작품이 전시되 있으면 실제 튀어나온 선반에 새조각을 올려놓은 듯한 착각에 빠진다.
기분 좋은 착각 속에 잠시 쉬어가는 짬을 냈다
풍성한 과실과 탐스러운 꽃들로 보고 있는 것 자체로 기분 좋아지는 그림. 화려함과 디테일은 또 다른 재미를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