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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둘 Mar 29. 2023

그 사랑은 숲에 있다

[수필]


 인생이라는 ‘숲’으로 들어가려는 이들에게 언제나 길은 열려 있다.
 삶이 아름다운 것은 길을 걷기 때문이다.
 그 길은 숲에 있다.
 숲은 삶을 열어준다.
    

  나는 명산(名山)을 찾아다니지 않는다. 구태여 세계 제1봉이니 하는 멀고 높은 산에 오르기를 갈망하지도 않는다. 특히 가을철에 단풍놀이 삼아 떠나는 패키지 관광여행으로 떠나는 가을 산은 질색이다. 알록달록한 천연의 단풍잎들보다 얼룩덜룩한 사람들의 화려한 옷들이 자연의 색을 가릴뿐더러 카메라나 핸드폰을 높이 치켜들어 시야를 막아버리니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런 여행을 떠나는 것인지 모르겠다. 


  그저 나지막한 주변의 숲을 찾아다니기를 좋아할 뿐이다. 계절의 변화에 따라 다른 표정을 하는 있는 그들은 어디에 있더라도 근엄하면서도 즐거운 내면을 드러내며 그 자리에서 나무의 삶을 즐긴다. 내 고장의 숲들은 발 디딜 때마다 놀라운 광경을 선사해준다. 15년 전부터 시작된 이 숲 여행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생태여행이 인구에 회자되기 이전부터 숲을 찾아다녔으니 그간 내가 지어놓은 숲의 이름만도 스무 곳이 넘는다.


   그 중 ‘제인 에어의 숲’과 ‘로체스터의 숲’은 내가 가장 사랑하는 곳이다. ‘제인 에어의 숲’은 대구에서 유명한 전통 마을 입구에서 오랫동안 마을의 액운을 막아주던 비보림이다. 옛 선조들의 지혜가 담긴 이 숲은 울창하다 못해 한 치 앞의 길도 낼 수 없는 빽빽한 숲정이*다. 


  입구에 서면 앞으로 발을 어떻게 디뎌야 할지 알 수 없을 정도다. 그래서 이 숲에 발을 들여놓기란 쉽지 않았고 손쉬운 길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런 무성한 숲길에 얼른 발길을 들이지 않았다. 그 때문에 나는 오로지 호젓한 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나무도 울창했지만 맑은 냇물이 숲의 영험한 기운을 풀어놓아 주는 곳이었다. 그런 좋은 기운들은 숲의 생명들을 위해 항상 무엇인가를 하고 어디서든 머물러 있었다. 모든 것이 완전했고 그로써 평화로웠다. 그랬기에, 한여름 그 숲에 들어가 있노라면 이 세상 밖으로 다시는 나가고 싶지 않았다.     


  ‘제인 에어*’는 어릴 적부터 보육원에서 살았지만, 가난을 극복할 길이 없었다. 하지만 이 여인에게 운명적인 사랑이 찾아온다. 제인은 삶의 질곡을 이겨내고 자신의 사랑을 마지막까지 지켜낸다. 주인공의 험난한 삶처럼 거칠어 보이는 이 숲, 그러나 그 숲속에는 맑은 물이 흐르고 새들이 날고 바람조차 쉬어간다. 또 한순간, 숲은 제인 에어의 삶처럼 앞을 가늠할 수 없는 안개로 자욱해 알 수 없는 삶의 비밀로 가득 찬다. 


  이 숲을 거닐면 유독 제인 에어의 사랑이 생각났다. 그의 곁을 떠났지만 결국 다시 찾은 연인의 집은 불타고 장님이 되어 버린 가련한 옛사랑, 로체스터. 그러나, 망설임 없이 그의 손을 잡아주는 제인 에어. 만일, 사랑한다면 그 같은 사랑을 하리라고 다짐했던 소녀적 꿈을 다시 떠올려주게 한 숲이었다.


 언제든 갈 수 있지만 아무나 갈 수 없는 그 제인 에어의 사랑을 닮은 숲. 여름에 가면 숲이 너무 무성해 한 걸음 걷기가 쉽지 않은 숲, 겨울엔 죽은 생명들의 사체들이 널브러져 황야를 연상케 하는 쓸쓸한 숲. 그 속에서 내 소녀적 꿈은 고스란히 생명 했다.    

