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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둘 Mar 29. 2023

무성서원 강당에서

  [수필]


공부하고자 하는 자에게 문을 열어 주었던 서원의 강당.
옛 시절로 돌아가 선비들과 시를 주고받았으면 좋겠다.

 현가루 굵은 다릿발 사이 먼발치서 ‘무성서원’이라는 강당(講堂) 현판이 힘찬 필체다. 낡은 기와지붕이 허술해 보이면서도 옷매무새 가다듬는 안주인같이 고고하게 바깥을 내다보고 있다. 마당 한쪽에는 아직 녹음(綠陰)을 담고 있는 은행나무가 날카롭게 마당을 내리쏘아 보고 있었다. 현가루의 허술함을 생각하고 무턱대고 들어섰다가는 이 은행나무가 어깨를 후려쳐 마당에 무릎을 꿇게 할 것만 같다.


 강당은 작은 규모이지만 세월의 흔적이 진하게 배 있다. 지붕 안쪽으로 글을 새긴 나무현판들이 가득 걸려 있다. 기둥이 헐어 내릴 뻔했던지 다른 나무를 끼워 보수공사를 한 흔적도 보이는데 군데군데 건물은 상처투성이다. 배우는 일에 있어 교실의 남루함은 욕(辱)이 되지 않는다. 

  선비에게 청빈(淸貧)이 당연지사인 것과 같다. 사람이나 건물은 내면의 충실함을 보아야지 겉모습만 보아서는 안 된다. 서원은 학문적 진리를 논하는 곳으로써 외물에 무게 중심을 주지 않아야 한다. 공부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공간의 규모는 의미 없는 것과 같다. 서원의 규모를 논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이다.     

                                                                      *


  한글을 겨우 읽고 쓸 줄 알게 되었던 초등학교 1학년 때 백일장이 열린다는 것을 알았다. 선생님께 여쭤보니 글짓기 대회라 하셨다. 백일장에 참가하고 싶었지만 아무나 참가하는 게 아니라 선생님들께서 추천해 주는 학생들만 참가할 수 있단다. 게다가 1학년은 추천해 주지 않는다고 하셨다.


   3학년에 올라갔을 때 담임선생님께서 백일장 참가자를 뽑았다. 내 이름은 없었다. 선생님께 가서 왜 저는 백일장에 출전하지 못하는지 물었다. 선생님은 백일장은 공부 잘하는 학생들이 출전하는 거라고 하셨다. 글짓기 대회는 글을 짓고 싶은 사람이 참가하는 거 아닌가예? 꼭 공부를 잘해야 글을 잘 짓습니꺼?

  내 질문에 선생님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본래 공부 잘하는 아이가 글도 잘 짓는 거다. 공부 못하는 학생이 어째 글을 잘 지을 수 있겠냐며 타박을 주셨다.


  5학년이 되어 백일장 시조 부문에 출전했는데 뜻밖에도 큰 상을 받았다. 선생님들은 우리 학교 생긴 이래 이렇게 큰 상 받은 학생은 처음이라고 호들갑을 떨며 극진한 대우를 해 주셨다. 

  교실에 들어오는 선생님마다 나를 칭찬해 주셨다. 선생님들은 어디서 시조를 배웠는가, 누구한테 배웠는가, 쓴 지 얼마나 되었는가를 물어 왔다. 누구한테 배운 적도 없고 그냥 쓰고 싶어서 쓰기 시작한 것이고 혼자서 쓴 지 오래되었을 뿐이었다. 그것은 진실이었다.


  그 옛날 유생들처럼 학업을 장려하기 위해 백일장에 참여토록 했더라면 나는 글짓기 대회에 출전하면서 내 공부가 미진하다는 것을 분명히 깨우쳤을 것이다. 공부를 통해 부족한 지식을 채워 가야 한다는 것도 알았을 것이다. 옛날 유생들이 부럽다.

   한자를 배워 나가고 어려운 철학과 사상 등을 익혀야 했겠지만 획이 점이 되고 점이 선이 되고 면이 되며 하나의 글자가 되는 과정을 익히던 유생들은 순리대로 공부해 나가면서 진리를 체득해 나갔다. 조선의 단단함은 그런 성리학의 뿌리에서부터 시작했을 것이며 그런 속에서 큰선비들이 세상에 나왔다. 그런 유림이 세월 속 점점이 흩어져 이 나라를 떠받쳐 주고 있었던 것 아닐까. 


   무성서원 강당의 낡은 마루가 오래된 내 어린 시절을 이야기를 꺼내 주었다. 나무의 질감과 낡고 푸근한 청빈(淸貧)의 흔적이 마룻바닥 틈바구니에서 올라와 어린 나와 한참이나 마루에서 뛰어논 듯하다. 공부하고자 하는 자에게 문을 열어 주었던 서원의 강당. 옛 시절로 돌아가 선비들과 시를 주고받았으면 좋겠다.    

 

  어느새 하얀 새털구름이 막 하늘을 날아오르려는 듯 서원을 감싸 날아오를 찰나였다. 

  들어갈 때 보이지 않았던 안내소 옆 소나무 한 그루 가지 끝이 위로 높이 치솟아 우주를 배향하는 듯하다. 크나큰 깃털 모양의 구름이 온 하늘을 덮으니 저 무성서원이 곧 붕새*의 형상이다. 등에 업히라는 듯 내 앞에 꼬리 깃털 한 줄 내려 주니 저 새 타고 세상 유람하며 어디 한 번 진짜 공부해 볼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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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서원: 전북 정읍시 칠보면에 있는 조선 시대 서원,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

*백일장: 조선 시대에, 각 지방에서 유생들의 학업을 장려하기 위하여 글짓기 시험을 실시하던 일. 

*붕새:『장자(莊子)』 「소요유편」에 나오는 상상 속의 새.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정신세계를 마음껏 누리는 위대한 존재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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