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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술관옆산책로 Nov 19. 2023

오스트리아 빈 미술사 박물관 #3_그 외 위대한 작품들

페르메이르와 피터르 브뤼헐이 너무 강력했지만 그 외에도 빈 미술사박물관이 왜 전세계적으로 가장 훌륭한 미술관인지 여실히 보여주는 작품들이 이번 편과 다음 편의 주인공들이다.


Giuseppe Archimboldo <Winter> 1563
Giuseppe Archimboldo <Water> 1566


멀리서 보면 그저 화사한 색감의 서로 마주보고 있는 사람 얼굴인데 가까이 보면 얼굴을 구성하는 요소들로 징그럽고 혐오스럽다가도 결국 모든 것이 조화로와 대단히 독특하고 강렬하게 아름답다는 느낌이 드는 이탈리아 화가 주세페 아르침볼도의 작품들 


그의 유명한 계절과 그와 댓구를 이루는 원소 시리즈가 이곳에 있었다.  


그림은 해당 소재들을 기가막히게 쌓아 주제를 드러냈다. 


<Winter, 겨울>이 주제인 사람의 얼굴은 거칠어진 나무 줄기, 말라가고 있는 레몬, 푸릇하지만 풍성한 느낌이 덜한 나뭇잎들이 구성하고 있고 이와 댓구를 이루고 있는 <Water, 물>엔 물에서 살고 있는 각종 생선과 갑각류들이 생각해 보면 물에서 만들어지는 진주목걸이로 치장한 사람의 얼굴모양으로 표현되어 있다. 


책에서 처음 아르침볼도의 작품을 보고 '와, 신박하다!' 했었는데 실물을 코 앞에서 보고나니 '경이롭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듯하다. 


게다가 그림 속에서의 디테일과 색감이 넘사다. 


말하자면 16세기 르네상스 시대의 고전주의적 표현기법인 것인데, 붓자국 하나 나지 않는 세밀한 표현방식이 아르침볼도의 작품에서도 빛을 발했다. 


구성력과 창의력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은 작품들 


Giuseppe Archimboldo <Summer> 1563
Giuseppe Archimboldo <ire> 1566


이 작품은 <Summer>와 <Fire>인데 연작들을 이렇게 한꺼번에 볼수 있게 해준 빈 미술사박물관에 감사의 마음이 절로 솟았다. 


여기엔 없지만 <Spring>은 <Air>를 <Autumn>은 <Earth>와 데꼬보꼬를 이루어 4계절과 4원소의 시리즈물이다. 


무수하게 아름다룬 미술 작품들 속에 쇠라의 점묘나 베이컨의 삼부작들 처럼 독특해서 뇌리에 남을 작가로 아르침볼도도 꼽게 되었다. 


Albercht Durer <All Saints' Picture> 1511

뒤러는 살아 있는 듯한 토끼그림과 스스로를 예수를 닮게 그린 자화상을 본 후 마음에 들였는데, 빈미술사가 여러점의 작품들을 한꺼번에 보게 해 주었다. 


이 작품은 여러 성인들을 한 폭에 담은 그림이었는데, 내가 성인 하나하나를 알아볼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굳이 없다 생각하기 때문에 그림의 구도와 원색들을 충분히 사용했어도 복잡하지 않은 색채 감각, 그리고 그런 원색으로 이리 성스러운 분위기를 낸다는 것이 신기한 그의 스타일은 눈여겨 보았다. 


알브레히트 뒤러 <Emperor Maximilian I (1459-1519)> 1519
알브레히트 뒤러 <Young Man> 1507
계속되는 뒤러의 작품들

그는 이미 말했지난 토끼를 그린 그림이 너무 유명했는데 그때도 토끼의 털 하나하나 사실적으로 표현해 낸 기법 때문이었는데 다른 사람의 초상화들에도 모피의 표현이 캔버스를 지배했다. 



