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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둘 Mar 29. 2023

전봉준 유적지에서

[수필]


 ‘내가 아니라면 너희가 대동의 세상을!’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며, 대동의 세상을 또한 기원합니다.’

  검은 원피스에 하얀 가디건을 걸쳤다. 차마 상복(喪服)을 입지 못한 부끄러움으로 마음이 무거웠다. 배들 평야 너머 만석보 유지비는 묵언으로 서 있었다. 정읍천에 더운 바람이 불어와 녹두장군 전봉준의 얼굴이 나타나는 타루초* 같은 붉고 푸른 깃발이 펄럭였다. 혁명을 주도했던 이의 두려움과 공포는 타루초의 퍼즐 조각 속에서 관세음보살님과 같은 엄숙함으로 배어 나온다. 자유 대한민국에 사는 이 죄스러움에 대한 마음을 어찌하지 못하고 결국 찾아 나선 동학 동민 혁명의 길, 이 길 위에서 내 삶은 얼마나 더 절실해질 것인가.


 와 보고 싶었던 전봉준 유적지. 고즈넉한 초가지붕이 바라다보이는 골목길을 따라 그 문 앞에 선다. 녹두장군 전생의 삶에 발을 디딘다. 제법 넓은 마당 뒤로 잔디가 가꾸어져 있다. 볏단을 엮어서 만든 초가집을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건 처음이다.

   초가의 처마 끝이 낯설다. 이 집에서 전봉준이 무엇을 생각하고 어떤 일을 했던가 생각해 보는 일도 낯섦에 반구를 맞추는 과정인가. 남은 사람들은 귀인(貴人)의 흔적을 한 자락이라도 잡으려 하지만 현생의 몸을 잃은 그는 그리움을 안고 먼 길 속으로 사라져 갔다. 


  우금치 전투에 패하여 일본군과 정부군에 의해 진압당한 후 피신해 있다 부하의 밀고로 붙잡혀 교수형으로 세상과 이별했던 사나이, 잡혀가는 그 순간까지 불멸의 정의로움을 발하는 눈빛의 사진 한 장을 남겨 준 그 사나이. 바로 그가 흔적을 깃든 곳이다. 특별한 것 없어 보이는 시골집이지만 그의 삶이 녹아 있었다는 그것만으로도 방문객을 붙들어 매는 힘이 있다. 


  가난하지만 든든한 초가삼간의 기둥, 누군가 수백 번이고 디뎌 올라섰던 마루청. 그가 지냈다던 끝 쪽 방에는 가로세로 긴 창문이 하나씩 나 있다. 누구라도 어두운 삶 속에서는 빛을 찾기 마련이다. 전봉준은 이 방에서 대동의 세상을 꿈꾸며 어떻게 앞으로 나아갈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새벽녘, 동이 틀 때까지도 불면으로 지새운 나날만큼 그의 혼은 더 불타올랐을 것이다. 새벽은 능청스럽게 다시 아침을 불러왔을 것이고 동틀 무렵, 눈꺼풀이 내리깔릴 때 그는 필사적으로 눈두덩이에 힘을 주었을 것이다. 누구나 공평하게 살아갈 그 세상이 반드시 오고야 말 거라는 확신 속에서 번뜩이는 눈은 이 세상 저 너머까지 내다 바라보았을 것이다. 


  지금 그 세상이 열리지 않는다고 해도 좋으리라 하면서도 조급한 소망을 가슴 깊이 묻고 그는 그날을, 피비린내 나는 그날을 만나지 않으면 꿈꾸는 세상의 문은 열리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하늘의 뜻에 따라 이번 생에 해야 할 가장 거룩한 혁명은 자신을 소신공양*해야만 대동의 세상이 열리리라는 것을 예감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 두려움을 푸릇한 새벽빛을 바라보며 이겨내야만 했을 것이다. 


  그 거룩한 기운이 아직도 이 작은 방에 깃들어 있을 것만 같아 방 문턱에 걸터앉아 버렸다. 벽면에 붙은 흑백사진. 장군의 상투 머리 튼 그 흑백사진이 나와 같은 방향의 하늘을 바라보고 있음을 느낀다. 


  나는 그와 함께 정읍의 하늘을 바라보았다. 때는 9월 초, 그는 곡식이 채 여물지 않은 늦여름 조용한 이 집에 찾아든 나에게 스스럼없이 그 피범벅이었던 혁명의 하늘을 비춰 준다. 그 하늘엔 대동의 세상을 외치며 죽창을 든 농민들이 줄지어 노래 부르고 있다. 


  그 하늘엔 피 묻은 배를 움켜쥐고 원수도 적군도 아닌 한 늙은 농부가 같은 동포에게서 죽임을 당하게 된 그 기구한 운명에 한치의 후회도 없이 서서히 꺼져 가는 모습이 비친다. 그 하늘엔 농민군들의 마지막 거친 숨소리가 슬픈 악보처럼 그려지고 있다. 그 하늘엔 봄이 왔음을 노래하던 그들만의 설레는 표정도 어려 있다. 부하의 밀고를 원망하지 않고 포승줄에 묶여 압송되어 가면서도 끝끝내 하늘에 기도했던 건 우리 이 백성들이 부디 권세가들의 개로 살지 않게 해 달라는…. 굳건하고 슬픈 녹두장군의 뒷모습이 배들 평야 저 멀리 아득히 그려지다가 안개 속에 사라지며 이러한 말을 던진다.


 ‘내가 아니라면 너희가 대동의 세상을!’     


  전봉준의 작은 방에 걸려 있던 액자를 바라볼 때 순간적으로 나는 그의 눈이 되어 버렸을 것일까, 어떻게 내 눈앞에 그렇게나 찬란한 그림들이 펼쳐졌던 것일까. 액자는 말이 없다. 액자 속 전봉준의 눈은 어느새 동학 동민 운동의 그 군중 속으로 사라져 버렸던 것일까? 


  마루청에 방명록이 있다. 간간이 다녀가는 사람이 있는 모양이고 그들의 짧은 글귀들은 하나같이 장군의 고귀한 영혼을 찬(讚)한다. 나도 펜을 들어 천천히 글을 써 나간다. 이 방명록이 만석보 터에 있던 그 타루초의 깃발이라고 생각하며 불경(佛經) 쓰듯이 정성스레 써 나간다.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며, 대동의 세상을 또한 기원합니다.’


  내 이 남기는 글도 자유의 세상을 이끌어 준 장군의 피에 감사하며 남은 우리의 역사는 하나의 힘찬 타루초가 되어 이 세상에 펄럭이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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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루초 : 티베트에서 청,백,홍,황,녹색의 천에 불경을 써 매달아 놓은 천

*소신공양(燒身供養) : 부처에게 공양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불사르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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