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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미로 Feb 28. 2022

메로나는 멜론이 많이 들어있어서 메로나인가?

정체성의 구축 - 테세우스의 배

눈 펑펑 내리고 살을 에는 바람이 대한민국을 덮는 겨울이 끝나고, 따스한 햇빛 내리쬐는 봄 날씨가 서서히 우리 주변에 도달했다. 하지만 얼마 뒤에는 분명 언제 그랬냐는 듯이 푹푹 찌는 여름이 오겠지. 요 근래 몇 년간의 여름은 정말 살인적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더위와 습도로 많은 사람들을 미치고 팔짝 뛰게 만들었는데, 유달리 더위를 많이 타는 나 역시도 여름은 그야말로 괴로움의 연속이었다. 원래도 집에만 박혀 지냈지만 여름엔 더더욱 그랬는데, 부득이하게 외출을 해야 하는 일이 생길 경우에는 꼭 집 앞에 새로 생긴 무인 아이스크림 판매점에 들어가서 메로나를 하나 사서 먹으며 길을 나서곤 했다. 다 먹어치우기 전까진 황홀한 시원함을 선물해주는 메로나.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메로나는 1992년 처음으로 출시된 아이스크림이라고 한다. 나이만 보면 빙과류 중에선 원로급인데 아직까지 세대 불문하고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고 '올 때 메로나'라는 밈까지 있을 정도면 얼마나 메로나가 사랑을 많이 받는지 짐작이 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이런 메로나에 여러 가지 변형이 있던데...


빙그레 홈페이지에 나와 있는 다양한 메로나


메로나는 멜론맛 아이스크림이라서 메로나 아닌가? 도대체 망고맛이면 망고나, 바나나맛이면 바나나나가 맞는 것 같은데 망고맛 메로나, 바나나맛 메로나라니...... 저것들은 메로나가 맞는가? 아니면 메로나의 탈을 쓴 가짜 메로나인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테세우스는 크레타의 미궁에 갇힌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죽인 영웅이다. 그와 관련된 정말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지만 -프로크루스테스, 스키론, 아리아드네 등등- 여기서는 '테세우스의 배'에 대하여 이야기하고자 한다.


테세우스의 배는 상당히 유명하고 재미있는 사고실험이다.

'아테네의 영웅 테세우스가 미노타우로스를 죽인 뒤 아테네로 돌아오는 길에 탔던 배를 아테네인들은 오랫동안 보관하였다. 기나긴 세월 동안 썩어가는 판자는 하나씩 제거되고 새로운 판자로 교체되었다. 그런데 그런 식으로 부품이 계속해서 바뀌다가 결국 최초의 부품은 단 하나도 남지 않는 순간이 온다면, 그것은 여전히 테세우스의 배인가?'

하는 이야기이다.


무언가를 무언가로 정의하는 요소는 과연 무엇인가? 테세우스의 배는 아테네와 크레타를 왕복하며 영웅 테세우스의 업적 그 자체의 상징이 되었다. 그 배에는 테세우스가 보낸 시간과 고난과 성취가 실려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세월의 손길 아래서 그 수명이 다해가는 몸을 고치기 위해 하나 둘 부품을 갈아치우기 시작한다. 처음엔 판자 하나였을 것이다. 못 몇 개가 뽑혀나간 뒤 새로운 판자가 덧대지고, 다시 못 몇 개가 판자를 고정했을 것이다. 그래도 테세우스의 배는 테세우스의 배였다. 바뀐 것은 극히 일부이니까. 그리고 이런 교환은 시간이 지나며 계속해서 발생한다. 어쩌면 절반쯤 바뀌었어도 테세우스의 배는 여전히 테세우스의 배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 비율이 50%를 넘어간다면? 70%라면? 99%라면? 그 배는 여전히 테세우스의 배일까?




메로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어차피 메로나 안에 진짜 멜론이 몇 퍼센트나 들어있겠는가? 그냥 멜론 맛에서 모티브를 따왔고, 그 맛을 온전히 전달하기 위해 부드러운 식감과 연녹색 색감까지 구현해낸 아이스크림의 이름을 메로나라고 지었을 뿐이다. 그리고 하루 이틀 존재했던가 메로나가? 무려 30살이다. 이 글을 적는 타자보다 나이가 많고, 분명 내가 죽은 뒤에도 오랜 세월 빙그레가 폐업할 때까지 사람들의 여름을 책임질 것이다. 부품이 싹 바뀌었어도 여전히 전시를 보는 사람들에게는 테세우스의 배라고 불리는 오래된 테세우스의 배처럼 모양과 손잡이 빼고 맛도 색도 싹 바뀐 메로나일지라도 그것은 여전히 메로나라고 불릴 것이다. 


단순한 외형이나 성별 따위가 어떠한 존재의 정체성을 규정한다고 믿는 사람은 요즘 사회에서는 보기 드물 것이다. 십인십색이라, 모든 사람은 다 각자의 개성을 가지고 있는 법이니까. 우리는 누군가를 떠올릴 때, 그 사람과 함께 보낸 시간 속에서 그가 보인 모습을 통해 그를 규정한다. 밥 먹는 습관, 종교, 키와 몸매, 노래실력뿐만 아니라 나를 대하는 말투, 어른이나 어린이를 대하는 태도 등 복합적인 것들을 통해 '아 그 친구 정말 괜찮은 친구지!'라고 할지 말지를 결정하는 것이다.


나는 내가 단순히 이 사람이 키가 작아서, 돈이 적어서, 학력이 안 좋아서 '다른 지성이나 인격적인 부분들도 결함이 있을 것이다'라고 막연히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길 바란다.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더라. 갈등과 분란의 시대를 살아가는 나는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을 때까지 열심히 귀 기울이고 관찰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다. A를 A로 규정하는 그 무엇을 찾고 난 뒤에 그 사람을 평가해도 늦지 않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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