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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술관옆산책로 Nov 06. 2023

베를린 구 국립미술관 #2_아놀드 뵈클린 <죽음의 섬>

죽음이 이토록 아름다울 수 있다면...

그림을 보다 보면 작가가 누구인지 어떤 배경이 있는건지 모르고도 그냥 꽂히는 그림들이 있다.  


미적으로 대단히 아름다워서도

표현하고 싶은 함의가 훌륭해서도

작업방식이 독특해서도

내 안의 뭔가를 건드려서도 그렇다.


이 작가의 이 작품을 처음 책으로 보았을 때  그저 놀랬다.


죽음이, 죽음의 한 부분이 그림으로 이렇게도 표현되는 구나


세련되고 (이렇게 표현할 수 밖에 없다)  

적막하고

음습한

끝을 알수 없을 듯한 죽음에 이르는 길  


죽음이라는 대서사의 끝이 아니라 시작을 보여주는 듯한 이 그림


Arnold Bocklin, 아놀드 뵈클린의 <Isle of the Dead, 죽음의 섬>


카스파르 다음으로 이 작품이 내가 베를린 구 국립미술관에 가는 두번째 이유이다.


Arnold Bocklin <The Isle of the Dead> 18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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굉.장.하.다.


책에서 이 그림을 처음 접했을 때는 작은 책장 안에서 그림을 보느라 디테일들을 볼 수 없어 갑갑했는데 그 갑갑함이 내 눈앞에서 완벽하게 날라갔다.


나는 어떤 제재도 없이 그림앞 10cm까지 갈 수 있었고, 밖에서 부터 안쪽으로 서서히 그림을 감상했다.


하늘은 어둡지만 분명 낮이고

섬을 둘러싼 바위는 거대한 묘비처럼도 느껴지는데

빛을 받아 오히려 은은하게 반짝이기까지 하다.


그 안쪽에 바위섬을 넘겨버린 거대한 사이프러스 나무가

검정보다 더 어두운 짙은 초록그늘을 만들고 있고 그 앞에 죽음을 환영하는 듯한 환한 바위문이 활짝 열려있다.


이제 곧 도착할 섬 입구에는 죽은자에 대한 애도의 마음과 순수성을 강조하듯 흰 옷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칭칭 동여맨 미망인이 (미이라의 모습 같기도) 남편의 시신을 죽음의 섬에 헌납하는 듯한 모습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제 곧 남편의 관은 죽음의 섬에 도달할 것이고 끝을 알 수 없는 죽음의 여정이 이 섬에서 시작될 것이다.


죽음의 의식이 이리 준비된 것이면 그 죽음은 오히려 선택받은 축복인 양 보인다.   


죽음이 이처럼 서정적이고 아름다운데 동시에 대단히 위압적이고 음습하게 다가오는 독특하게 매력적이고 묘한 작품이다.



<Isle of the Dead>

이 작품은 시리즈 물로 총 5점이 그려졌다.


처음엔 한 젊은 미망인이 남편의 기일을 기념해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그림을 의뢰한 것이 시작이었으며 이 작품이 성공하면서 조금씩 다르지만 비슷한 스타일로 총 5점이 그려졌다.


첫 작품은 현재 바젤에, 두번째 작품은 뉴욕 메트로폴리탄에, 세번째인 이 작품은 2차대전 당시 미술광인 히틀러가 잠시 보유했다가 패전 후 국가에 헌납된 것을 현재 베를린이 보유한 것이고, 네번째는 유실, 다섯번째는 라이프치히에 있다.


그림에 대한 해석은 가지 각색이다. 정답은 없고 각자가 그림을 보고 스스로 이해하고 해석하면 될 일이다.


여러 해석의 여지를 주고 그 해석을 후대의 사람들이, 비평가들이 자발적이고 적극적으로, 다양하게 할 수록 작품은 풍부해지며 이러한 내러티브들이 작품에 생명력을 불어 넣는다.


후대의 사람들이 기꺼이 그러고 있기에 이 아놀드 뵈클린의 <죽음의 섬>은 대단히 위대하고 완벽한 작품이다.  


[참고자료] <Isle of the Dead> 1880 / Kunstmuseum, 바젤 (소스: 구글)


[참고자료] <Isle of the Dead> 1880 / 뉴욕 메트로폴리탄 뮤지엄 (소스: 구글)



<죽음의 섬> 오른쪽 바로 옆에는 뵈클린의 다른 작품이 함께 전시되어 있다.


<Ocean Breakers (The Sound)>


두 작품이 전달하는 정서는 비슷하다.


그래서 보는 이로 하여금 이 두 작품 앞에서 침묵하게 하고 사색하게 하며 경외감과 공포심조차 들게 한다.


<Ocean Breakers (The Sound)> 1879


바다 위에서 사람들을 홀리는사이렌이나, 키르케 같은 마녀를 표현한 그림은 많은데 이 그림도 그를 표현한 것인지 확실치는 않지만 그 비슷한 주제를 드러냈을 것이다.


마녀일 지라도 인간의 형상을 할 진데 진한 바이올렛의 무드가 전반적으로 농염하고 치명적이며 뇌쇄적이다.


저 마녀에 걸리면 스스로 목숨을 바치게 될 것이다.



<Isle of the Dead>와 <The Ocean Breakers>는 나란히 걸려있다


이 두 작품만으로도 이미 흥분해서 왼쪽의 초상화가 아놀드 뵈클린의 자화상인 걸 그 때는 알지 못했다.


저렇게 위대한 작품들이 나란히 걸렸을 때는 이유가 있었을 것인데 원작자를 옆에 두고 미지의 아놀드를 칭송하다 나왔으니...


작품을 보기 전 그 작품에 대해 미리 찾아 봐서 은연 중에 감상에 바이어스가 끼는 것을 싫어하는 내 감상방식이 이번엔 약간 손해를 보게 했다.


그래도 뭐, 이렇게 세 작품을 목적하지 않고도 나란히 찍어온 구도 센스는 칭찬해...ㅎ


[참고자료] 아놀드 뵈클린 <Self-Portrait with the Death Playing the Fiddle> 1872


한가지 아쉬운 것은 아놀드 뵈클린의 작품은 아주 작은방 한 면에 다른 작품들과 함께 걸려있다는 것이다.  


세 작품이 나란히 걸려있는 정도의 예우는 있었지만

이 작품들의 감상에 몰입이 되도록 하는 특별한 장치들은 없었다.


우리의 리움이나 호림이라면 좁고 깊은 방 끝에 죽음의 섬을 걸고 그 길을 걸어 들어가면서 이미 작품의 감상이 시작되게 했을 것이다. 그 길을 천천히 걸어 나도 죽음의 길로 한발 한발 들어서며 종국에 그 끝에 다다라 작품을 마주했을 때는 그림 속의 <죽음의 섬>이 아니라 현실에서 <죽음의 섬> 앞에 선 것 같은 느낌이 들도록 했을 것이다.  


방은 검게 칠하고 조명은 간접조명을 하되 그림에 오롯이 집중하게 하여  그림과 나 사이에 어둠밖에 없는 공간을 만들어 준다면 그림에 더욱 몰입되는 위대한 경험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 현실은 작품의 소재나 주제와는 다소 먼 듯한 화이트 벽에 조명도 직접 조명을 쏴서 빛반사가 있는 환경은 감상자에게도 그림의 수명을 위해서도 많이 아쉬웠다.


메트로폴리탄에 2번째 그림이 있다 하니 언젠가 뉴욕출장이 잡히면 다시 한번 가봐야 겠다.


두 뮤지엄의 전시기법을 비교해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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