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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술관옆산책로 Nov 02. 2023

꽃과 나무에 빠지다:  조선양화_호림미술관

호림의 전시기획은 언제나 옳다. 

이번에도 기대를 져버리지 않았다. 


조선시대 꽃과 나무를 주제로 한 기획전인데 그림뿐만 아니라 도자와 관련 서적까지 성실하게 큐레이팅을 해 두었다. 


꽃과 나무에 빠지다
 조선양화 (朝鮮養花) 
23.9.2 ~ 11.30  
호림미술관 신사


입구부터 정선의 그림이다. 


<사계산수도 화첩>


정선 <사계 산수도 화첩> 18세기

동양화는 보통 오른쪽부터 왼쪽으로 보는 것이니 사계라면 봄여름가을겨울이 순서대로 오른쪽 부터 나오거나 봄부터 나오지 않더라도 4계절이 모두 있어야 하는데 두번째 그림이 비교적 여름과 닮고 겨울이 아닌 것(겨울은 꼭 눈이 있어야 하나.. 눈이 없어도 바위산에 상록수들이면 이 그림도 겨울일수도 있겠다)과 세번째 그림이 겨울일 듯한 것을 제외하곤 첫번째 네번째 그림은 봄일 수도, 가을일 수도 있다. 


사계절이 너무 뚜렷하지 않아 오히려 더 들여다 본 그림인데, 2번째 바위산 그림이 가장 좋다


심사정 <산수도> 18세기

심사정의 <산수도> 


이제 막 봄꽃이 피기 시작하는 계절인 듯, 산천은 아직 풀꽃 옷을 풍성하게 입지 않았지만 계절을 재촉하는 꽃방울은 이미 흐드러져  정자위 선비는 꽃에 취해 이미 반쯤 누웠다. 


<인평대군방전도 (모사본)> 규장각한국학연구원 1792

이런 그림에는 가옥의 생김, 건축방식들 외에 가옥내 꽃과 나무의 배치도 볼 수 있다. 조선 양반내 집 마당과 담장엔 노송과 오동나무, 회화나무, 매화나무 등이 주로 심겼나 보다. 


위에서 본 하나의 시점으로 아랫쪽 건물들은 거꾸로 서있다. 

재밌네 


작자미상 <동월도> (모사본) 조선 19세기

호림이 벽 한면을 털어 이 작품을 걸었다. 


아무리 모사본이래도 우리 회화수준과 기록수준이 이 정도인 줄은 몰랐다. 분명 붓일 것인데 거의 펜으로 그린 듯하다. 색감은 또 얼마나 단정하고 조화로운지...


동쪽 궁궐이라 지금의 창덕궁과 창경궁으로, 건물과 각종 식물들을 기록하기 위함인데도 회화적으로도 완성도가 높다. 


동궐에 들어앉은 20여종의 나무때문에 궐의 사시사철이 심심하지 않을 터 그 때의 나무들이 지금도 풍성하여 우리를 맞아준다. 


호림의 전시기법이 훌륭하다는 것이 이런 부분인데 이번 기획이 작품 하나하나에 포커스한 개별전시가 아니라 꽃과 나무, 정원이다 보니 꽃과 나무가 만발한 청화백자와 기암괴석들로 정원을 꾸며 두었다.  

다 같이 모여 있으니 그리 이쁘고

하나씩 들여다 봐도 이리 예쁘다. 


내가 실내정원을 갖게 된다면 


내 마음에 꼭 맞는 달항아리를 들이고

거기에 청화백자와 철화백자를 들인 다음

작은 연적과 향로를 조그마하게 올리고 싶은데


그런 마음에 다시 한번 불을 질렀다. 


달빛에 비쳐 그림자진 난초가 이리도 단아한데 또 저리도 고혹적이다. 

시가 시대의 정신이었던 조선시대에 이리 방을 꾸며 놓고 달빛에 취하면 시가 절로 나올 듯한 공간이다. 


의학의 <<동의보감>>처럼 원예 고전인 <<양화소록>>. 


16종의 꽃,나무, 괴석에 대한 이야기로 세종의 처조카였던 강희안이 썼다. 세속적인 성공에 관심이 적었던 (또는 적어야만 했던) 작가가 직접 화분에 식물을 길러가며 쓴 글이다. 그 원본이 이리 생겼다. 


한장한장 넘긴다 한들 그 내용을 알수 없겠지만, 15세기에 꽃과 나무, 돌을 놓고 이리도 애정하여 책을 집필한 이가 있고 그 책이 형태를 보존하며 내려온다는 것은 감동이다. 


이럴 때 시간은 갑자기 6백년을 뛰어 넘어 내 앞으로 성큼 다가온 느낌이다. 


강희안 <절매삽병도> 15세기

글자 그대로 '매화를 잘라 화병에 꼽는 모습'을 그렸다. 


강희안은 위 <<양화소록>>을 집필할 정도로 꽃과 나무에 진심이었는데, 왠만한 화가 저리가랄 정도로 그림도 잘 그렸구나


어찌보면 조선의 천재화가 김홍도의 솜씨처럼도 보일 정도이니 풍속화가로서의 능력도 가지고 계셨던 분  


매화를 자르는 이, 그 매화를 받으려 화병을 두손으로 곱게 들고 있는 이 모두 매화를 잘라 병에 꼽는 행위가 어떤 중요한 의식인 양 정갈하고 절도있다.


