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보관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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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서 박소연입니다.
특별한 것 없이 지나간 중학교 시절도 고등학생이 되어 생각해보니 '인간관계'에 열심이었습니다. 훌쩍 지나가 버린 고등학교 시절도 대학생이 되어 생각해보니 '나 자신'에게 최선을 다한 시간이었습니다. 빠르게 지나가는 시간 속에서 내 삶도 무의미하게 흘러가는 듯합니다. 하지만 무언가에 최선을 다한 시간은 결국 추억이란 필름이 잔뜩 씌워져 내 안에 판타지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당신의 짧은 순간 중 판타지로 쓰일 스토리는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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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use, 장면이 되는 순간
소설을 읽기 시작한 순간부터는 글의 표현에 많은 관심이 갔다. 문장을 써내는 소설가들은 삶에 들어온 어떠한 장면도 놓치지 않겠다는 태도로 문장을 쓰는 듯했다. 그들은 집요하게 하늘을 표현하고, 자라난 나무에 시선을 두고, 가장 따뜻한 문장으로 상대와의 만남을 이야기했다. 인생의 아주 작은 티끌들을 어찌 저리 멋지게 표현할까. 그 티끌들이 정말 아름답기에 그런 표현이 나오는 걸까 싶어 어느 하루는 소설의 한 장면을 그대로 따라 해봤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커튼을 쫙 펴고, 낮은 건물과 높은 나무에 감탄해보고, 어두운 바에서 칵테일을 홀짝였다. 그렇게 판타지가 일어나길 기대한 24시간이 끝났다. 한데, 소설처럼 살아본 날은 가장 평범하고 별다를 것이 없었다.
소설 속 판타지가 꼭 멋진 소재로만 만들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중요한 건 얼마나 대단한 이야깃거리인가가 아니라, 사소한 순간을 어떻게 그리는 가이다. 우리, 이야기를 듣고 들려주자.
이제 당신의 작은 순간이 판타지로 피어날 시간이니까.
# 손을 잡고 걷던 밤, 낙산공원에서 AM 1:26의 이야기
스무 살의 솜털 같은 연애가 이제 막 시작된 밤이었다. 그 연애가 얼마나 바보 같았냐면, 손을 좀 더 잡고 있고 싶은 마음에 집에 가지도 못하고 그 추운 겨울 길을 가뿐히 걸었다. 어느덧 새벽에 가까워져 오는 시간, 지도 앱도 켜지 못한 채 그저 걸었다. 어디냐고 재촉하는 가족들의 전화에 휴대폰을 꺼 놓은 지 오래였기 때문이다. 동대문 한가운데에서 시작한 걸음이었다. 우리는 어디쯤에 있는 거지? 그냥 흘러가는 대로 가보자는 마음으로 골목을 흘러 다녔다.
우리는 은근슬쩍 사람이 드문 곳으로만 걸었다. 그러다 보니 자꾸자꾸 어두운 산을, 계단을 오르게 됐다. 손을 잡고 걸어서인지 나에 대해 알려주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았다. 너도 나와 같은 마음이었을까. 오르막을 오를수록 난 네가 뭘 좋아하고 싫어하는지를 알아갔다. 그렇게 네가 점점 더 좋아질 것 같다는 생각이 마구 밀려왔던 순간, 나는 숨을 참으며 정신을 차려야만 했다. 부끄러워 바닥으로 떨어지는 고개를 처음으로 들어 올렸다. 그렇게 고개를 들어 올린 곳엔 반짝거리는 세상이 있었다.
넓게 펼쳐진 야경과 불빛, 탁 트인 광장 같은 곳엔 너와 나밖에 없었고, 꼭 잡은 손은 여전히 따뜻했다. 불빛이 가득한 하늘도 왠지 핑크빛 같은 게 딱 라라랜드 같았다. “야, 뭔가 라라랜드 같아.” 그렇게 너와 내가 각각 라이언 고슬링과 엠마 스톤을 흉내 내며 춤을 추기도 했다. 한바탕 웃고 나서 성곽길을 찬찬히 내려갔다. 도중에 네가 걸음을 확 멈추더니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우리 결혼할래?” 그래서 나도.
“그래, 까짓것 하자!”
