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림
사랑이란 것을 마음껏 받으면서 살다가 죽은 뒤에는 천국에 갈 수 있다는 참으로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근래 들어 고향에 오기만 하면 고향 친구 놈을 통해 듣게 되는데, 그 천국 어쩌고 하는 놀음이 몹시 우스운 것이 내가 서울에 올라가 살면서 사업을 위해 은행에 가 고작 삼천만 원 빌리는 데에도 이 날강도 같은 은행 잡놈들은 ‘고객님께서는 삼천만 원을 대출하셨고, 이율은 연 오쩜이퍼센트여서 현재는 이자 백오십육만 원을 더하여 삼천백오십육만 원이십니다만 십 년 만기로 대출을 하셨기 때문에 월 상환금은……’ 어쩌고 하면서 별의별 말 같지도 않은 핑곗거리를 대며 빌려준 돈은 쥐꼬리만 한 주제에 이자는 감자탕에 들어있는 돼지 등뼈만큼 큼직하게 퍼 담으려 하기에 창구의 단발머리 계집과 쌈닭마냥 푸닥거리를 하고 은행 문을 쾅 닫고 담배를 뻑뻑 피웠던 것이 고작해야 이 주 전이거늘, 머리 식히러 들린 고향에서 만난 이 오랜 친구라는 놈은 어릴 적에 지 아버지 심부름으로 간 양조장에서 술지게미를 배때기가 찢어져라 얻어 처먹고는 막걸리 받아놓은 주전자는 집 가는 길에 논두렁에 엎어버리고 해 지고 나서야 헐레벌떡 돌아간 집에서 종아리에 불이 나도록 회초리질이나 당하던 시답잖은 놈이었고, 어느새 나이가 들대로 들어서도 여전히 시답잖은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고 동네 어귀 선술집에서 두부 한 모에 막걸리를 댓 병씩 마셔대면서 푸념이나 하며 살던 주제에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내 고향집 근처에 있는 벌건 벽돌로 지어진 낡아빠진 교회에 언제부터인가 다니기 시작하더니 정신이 나갔나 예수를 믿으면 그 양반이 사랑을 준다는 등, 만족을 주고 인생에 구원을 준다는 등 술까지 끊고는 내 귓구멍에 자기 목소리를 박아 놓지 못하는 게 한이라도 되는 양 허구한 날 내가 고향 내려올 때마다 그딴 소리나 하고 있는데, 그 예수라는 인간은 듣자 하니 어째 자기를 믿기만 하면 계약서도, 이자도, 만기일도 없이 내 인생에 제 놈의 구원과 사랑과 평화를 준다고 하는 것인지, 그럴 거라면 저 빌어먹을 대출금이나 좀 갚아주던가, 일감이나 좀 잔뜩 물어다 주던가 하는 게 내 인생을 구원하는 편일 것인데 하는 생각을 하다 보니 갑자기 성이 오를 대로 올라버린 나는 벌컥 고개를 들었다가 어느새 그 거지 같은 교회 앞에 도달해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동시에 문이 열리며 친구 놈이 나오는 바람에 눈이 마주쳐 버려 또다시 이 잡것의 일장연설을 피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쾌함이 찍 하고 내 머릿속으로 튀어 올라, 만약 또 헛소리를 한다면 우정의 상실을 감수하고서라도 악다구니를 써서 쫓아 버리리라 결심하고 있었는데, 이놈이 교회에서 독심술이라도 배웠는지, 아니면 동네 뒷산에서 무공 비급을 주워 타심통이라도 익혔는지 ‘이거 자네를 보니 정말 기쁜데, 내가 지금 급하게 일이 있어 미안하지만 이것 좀 잠시 가지고 있어 주면 내가 저녁에 일 보고 자네 집 들려 챙겨가겠네, 고마우이’하며 내 손아귀에 웬 시커먼 것을 쥐여 주고는 헐레벌떡 뛰어가버려 나는 이게 무슨 상황인가 하고 멍해진 정신을 순간 추슬러 보니 내게 친구 놈이 맡긴 것은 ‘성경전서’라 쓰인 검은색 가죽 표지로 된 깔끔한 책에 중간에는 서표로 쓰는 것인지 끈이 하나 달려있었는데, 귀신에라도 홀린 것인지 나는 그 끈이 들어가 있는 책의 뒤쪽 장을 열어버렸고, 그곳에 쓰여 있던 깨알 같은 글씨가 눈에 걸려 이것이 무엇인가 하고 위쪽부터 슬쩍 