 

  어느 날, 우거진 숲을 지나고 있었다. 그곳은 ‘통화권 이탈지역’. 세상과 통할 수 없는 지역이었다. 그때, 저만치서 개떼들이 달려왔다. 여덟 마리 정도가 갑자기 내 주위를 포위하고 으르릉댔다. ‘아, 이렇게 숲에서 개들에게 죽임을 당하는가’ 했다. 그중 우두머리처럼 보이는 개를 발견했다. 다른 개들은 모두 그 개의 지시에 따르는 듯 일사불란하게 눈빛을 주고받고 있었다. 싸우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싸움을 먼저 걸었다. 눈으로 기(氣) 싸움을 하는 것. 나는 우두머리 개를 노려보았고 뒷걸음치지 않고 버티며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큰 개는 더욱 나를 노려보며 자기 부하인듯한 개들에게 눈짓을 보내더니 한 걸음씩 내게 바짝 다가섰다. 


  그렇게 눈싸움한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어느 사이 개들은 내 주변에서 하나둘 흩어지기 시작했다. 우두머리 개는 눈에 독기를 빼고 천연스럽게 그의 부하들을 데리고 저 먼 곳으로 유유히 사라져 갔다. 뒤돌아서는 개떼들을 보며 안도하는 찰나, 나는 로체스터의 지극한 사랑이, 제인을 향해 외쳤던 그 음성을 들은 것도 같다. 


 ‘제인! 제인! 어디 있소!’ 


  나는 과연 방금 어디에 있었을까, 왜 나는 이 위험한 곳에서 로체스터의 환청을 들은 것일까.      

  통화권을 이탈한 지도 오래되었고 핸드폰 배터리도 제로 상태였지만 어쩐지 싫지 않은 숲길을 나는 계속 걷고 있었다. 제인 에어를 향한 로체스터의 인생도 이처럼 두려운 것이 아니었을까. 어쩌다 나는 로체스터의 사랑에 대해서 깊이 새겨보며 그 숲을 걷고 있었던 것일까.


  산 너머 절이 있었다. 어쩌면 결국 장님이 된 로체스터의 초라한 집은 이런, 상상할 수 없는 아무와도 소통할 수 없는 절대적으로 외진 곳에 있지 않았을까, 그렇기에 다시 로체스터를 찾아온 제인의 발걸음은 더욱 험난하지 않았을까, 자기 몸이 만신창이가 되고 눈먼 장님이 되었어도 매일 제인을 기다리는 남자의 순정(純情), 그의 맑은 마음이 구름처럼 가슴에 젖어 들었다.


  가난하고 아프고 험난한 이 기나긴 인생의 숲길에서 참된 사랑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제인 에어의 숲과 로체스터의 숲. 이들의 숲은 서로 다른 위치에 있으며 사람들로부터 사랑받지 못하는 거칠고 투박한 곳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꼭 그 숲에만 이르면 그들의 삶을 되새겨보게 되는 것이니 숲길을 걸을 때 가슴이 뛰는 일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인생이라는 ‘숲’으로 들어가려는 이들에게 언제나 길은 열려 있다. 삶이 아름다운 것은 길을 걷기 때문이다. 그 길은 숲에 있다. 숲은 삶을 열어준다. 이제 그 숲이 나만의 ‘제인 에어의 숲’과 ‘로체스터의 숲’이 아니라 더 많은 이들에게 사랑의 상징으로써 자리매김하였으면 싶고 이 세상의 모든 숲들이 사랑에 깃들여 있음을 기억하기 바란다.     


  ‘세상의 사랑이여, 이 연인들처럼 순정하라, 그 사랑은 숲에 있다!’    



 세상의 사랑이여,
 이 연인들처럼 순정하라,
그 사랑은 숲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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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숲정이 : 농촌 마을의 배후 산지 비탈면에 육림되는 전통문화적인 숲

* 제인 에어 : 영국 여류작가 ‘샬롯 브론테’의 소설 제목, ‘제인 에어’는 험난한 인생을 살아간 소설 속 여주인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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