그 밤이 지난 지 어느덧 3년이나 되었다. 무작정 해맑았던 저 멘트는 인제 와서 보니 너무나 무의미하다. 그와 나는 지독히 현실적인 이유로 이별한 지 오래였으니까. 어쩌면 그 밤에 라라랜드를 연상한 것이 우리 관계의 복선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마지막 연애 이전의 모든 연애는 하나같이 다 라라랜드 같을지도 모른다. 연애는 현실이기에. 그래도 그냥 흘러가는 대로 가다 보면 어딘가 닿아있을 것만 같아 나는 여전히 밤을 걷는다. 너와 내가 그저 흘러 낙산공원에 닿은 것처럼.
# 아주 작은 타임캡슐 PM 3:33의 이야기
중학생 때는 친구들끼리 모여 종종 서로의 미래를 상상하곤 했다. “너는 뭔가 말하는 일을 하고 있을 것 같아” 라던지,“야, 너 대학 가면 맨날 술 먹기 바쁠 것 같아” 라던지. 그러다 문득 우리가 정말 어른이 될까. 어른이 되어서도 여전히 만날까를 얘기했다.
그런 고민을 바로 얼마 전까지 한 것 같은데, 나는 벌써 대학 졸업을 앞둔 스물셋이 되었다. 스물셋은 여전히 유치해서 약속이 없는 날엔 무료히 방 안을 굴러다닌다. 그마저도 지겨워지면 책장에서 먼지 쌓인 졸업앨범을 열곤 한다. 1반부터 8반까지. 찬찬히 그때의 우리를 구경하다 멈칫. 졸업앨범에 숨겨놓은 타임캡슐이 생각났다. 앨범의 마지막 페이지에는 졸업을 앞두고 각자 한마디씩 싣곤 했었다. 나열된 한 마디들의 앞글자들만 읽으면. 2022년 12월 5일 운동장에서 만나 10am. 그때는 2022년이 오긴 하는 거냐며 킬킬대고선 암호를 숨겼는데, 이제 금방이다. 과연 누가 이 작은 암호를 잊지 않고 찾아올지. 타임캡슐을 개봉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 어둠 속에서 만난 한줄기 빛 PM 9:42의 이야기
이유를 도통 모르겠는데 눈물이 날 것 같은 날엔 우선 지갑만 들고 버스를 탄다. ‘버스 타기’를 위해 버스를 타는 유일한 날이다. 막상 타면 딱히 할 일이 있는 건 아니지만 지루하지도 않다. 별의별 간판을 보며 울적한 마음을 오롯이 느끼면 어떤 때는 재미있기도 하다. 나 홀로 이 우울한 장면의 주인공이 된 것 같아서.
어느 날도 버스에서 맘껏 우울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날의 기분은 최악이라 창밖 구경이 재밌지도 않았다. 촌 동네의 버스가 종점에 다다르니 주변이 아주 새까맸다. 어둠과 어둠. 그러다 창밖으로 한순간 밝은 빛이 훅 끼쳐 고개가 절로 돌아갔다. 허허벌판에 자리한 카페가 홀로 빛을 내뿜고 있었다. 홀린 듯 벨을 누르고 내려 빛을 향해 걸어 들어갔다. 짤랑. “어서 오세.. 어?” 카페에서는 오래전 친하게 지냈지만, 전학 간 친구가 카운터를 보고 있었다. 놀라서 처음엔 그녀가 왜 여기 있는지를 물었고, 나중엔 번호를 나누기까지 했다. 잊힐 뻔한 사람과는 이렇게 기가 막히게 다시 맺어져 인연을 이어나갔다. 마치 이 친구를 다시 만나기 위해 버스를 탔어야만 했던 것처럼. 그렇게 빛을 만났고 나의 우울에도 빛이 들었다.
# 판타지로 완성될 당신의 작은 순간은 무엇인가요?
버스를 타고, 단골 가게에 들르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순간은 긴 인생의 짧은 찰나들이다. 이 찰나들도 잘 들여다 봐주면, 마치 소설 같은 순간이 된다. 필요한 건 그 순간순간에 집중해 그때에만 볼 수 있는 아름다움을 포착하는 것.
길에서 만난 야옹이가 졸졸 쫓아오던 순간, 늘어지게 낮잠을 잔 뒤 소소하게 영화와 맥주를 즐기는 순간, 누군가를 사랑하다 보니 좋아하지 않던 음식이 좋아진 순간.
모든 순간은 이야기가 될 수 있다. 어쩌면 당신의 삶에도 있을 수 있다. 판타지로 쓰일 스토리.
Vol.12 <Pause, 장면이 되는 순간>中
Editor 이태림
Photographer 김수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