렘브란트 <Large Self-Portrait> 1652


최근 어느 글에서 렘브란트의 자화상은 그림으로 쓰는 자서전이라고 했다. 


그의 자화상을 표현하는데 이보다 적절한 표현이 있을까...


LA 게티센터에서 20대의 웃는 렘브란트를 봤을 때, 

몇 달 전 국립중앙박물관의 <<합스부르크 600년>>전에서 60대의 노년의 추레한 그를 봤을 때

그리고 지금 빈미술사박물관에서  40대, 여전히 당당한 그를 봤을 때 

각 지점들에서 렘브란트는 그의 삶과 그 자신의 내면을 잘 드러냈다. 


40대의 렘브란트는 20대 보다 체구가 커지고 허리에 손을 얹어 당당함을 표현했는데 얼굴과 눈빛은 부드럽고 서정적이다. 그럼에도 완벽하게 평화롭다고만 할 수 없는 아픔이나 고뇌도 보인다. 


삶에서 중년을 지나는 사람으로서 고개가 끄덕여 질법한 삶을 살고 있는 듯하다. 


그의 말년은 힘들었다. 그래서 그의 말년의 자화상들은 개인 렘브란트이자 이를 보는 사람들의 삶이고 거기서 받는 위안과 동질감이 있다 


렘브란트는 60여점의 자화상을 남겼는데 어느 곳에서 건 앞으로 계속 마추쳐질 그의 자화상이 기다려진다. 


Frans Hals <Portrait of a Young Man> 1638/40

할스의 작품은 밝으나 가볍지 않고 해학적이나 어렵지 않아서 이 작품도 그런 맥락에서 경쾌한 무드의 초상화로 보였다. 그가 하를렘에서 생의 대부분을 보내면서 주변인들의 초상화를 많이 그렸는데 그때 그린 그림이다. 


그의 작품엔 왠만해선 웃음이 빠지지 않는다. 최소한 미소는 있다. 할스의 작품이 아니었다면 무표정하게 보였을 초상화가 그의 작품임을 알고는 희미하지만 분명 미소를 짓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할스의 힘이다. 


(왼쪽 )Jan Van Huysum <Vase of flowers on a Ledge in a Park Setting> 1720/22경 & <Vase of flowers next to a Column> 1718/20경


Jan Brueghel d. A <The Great Bouquet> 1606/7
Rachel Ruysch <Bouquet> 1706


미술을 좋아하기 전 꽃은 생화를 보면 된다 생각했다. 지척에 널린 것이 꽃이고 몇천원에서 몇만원을 들이면 향기롭고 풍성한 꽃들을 집에 들일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요즘은 생화도 물론 좋아하지만 그림 속의 꽃들을 너무 사랑한다. 


언젠가 집에 들을 꽃그림을 생각하면서 어떤 풍의 어떤 작가의 꽃을 들일까, 꽃병만한 실사크기의 꽃그림을 들일까 아주 크거나 작게 할까, 조지아 오키프의 카라 처럼 꽃의 한 부분을 강조한 그림도 좋겠지.. 그런 생각들을 한다. 


꽃그림은 바니타스 계열의 정물화의 의미가 있을 것인데 나에겐 사시사철 시들지 않고 언제나 가장 아름답고 풍성한 모습으로, 계절을 달리해 나오는 꽃들도 원하면 한 꽃병에 꽂아 언제나 들여다 볼 수 있음으로 좋아한다. 


이 그림들도 그래서 좋았다.


저 모든 꽃이 한 계절에 나올 수 있는 꽃들인지, 저 부피감과 높이감이 그 시대에 실제로 나온건지 모르겠지만 저렇게 풍성하고 거대한 꽃은 그림 안에서 존재하는 것이 훨씬 그럴 듯하다. 


세번째 꽃부케는 무려 피터르 브뤼헐의 아들인 얀 브뤼헐의 작품 


동생이 아버지와 존똑 수준의 그림으로 더 유명하다면 그는 그만큼이 아닌 대신 이런 정물화가 또 탁월했구나... 생각한다. 


