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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술관옆산책로 Nov 02. 2023

장욱진 회고전: 가장 진지한 고백 #1_국립현대미술관

국립현대 덕수궁에서 장욱진 전이 한창이다. 


그동안 많이 봐왔으니 새로운 그림이 있겠나... 싶어 건너뛰려다 <자화상>이 전시된다 그래서 다녀왔다 


그리고 건너뛰었으면 큰일 날 뻔한 

장욱진의 모든 것이 총망라된 전시였고 

봤던 작품들도 다시 보니 좋았으며 

안봤던 작품도 너무 많았고 

새로운 스타일의 작품도 있었다. 


대가들은 섣불리 내가 안다.. 고 하면 안되는 거였다 

그리고 앞으로 5년 후 이번과 똑같은 작품으로 같은 전시를 한대도 나는 다시 올 것 같다 



가장 진지한 고백: 장욱진 회고전 

23.9.14 ~ 24.2.12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보고 싶었던 장욱진의 <자화상>


일단 크기에 놀랬다 


그래도 가로 세로 30 X 50은 될거리 생각한 그림이 엽서만하다. 엽서로 씌였다면 엽서화라는 장르(이런 장르가 있는 지 모르겠다만...)로 분류했될 법한 크기다. 

<자화상> 1951
<자화상> 1951

가을 추수를 앞둔 것 같은 노란 들판에 한껏 차려입은 화가가 한마리의 동네 개와 네마리 까치의 호위를 받으며 돌아오고 있다.  


그림이 그려진 1951년은 한국전이 한창이던 시절이었는데 부산에서 피난살이 하며 종군화가로 복무 중 잠시 고향에 들를 때의 모습이라고 한다. 


얼굴만 크게, 또는 가슴부터 크게...


그런 자화상에 익숙하다가 이렇게 풍경화 같은 자화상을 마주하니 작가가 풍경 속에 스스로를 넣고 그 풍경과 함께 화가를 봐주기를 바란 마음이 있을 듯하여 한참을 바라봤다.


전쟁중에 그래도 고향은 돌아가 위안을 받을 수 있는 곳이라 돌아오는 발걸음은 가볍고 표정은 밝은데 화가 자신이 그림 밖의 화가 본인을 쳐다 보는 것 같은 시선을 지금 그림 밖의 내가 맞게 되니 대가와 나 사이의 70년을 건너 뛴 눈 맞춤이라 마냥 설레었다 


전쟁이지만 본인이 가지고 있는 가장 좋은 옷을 차려 입고 

내가 돌아온 것이 좋은 일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 

그 마음을 투영하듯 좋은 소식을 가져다 주는 까치와 

전쟁이라도 나락은 패고 풍요로운 곡식이 있어 

배 고플 사람들이 조금은 풍족하게 먹고 배불렀으면 하는 마음,


그런 마음들이 읽혔다. 


<공기놀이> 1938, 캔버스에 유화

양정고보 5학년 시절, 조선일보 주최의 미술전람회에 출품해 특선과 사장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캔버스에 유화인데  수묵화의 느낌이 난다. 선들을 그리지 않고 면으로 사물을 구분해서 인듯한데 전반적으로 부드럽고 고즈넉하다. 


나에게도 동생을 업는 풍경을 빼면 동네 어귀에서 신나게 놀던 언니 오빠 친구 동생들을 떠올리게 하는 그림이다.


고등학생 때부터 이리 뛰어났다.  


<소녀> 1939, 캔버스에 유화물감

<공기놀이>와 비슷한 시기에 그린 비슷한 느낌의 그림이다. 


장욱진은 소녀들은 과장되게 어리고 보호해야 할 대상으로 표현하지 않고 그 시대 아이들이 짊어진 어른의 삶을 사는 어른아이의 얼굴로 그렸다 


고향 선산의 산지기 딸을 모델로 그린 이 그림은 도쿄 제국미술대학으로 유학을 가서 본격적 미술 수업을 받긴 전 작품이라는데 그의 그림 스타일은 바뀔 지라도 그가 미술을 통해 전달하고 싶은 정서는 이때부터 이미 확고한 듯하다.  


<공기놀이>도 <소녀>도 이건희컬렉선에서 봤었는데, 봤어도 오늘 또 글로 남기어 한번이라도 더 보고 싶은 것은 그림이 말을 얹지 않아도 될 정도로 너무 훌륭하고 내 맘 저 속에 있는 어떤 따뜻한 정서를 건드리기 때문이다. 


이번 전시에서 한점 그림을 갖을 수 있다면 나는 이 <소녀>를 선택할 것 같다.  


참고로 이 작품 뒷면엔 내가 이건희컬렉션에서 그 때도 단 한점을 고르라면 "이거!!" 라고 골랐던 <나룻배>가 그려져 있다 


앞뒤로 정말 훌륭한 그림!!


[참고자료] 장욱진의 <나룻배>


장욱진선생이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스타일로 그린 작품들 

<강> 1987
<길> 1983
<도인> 1988

유유자적하는 <강>과 경쾌하고 따뜻한 <길>의 모습, 그리고 김정희의 <세한도>를 닮았다고 느껴진 <도인>이라는 작품은 장욱진 말년의 인장같은 그림들이다. 