정선 <사직노송도> 조선 18세기

정선의 <금강전도>같은 그의 대표작들인 금강산을 소재로한 그림을 못 봐서 감히 그의 그림 중 '최고'라고 단언할 수 없지만 내가 실제로 본 정선의 그림 중엔 <인왕제색도>와 더불어 현재 최고다. 


이무기가 용이 되어 승천하듯, 움직이지 않을 나무에서 움직임, 그것도 비상의 기운이 느껴진다. 


그림은 땅에서 부터 줄기가 올라온 가운데 부분을 중심으로 양쪽 나무 줄기를 통해 기운이 요동쳐 뻗어 나가고 가운데 줄기는 그대로 하늘로 오를 듯 한껏 힘을 받았다. 


소나무 줄기도 검고 굵게 먹을 쓴 부분, 가늘고 옅에 먹을 쓴 부분으로 나누어 마치 용의 비늘처럼 보인다. 


소나무도 몇백년의 시간을 머금으면 하늘로 승천하는 건가.. 


작가의 생몰은 있어도 작품이 언제 그려진 것인지는 알수 없는데 작가는 그의 삶 끝 자락에서 이제 하늘로 돌아갈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음을, 그리고 그러한 순간이 온다면 용이 승천하듯 가장 힘차고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생을 끝내고픈 마음을 이리 소나무에 투영한 것인가...


조희룡 <홍백매도> 1851

10폭 병풍에도 못 미치는 8폭 병풍인데, 그 위용이 12폭 못지 않은 것은 한떨기 매화 꽃보다 영겁의 시간을 머금은 듯한 매화 나무 그 자체가 그림의 중심이어서 인 듯하다.


보통의 그림들이 매화 나무 끝에 새초롬하게 걸려있는 매화 꽃의 서정성을 강조한 것과 대비되는 지점이다


여지껏 본 매화그림 중 기백이 살아있다고 느낀 첫번째 작품  


허련 <모란도 병풍> 19세기 후반

허련에 대해서는 글로도 작품으로도 가장 덜 접한 작가다 보니 많이 생소하다. 하여 이렇게 부지불식간에 작품을 접하게 되면 눈에 담고 마음에 담으려 애쓴다. 


언젠가 그의 작품을 구별해 내고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게 될 때 쭈욱 꾀어질 그림일 것이니


아름다운 꽃그림의 도자들과  실제 꽃 그림 병도 있고 호도 있고 연적도 있고 필통도 있다. 

복숭아 모양 연적이 특히 귀여워서 눈에 더 들어왔다. 


오남운 <묵포도도 8폭 병풍> 19세기

이렇게 긴 병풍도 이례적이거니와 여기에 포도덩쿨이 그려지니 새롭고 독특하다. 


8폭 밖에 안되는데 폭 하나의 길이가 길어 12폭 이상의 규모감이 느껴진다. 


끝을  알수 없게 쭉쭉 뻗어가며 이어진 포도나무 줄기 사이사이에 탐스럽게 열린 포도송이가 싱그럽다. 검은 먹으로 세밀하게 그린 포도송이는 한개 따 입에 넣고 싶을 만큼 탐스럽다. 


작가에 대한 기록이 적고 비교적 최근인 19세기 작이라 작품도 상당히 현대적이고 보존도 거의 완벽에 가깝다. 


이런 그림을 걸 수 있는 대가집은 어떤 집일까...


정선 <독서여가 (영인본)> 18세기, 간송미술관, 보물

간송의 수집품이라고 하면 일단 믿고 본다. 

게다가 영인본이긴 하지만 보물이다. 


이런 작품들은 진본을 전시할 수 없다. 전시 안해도 된다. 그 원형을 원형에 가깝게 볼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하다. 


그림 속 선비는 책을 읽다가 툇마루로 나와 모란꽃 한송이를 바라 본다. 4월 하순경 피는 꽃이니 이제 막 여름의 문턱으로 들어가는 한창의 봄이다. 한손에 부채를 쥐고 있는 선비의 모습이나, 방의 창으로, 마당 그 자체에서도 보이는 소나무가 초록으로 무성한 것도 모두 계절을 읽게 해준다. 


한창 더워지고 있는 이 계절에 아무리 책에 집중하고 싶어도 밖은 너무 예쁘고 공기는 가벼워 "에라 모르겠다, 꽃이나 보자" 싶은 마음이 들었을 선비가 이해되 흐뭇한 미소가 입가에 올랐다. 


정선의 그림중 간혹 옅은 색으로 칠한 바위나 꽃은 본 적이 있는데 이 정도면 거의 총 천연색 그림이라고 할 법한 그림을 접하고 나니 그가 일생토록 정적이고 고독한 산수에 인생을 바친 것은 아니구나, 


그리고 저 선비가 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이어서 그를 그림 안에 박제 해 둔 것이면 좋겠다... 생각한다.


장승업 <기명절지도> 19세기

장승업이 선택한 기명절지도에는 화분과 난과 모란, 기암괴석, 향로등이 있다. 


이 하나하나의 의미는 아직은 관심이 가지 않는데 조선 후기 바람 처럼 살다간 그의 삶을 생각하면 이 그림을 포함해 그 동안 본 장승업의 그림들이 생각보다 오종종하여 재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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