보는데, 쓰여 있기는 ‘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11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하고 쓰여있는 것을 내가 읽다 왜인지 모르게 화들짝 놀라는 마음이 들어 책을 홱 덮어버리고 말았으나, 벌렁거리는 심장은 마땅히 덮을 도리가 없어 잠시 고민하다 집으로 후다닥 뛰어들어가 다른 장을 펼치고 눈을 처박아보니 온갖 기묘막측한 글귀들이 쓰여있어 눈을 떼지 못하여 땅거미가 지는 줄도 모르고 정신없이 읽어대던 와중에, 갑자기 들려오는 ‘여보게’ 소리에 흠칫 정신을 차리고는 불을 켜고 마당으로 뛰쳐나가자 내게 이 책을 맡긴 친구 놈과 검은 옷을 단정하게 입은 청년이 함께 서서 내게 인사를 하는 것이 보였으나 그것을 무시한 채 나는 ‘이봐, 이 책은 도대체 어떤 자식이 썼길래 이렇게 나를 어지럽게 만든단 말이야’하고 외쳤고, 내게 친구 녀석 옆의 청년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심과, 부활과, 그를 통하여 우리에게 선물하신 구원에 대하여 증거 하는 기록을 모은 책입니다’하고 대답하기에 나는 약이 올라 ‘그 예수가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말은 정말 얼토당토않은 데다가, 그것이 내 인생을 구원했다는 것은 더더욱 말이 되질 않아’ 하니 그 사내가 또다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본래 하나님이시나 저희를 구원하기 위하여 인간의 육신을 입고 이 땅에 내려오신 뒤 스스로를 제물 삼아 형제님과 저와 다른 모든 이들의 삶에 깃들어 있는 태고의 죄와 형제님이 살아오시며 마주한 수많은 죄악의 경험들을 용서하는 커다란 제사를 지내신 것이며 그렇게 돌아가신 지 삼일 만에 다시 부활하시고 하늘로 올라가셨으니 이것은 성경에 기록된 바 수많은 사람들에게 눈으로 확인되고 증거 된 사실입니다’하고 차분한 말투로 설명하는 것이 쉽지 않게 느껴져 ‘도대체 당신은 뉘쇼’하고 묻자 조용하던 친구 녀석이 ‘자네 집 앞 교회에서 말씀 전하시는 목사님이시네’하고 대신 대답하는데, 갑자기 뒷목이 저릿하는 느낌과 함께 알 수 없는 기묘한 감정이 몸을 감싸 오자 나는 참지 못하고 ‘아니 목사 양반, 도대체 그 예수라는 인간은 언제 죽었는데 내 인생을 구원하네 마네 하는 거요’하고 외치고 말았고, 젊은 목사 총각은 웃으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천년도 더 전에 돌아가셨으나, 그분의 죽음과 부활은 그 시대와 더불어 미래의 불민한 후손인 저희들에게, 또한 더 먼 미래의 후손들에게까지 구원의 기쁨을 약속하신 하나님의 선물입니다’하고 말하고는, 곧장 뒤이어 ‘친구분을 통해 형제님의 이야기를 익히 들어 형제님을 위하여 기도하고 있었는데, 오늘은 이미 시간도 많이 늦었고, 내일이 마침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부활절인데 시간이 되시면 교회에 들리셔서 더 깊은 이야기 나눠 보시는 것은 어떠실런지요’하는 것에 나는 왜인지 모르게 차마 오늘 밤에 서울 올라갈 예정이었다는 말을 꺼내지 못하고 머뭇거리다가 ‘좋소’하고 둘을 돌려보낸 뒤 담배 한 까치를 꺼내 입에 물었으나 성냥을 찾지 못해 주머니를 뒤적거리던 중에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니 휘영청 둥근달이 밝아 그것을 빤히 바라보다 에라이 하고 담배를 뚝 분지른 뒤 마당에 던져버리고는 내일 교회에 일찍 갈 요량으로 아까 그 책이나 읽다가 잠이나 자러 방에 들어가 문을 조심스레 닫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