군더더기 없이 심플하고 아름다운 그림들이다 


<거목> / <고목> 1954

최근 김태리의 드라마 <악귀> 때문에 이렇게 가지가 많이 달린 나무들을 보면 괴기스러움이 먼저 느껴지긴 한다. 


이 그림이 장욱진선생의 그림이 아니었다면 선택하지 않았을 듯도 한데 장선생의 작품이어서, 그의 스타일과는 다소 벌어진 느낌이어서 기록해 둔다. 


<월목 (月木)> / <반월목>

나무와 반달의 모습 


나무는 한자로 나무 '목(木)'자를 쓴 것이 그대로 그림 속의 나무가 되었다. 한자가 상형문자에서 시작된 것을 생각하면 신기할 일도 아닌데 오랜만에 '맞아 그랬지...' 하며 재미있게 본 그림 


이런걸 '서화동원(書畵同源)'이라고 하면 되겠다. 

그림같은 글씨, 글씨같은 그림이니 말이다. 


<사람> 1962

사람들 극대로 단순화해 그린 그림 


장욱진이 종종 표현하는 아이들의 앉은 모습도 이런 단순화하는 과정에서 나왔을 것이다. 나무나 사람이나 장욱진이 표현을 하니 이렇게 심플한데 모든 것을 다 담고 있는 심오한 느낌이 난다. 


<아이> / <인생 (인물)> 1972

위위의 <사람>이 글로 치자면 정자체였다면 위의 <아이>는 흘림체 같다. 제목은 <아이>이기도 <인생>이기도 <인물>이기도 했다. 


장욱진의 세계에서 아이와 어른은 차이가 없고 사람은 곧 인물이고 인생이다. 


화가의 손자가 태어났을 때의 기쁨을 표현한 것이라니 시작은 아이일 것인데 결국은 인생인 그림 


이 그림이 장욱진의 고향인 연기군(지금의 세종시) 기념탑비 맨 아랫단에 새겨진 그림이 되었다. 탑비이자 묘비가 그렇게 아름다운 건 장욱진선생의 묘비를 능가할 것이 없을 것이다. 

[참고자료] 장욱진선생의 기념탑비 / 맨 아랫단에 <아이>가, 가장 위엔 동아일보에 선생이 마지막으로 기고한 신년축화 속 <까치>를 넣은 것으로 기억한다. 이 탑비는 장욱진선생의 제자인 조각가 최종태 선생이 만들었다. <나는 심플하다>라는 책에 보면 이 기념탑비에 대해 그들의 스토리가 재밌게 나와있다. 


<가족> 1955

위 <가족>그림과 아래 <가족도>는 나란히 암실같은 공간에 어둡게 전시되 있다 (남준이도 이 그림을 인스스에 올렸었다)


벽돌크기의 아주 작은 그림인데 아내 없이 아이셋과 화가만 넣어 그린 유일한 그림이다. 


1964년 반도호텔에서 열린 장욱진 최초의 개인전에 출품된 작품이라 그가 이 그림을 얼마나 아끼는지 알 수 있는데 당시 일본인 사업가가 구매해 행방을 알수 없다가 이번 전시를 준비하면서 극적으로 발굴되 전시 되었다 한다.  


캔버스의 질감마저 작품의 일부로 활용할 정도로 가벼운 그림을 즐기는 장욱진이 두껍게 발라 그려냄으로 화풍이 잠시 바뀌었었나.. 생각되는 작품 


<가족도> 1972


위 위의 <가족>그림을 거의 모사한 <가족도>라는 그림으로 <가족>보다 그림의 요소나 표현의 방식이 상당히 간소화 되었다. 


1972년 그림에서 20여년이 훌쩍 지나 아이들은 이미 다 자랐을 것인데 여전히 작은 아이들로 오종종하게 표현해  낸 것이 그 시절에 대한 그리움이자 향수였나.. 싶어 함께 그 마음을 더듬어 갔다. 


<눈> 1964

장욱진 전시에서 본게 아니라면 강요배의 초기 작품인가.. 생각했을 정도로 그의 스타일이 전혀 안 들어간 작품.


장욱진을 추상화가라고 할때 '그치, 구상은 아니지...' 하다가도, 그래서 '추상이라고?' 하면 그래도 갸우뚱해지는 부분이 있는데 이 작품은 그를 추상화가라 할 때 토를 달 수는 없을 것이라는 점에서 그를 추상화가로 분류하는 것에 조금 더 동의하는 쪽으로 마음이 한발짝 움직였다. 


<여인좌상> 1963 / 회벽에 유화물감

한국의 프레스코화인건가

회벽에 유화물감을 활용해 <여인좌상>을 그렸다. 


