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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둘 Mar 29. 2023

피향정에서

[수필]


 이때 어떤 한 사람이 정자 안으로 들어온다면
피향정의 깊은 하늘 우물 속에서 천상의 복을 누리고 있는
아련한 밤 홍련(紅蓮)의 향기를 만나게 될 것이다.     

‘호남제일정(湖南第一亭)’이란 현판 아래 굵은 기둥 여럿이 장정들처럼 서서 지붕을 든든하게 업고 있다. 그 속에‘披香亭(피향정)’이라는 아름다운 붓글씨가 목판에 장엄하게 흘러내리고 있다. 강인한 기상이 피향정 지붕 선을 따라 흐른다. 어느결에 기둥 사이로 한복 자락이 보이는가 싶더니 신묘하게도 그림 한 폭이 나타나는 듯하다. 


  그림 속에서 막 연회가 시작되었다. 깔끔하게 차려진 음식이 한가운데 있고 그 주변에 선비들이 앉아 있다.  

  거문고 타는 소리가 들리고 그들 앞에 무희가 있으니 살결은 백옥같다. 

  무희는 거문고 소리에 맞춰 발뒤꿈치를 들며 엇박자를 맞춰 가며 교태로운 걸음을 걷는다. 

  사람들은 무희의 옷자락, 거문고 소리에 온몸을 휘감는 무희의 몸동작에 집중한다. 

  음악과 춤이 남긴 흥분이 쉬이 가라앉지 않는다. 


  거문고 소리는 공명하여 정자 내를 몇 차례나 돌다가 연지(蓮池)를 향해 멀리 사라져 가는가 싶더니 어느결에 다시 돌아와 피향정 나뭇결 속 틈 사이로 사그라진다. 

  소리가 사라질 즈음 연향(蓮香)이 마루 틈 사이에서 피어오르니 환하고 눈부시어라, 이곳은 극락정토이런가. 

  연향은 피향정 마룻바닥 곳곳에서 조그만 봉오리로 다시 솟아오르며 부활하고 있다. 

  연꽃들이 마루에 뿌리를 내리더니 이내 태양을 향해 몸을 곧추세운다. 

  눈앞에서 펼쳐진 이상세계(異象世界)는 천연덕스럽게 자리를 깔고 앉는다. 

  기둥 가운데 앉아 있는 이들의 뽀얀 두루마기들이 떨기꽃 마냥 아슬하게 앉았다 일어났다를 반복한다. 

  지붕에 노을이 걸릴 때까지 흥겨운 잔치가 이어진다. 어둠이 노을을 끌어 잡아 내려 앉히고도 풍류에 젖은 선비들의 여음이 연지 밭 사이를 노닐 때 누군가 함벽루에서 일제히 하늘을 향해 활을 쏘아 대니 그 소리에 놀란 새들의 날갯짓 소리가 크고도 우람하도다. 

  곤이 하늘로 날아올라 붕새가 되었나. 옛 궁사들의 현현(顯現)이 이렇듯 펼쳐지니 옛 시절, 풍류객들이 과연 이곳에 머무르지 않을 수 없겠구나.     


  그 옛날, 경남 밀양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다. 고장에서 행사가 열리면 공설운동장에서는 밀양 백중놀이*를 했다. 그 모습을 보려고 외지에서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특히 밀양 아랑제는 제일 큰 축제였다. 

  아랑의 전설을 안고 있는 아랑각과 영남루를 개방하여 백일장을 실시했다. 영남루는 절벽 위에 서면 아래로 흐르는 밀양강의 푸른 물결을 여유롭게 볼 수 있었다. 영남루 어느 기둥에 등을 기대어 그 강물을 내려다보며 시상(詩想)이 떠오를 듯 말 듯 아슬아슬하여 한참을 앉아 있게 되는 것이었다. 어떨 땐 누각의 나무 바닥 사이로 바람이 일제히 올라온다. 그런 순간의 한기(寒氣)가 좋아 백일장 작품 제출 시간이 끝나갈 무렵까지 끝까지 버티고 앉아 있곤 했다.


   곧 백일장 마감한다는 징이 울리고서야 일어나 팔자걸음으로 천천히 걸어가면 행사위원들이 나를 보고 웃으며


  “니가 선비가?” 


 했다. 그 말 듣고 보니 내가 정말로 선비가 된 것 같기도 했다. 영남루 마룻바닥에 엎드려 신선놀음하다가 시를 제대로 썼는지 어떤지도 모르고 작품을 내면 심사위원들이 시 쓴 종이를 훑어보면서 


  “그래, 니 글 쫌 꽤나 쓰는구나. 선비 해도 되겠다.” 


  하며 웃어 주곤 했다. 

  그곳엔 큰 현판들이 여러 개 붙어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영남제일루(嶺南第一樓)’였던 것 같다. 그곳에 올라 누구나 그 현판을 읽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부터인지 나는 누마루를 좋아하게 되었는데 어쩌면 학생 시절 영남루에서 개최하는 백일장에 참여하여 마룻바닥과 한 몸이 되어 뒹굴었던 그 옛 시절의 영향이 아니었을지 모르겠다. 


  피향정 마루에 앉아 보니 밀양강 굽이 흐르던 영남루가 생각난다. 그 마룻바닥이 건네주었던 고풍스러웠던 기억이 뇌리에 오래 잠자고 있다가 이제야 깨어난 모양이다. 

  영남에서 상서로운 기운을 받은 뿌듯함이 마음을 흔들어 흥겨움에 젖는다. 

  피향정 마룻바닥에 등을 대고 누워 본다. 든든한 기둥 사이로 나 있는 천정의 하늘 우물 속에는 맑은 물이 찰랑거리는 듯하다. 저 우물 속 물 한 번 두레박으로 떠 마셔 보면 좋겠다. 

  이왕이면 저 우물에서 뜬 물바가지에 버드나무잎 한 장 떨어지면 좋겠다.     


  피향정의 낮이 이렇듯 신묘스럽다면 밤엔 도대체 얼마만큼이랴.

  그날 밤, 연지도 잠이 들고 옛 궁사들 누각의 초라한 자존심마저 고요해진 무렵 피향정을 찾아왔다. 

  겹치마를 입은 선녀들이 치마를 휘휘 두르고 있는 ‘호남제일정(湖南第一亭)’. 

  현판의 글씨들이 학이 무리로 화(化)하여 칠흑 같은 밤을 불 밝혀 준다. 

  학은 하늘과 땅을 가로지르며 천기(天氣)를 열어 주니, 이제 밤의 연회가 제대로 시작될 모양이다. 

  이때 어떤 한 사람이 정자 안으로 들어온다면 피향정의 깊은 하늘 우물 속에서 천상의 복을 누리고 있는 아련한 밤 홍련(紅蓮)의 향기를 만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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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벽루(涵碧樓) : 피향정 내 목조 2층 누각(樓閣)으로 건립했던 사정(射亭; 활터)

*밀양 영남루(嶺南樓) : 경남 밀양에 위치한 누각. 보물 제147호, 

*밀양 백중(百中)놀이 : 경남의 밀양 백중놀이는 중요무형문화재로서 1980년 11월 17일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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