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에 이어>
여기부턴 <<관동명승첩>>
겸재가 강원도와 경북일대를 절친 사천 이병연이 삼척부사로 있을 때 함께 여행하며 사생한 후 10여년이 지나 완성한 11점의 화첩이다.
전시 전반에 너무 작품이 많아 사진을 띄엄띄엄 찍었는데 그 시점의 나는 <관동명승첩> 11점은 다 찍었더라...ㅎ
겸재는 총석정 해산정 삼일호 등 명승지들을 한폭만 그린 것이 아니라 <풍악도첩> <관동명승첩> <해악전신첩> 등에 겹쳐 등장했다. 그 만큼 볼 때마다 갈 때마다 또는 한 번 봤어도 마음에 담고 그리고 또 그린 듯 했다. 그럴 때마다 조금씩 구도와 화풍에 차이가 나는 것이 겸재의 매력이다.
천불암 삼일호, 같은 곳은 풍광으로도 보고 싶었다.
<<해악전신첩>>은 그림과 글이 좌우 같이 있었는데 글을 알수 없어 조금 궁금하면서도 그저 현대의 나 같은 사람은 그림을 보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해악전신첩>>
정선 필 <<해악전신첩>>은 정선(鄭敾, 1676-1759) 특유의 다양한 필묵법과 옅은 청록색의 선염법이 고른 수준으로 능숙하게 구사되어 금강산의 진면모를 유감없이 드러낸 대표작이다. 정선이 72세가 되는 1747년에 그린 만년작으로, 노년의 무르익은 필치가 집약되어 있어서 금강산 그림 중에서 독보적인 위상을 차지하고 있다. 총 38폭 중 산수화가 21폭, 나머지는 제목, 서문, 시문, 발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림마다 당대의 명사인 김창흡(金昌翕, 1653-1722)과 이병연(李秉淵, 1671-1751)의 시가 수록되어 있고 장첩 경위를 알 수 있는 서발문까지 갖추어진 화첩으로서 완전성 면에서도 가치를 부여할만하다.
해악전신첩은 작품이 더 방대하고 크기도 다양하여 한점씩 떼서 독립 전시도 하다보니 한번에 묶어 이 파트에 넣지를 않았다. 1편의 <금강전도>도 <<해악전신첩>>의 일부다.
그림과 글을 함께 보니 글을 모를지라도 미적으로 구성적으로 훨씬 풍부한 예술적 가치가 느껴졌다.
<<장동팔경첩>> 전시 모습
<<장동팔경첩>>은 각각의 족자로 독립적으로 전시되 있어 하나씩 보기에 좋았다.
다음은 <<경교명승첩>> 중 익숙한 2곳
이곳은 <압구정>과 <송파진>이다. <압구정>은 압구정 현대아파트 부근 톡 튀어나온 일대를 그린 듯해서 친근하니 좋고 <송파진> 역시 한강을 끼고 있는 잠실일대를 타임머신을 타고 가보는 듯하여 재미지다.
겸재는 탁월한 조선을 대표하는 문인화가이다.
화첩도 많이 남겼지만 아래처럼 한편 한편 남긴 그림들은 그림의 상황과 스토리가 풍부하여 당시를 이해하게도, 상상하게도 만들어준다. 미술책들에서 본 그림들이 즐비하게 전시되 있던 이번 호암의 전시, 다시한번 감탄스러웠다.
위 네점은 모두 간송에서 공수해온 보물들이다.
이제껏 봐 온 각각의 화첩들도 대단하지만 책으로 묶여있어 소품들이 많은 것 대비 이 파트의 작품들은 하나하나가 대작이다.
여산의 초당을 그린 <여산초당>, 절 앞에서 우비를 벗는다는 <사문탈사>, 척재가 시를 짓는다는 <척재제시>, 어부와 나뭇꾼이 묻고 답한다는 <어초문답>, 고산에서 매화를 즐긴다는 <고산상매>
기가 막힌 그림들이다.
사알짝씩 색이 들어가 그림이 더 화사하고 풍부해졌다.
연못 속 정자가 하나씩 있는 것만 보다가 이리 두개의 작은 섬에 하나씩 들어앉은 두채의 정자가 인상적인 <쌍도정>
지방 어딘가에 이러한 <쌍도정>의 모습을 복원해둔 사진을 보고 식겁한 적이 있다. 진경산수를 그리던 겸재가 그렸으니 18세기에도 이 그림보다 못하지 않을 것인데 이를 복원해둔 현대의 결과물이 너무나 조잡하고 성의가 없어 헛웃음이 났다.
제발, 잘하자!
지금 과 똑 닮은 <도산서원>과 <해인사>
도산서원과 해인사를 가보았는데 정말 저리 생겼다. 도산서원은 강자락에 자리 잡았는데 아마 반대편 강가에서 보면 딱 저런 모습일 것이다.
겸재는 진경산수의 대가답게 현실을 잘 고증하면서 그 나름의 해석과 기교가 들어간 그림을 성실하게 많이도 남겨 후대의 우리들이 그 그림을 즐기기에 거리감이 덜하다.
매일매일 성실히 그림을 그렸을 정선
후대로서 존경과 감사가 마음속에 한가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