스타일로도 소재로도 생소하여 저장 


초기의 장선생도 여러 시도들을 한 것이구나  

그 시도들이 어느 한 지점에 머물러 지금 우리가 익숙하고 사랑하는 장욱진만의 단순하고 따뜻한 정서를 전달하는 스타일이 되었구나 




여기서 부턴 장욱진의 도자를 위주로 글을 쓴다. 


장욱진선생이 도자에 그림을 남겼던 건 이번에 처음 알았는데 김환기선생처럼 달항아리를 사랑해 달항아리를 그림의 소재로 사용한 것과는 다르게 장욱진선생은 질박한 도자들에 그의 정겨운 그림들을 그려 넣음으로서 세상에 없는 아름다운 도자작품을 탄생시켰다.

<무제> 1977 / 분청에 귀얄, 음각 / 윤광조 도자
<무제> 1977 / 분청에 귀얄, 음각 / 윤광조 도자

귀얄이라는 것을 찾아봤다


귀얄 

풀이나 옻을 칠할 때에 쓰는 솔의 하나로 털의 종류는 주로 돼지털이나 말총 등을 사용하며, 이를 넓적하게 묶어 만듬 

대한건축학회 건축용어사전


반지르르하게 유약을 발라 그대로 곱게 구워진 도자에 익숙하다 귀얄이라는 다소 거칠고 질박한 방식으로 만들어진 도자를 보니 단박에 정이 가버렸다. 


장선생도 당신과 닮은 것을 참 잘도 찾으시는 군요...


귀얄로 담박하게 만들어낸 도자에, 그림은 장욱진선생 그대로이니 이 담백한 작품을 집에 들이고 싶어진다. 


<나무와 까치> 1983 / 백자에 청화 / 노덕주 도자
<무제 - 가족> 1978 / 백자에 청화 / 신상호 도자

선생은 도자에도 가족을 입혔다. 


선생은 아니라고 할 수도 '당연하지'라고 할수도 있는데 그림속 남편이나 아비, 노인의 얼굴은 참으로 장선생을 닮았다 


<무제 - 용> / 연도 미상 / 분청에 철화

이번엔 철화로 그림을 그렸다. 


철은 구워지고 나면 갈색이 되는데 그래서 청화보다 탁한 느낌이 들긴 하나 이것이 또 남성적이기도하고 땅을 닮은 것 같기도 하고 그러하다. 


눈동자 두알을 그려 놓고 용이라니

과장과 뻥이 심하시오... 


라고 동시대 동년배 작가가 귀여운 타박을 줄법한 그림이다 (저 아님). 


탁월하다. 


<무제- 기원> 분청에 귀얄 / 철화 / 윤광조 도자

여러 도자 장이들과 작품을 했을 진데 나는 윤광조 스타일의 귀얄 작품이 좋은 것 같다. 거칠지만 담박하고 미완인듯 아닌 듯 그대로 자연스럽다.


아이가 춤을 추는 듯한 단순한 그림이 귀얄기법 때문에 신비로워졌다. 


<무제> 연도미상 / 분청에 귀얄, 먹  / 윤광조 도자

앞구르고 뒤구르고 봐도 장욱진 선생의 작품 


귀여운 아이인데 술병에 들어 앉으니 도인처럼 보인다. 


허긴 장선생의 아이는 어른같고 도인같고 그러하지 


윤광조 <연적> 1976, 분청에 귀얄, 음각


1970년대 미술계에서는 화가들이 도자에 그림을 그려 넣는 작업이 하나의 유행이었다. 장욱진 역시 안동오, 윤광조, 신상호 등의 도예가들과 함께 협업하며 분청이나 백자에 음각, 청화, 철화 등으로 그림을 그려 여러 점의 도자기 그림을 남겼다. 1978년 2월 장욱진의 이름을 건 도화전이 열렸는데 당시 30대의 젊은 도예가였던 윤광조와 함께한 작업이었다. 윤광조가 귀얄로 덧칠한 분청자의 겉면에 장욱진이 음각 혹은 철화로 그림을 그렸다. 장욱진이 타계전까지 화구로 사용한 연적이 바로 전시된 윤광조의 작품이다.  

윤광조 <연적> 설명판에서 


너무 작고 귀엽잖아!!


오늘 한 점의 도자를 집에 들인다면 이 연적으로 하겠다. 

손에 쥐어도 보고 쓰담아 보기도 하고 물을 넣고 작은 매화 한 줄기 꼽고 싶다. 


장욱진선생과 윤광조의 합은 오늘의 발견이다.


이만익 <생각에 잠긴 장욱진> 1972
이만익 <장욱진 초상> 1977

끝으로, 장욱진 선생을 그린 작품들 

무려 이만익 선생이 그림이다. 


장욱진 선생이 몇번의 일필휘지로 그린 본인 초상화 계열들은 많이 봤는데 타인이 표현한 장선생은 처음 접했다. 


이만익 선생에 비친 장선생은 고독하고 사색적이며 강단있고 서민적인 모습이다. 


장선생 그대로의 모습 


나는 장욱진선생과 조각가 최종태교수와의 케미를 좋아하는데 이만익작가님과는 어떤 스토리가 있었으려나궁금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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