히에로니무스 보스 <Christ Carrying the Cross> 1490-1510
위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그림은 양면화인데 앞이 예수의 그림, 뒤가 아이의 그림이다.

내가 가장 어려워 하는 화가중의 한명인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작품 


앞면은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를 뒷면은 해석이 다양하긴 한데 아기 예수라는 분도, 앞면의 사악한 이들과 대비하기 위해 순결성을 강조하기 위해 선택한 일반 아이라고 해석하는 이들도 있다 한다. (해설판) 


미술관에서 일단 양면화를 보면 눈길이 가기 마련인데 이 작품도 히에로니무스의 작품이라서기 보다 양면화여서 좀 더 시선이 가긴 했다. 


네덜란드 화가들은 인물 표현이 되게 위와 같은 방식으로 비슷하던데... 라고 생각하고 보니 히에로니무스도 네덜란드인이었다. 



Geertgen tot Sint Jans <The Lamentation of Christ>1484년 이후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를 십자가에서 내린 후의 모습을 그린 그림을 주로 <The Lamentation of Christ>라고 한다. 르네상스시기에 많이 그려진 그림 소재인데 애도하는 사람들의 표정이 이렇게 잘 표현된 그림을 마주하게 된 건 실로 오랜만이다. 그림의 상태도 매우 좋아서 600여년이 지난 그림이라고 보이지 않는다. 


현재 남아있는 그림들 중 그림의 기술로는 르네상스 시기의 미술을 못 따라 가지 싶다. 


(가운데) 피터 폴 루벤스 <The Holy Family Beneath an Apple Tree> 1630/32

어린 예수의 가족이 세례자 요한의 가족을 맞는 모습 


정확히 똑같은 두 가족의 구성이 두 패널로 (지금은 연결된) 그림의 좌우에 안정적으로 배치되 있고 그 위로는 앞으로 이 가족이 인류의 원죄를 대속할 것을 예언하 듯 사과나무가 풍성하다. 


루벤스의 작품은 여러 미술관에서 상당히 많이 접했는데 이제 조금 그의 스타일을 알 것 같다. 빛의 배치, 붓질, 인물 표현에서 일관되는 지점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소기의 성과다. 


피터 폴 루벤스 <The Feast of Venus> 1636/7년경


비너스의 잔치를 표현한 그림인데, 그림의 규모, 수많은 등장인물, 그 인물들의 역동성과 그림 곳곳에서 드러내는 각각의 역할때문에 다양하고 볼거리가 풍성한 그림이 되었다. 


미의 여신 비너스의 잔치이니 아름다움과 풍족함은 기본 인데, 그림 중심에 서있는 비너스는 (색이 바래서일 수도 있지만 ) 이 잔치의 주인공인데도 기뻐보이지 않고, 좌측 하단의 여인들은 사랑을 나누는 중인데 사티로스 (하체는 염소 상체가 사람)인 듯한 남성은 여성에 강압적인 애정표현을 하고 있다. 이 정신없는 와중에 큐피드와 아이들은 천진하게 놀고 있고 그 주위 여인들은 무념하거나 정신없고 놀란 표정들이다.  


하나의 정서나 톤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림 곳곳이 등장인물에 따라 다른 감정, 다른 느낌들을 전달하고 있어 대형 그림임에도 지루하지 않고 하나하나 발견하는 재미가 있었다. 


이 작품은 티치아노가 롤모델인 루벤스가 그로 부터 영감을 받아 그렸다 한다. 



피터 폴 루벤스 (왼쪽) <Angelica and the Hermit> 1625/28년경 (오른쪽) <Jupiter and Mercury with Philemon nd Baucis>1620/22년경 


위 두 작품도 루벤스의 작품인데, 국중박의 합스부르크 600년전 때 대여되 국내에서 봤던 것이 다시 자기 집으로 돌아와 걸려있다. 


우리 것인 양 반가웠던 작품 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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