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13 <야만으로부터>

[기록보관소]

by 매거진 미러

사서 최예림입니다.

여러분은 턱 끝까지 차오른 불쾌감을 어떻게 내뱉나요.
우리는 언어와 행동으로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기도, 받기도 하며 이를 목격하기도 합니다. 무책임, 무관심, 무력함과 같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 폭력을 겹겹이 둘러싸는 상황도 있습니다. 그래서 별수 없이 차오르는 분노를 삼키기도 합니다. 폭력에 맞대응하는 것과 무신경하게 대하는 것. 어떤 것이 우리와 닮아 있을까요.
순환되는 폭력과 어딘가 익숙한 불쾌함이 담긴 장편소설 ‘야만적인 앨리스씨’를 소개합니다.

_
소설 <야만적인 앨리스씨>는 시시때때로 ‘씨발’을 내뱉는다. 폭력이 비일비재하게 벌어지는 앨리시어의 일상은 가장 날 것의 언어들로 내깔긴다. 문장들은 읽을수록 불쾌하고 익숙하다. 모든 폭력 역시 그러하다. 지금 이 시각, 누군가에게 세상은 그저 씨발이다. 지금부터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단단히 응고된 불쾌함에 대한 증언이다. 명치 언저리에 꿀렁이는 울음을 참고서.

- 앨리시어의 불쾌한 나날
재개발 보상금에 대한 열기로 달뜬 고모리. 이 마을에서 나고 자란 소년 앨리시어와 그의 어린 남동생이 있다. 그는 수시로 어머니에게 얻어맞는다. 늙은 아버지는 이 초상에 크게 관심 두지 않는다. 부러진 일상이 반복된다. 폭력에 당위는 없다. 때리니까 때리고 싶고, 때리고 싶으니까 가속적으로 때린다. 앨리시어는 이를 ‘씨발’적인 상태라고 말한다. 유려한 수사가 아닌, 뭣도 없는 비속어가 어떤 연민과 비애 없이 오로지 분노만을 달군다. 우리는 건조한 문장들의 불쾌함에 번번이 얽매이면서 적나라한 폭력의 양태를 지켜본다.
이 서사 뒤에 무덤과도 같은 고모리가 있다. 시종일관 폭력적인이곳에선 굶주리던 마을 사람들이 아이를 잡아먹었다는 설화가 지명의 유래라고 떠돈다. 가장 왕성하게 자란 은행나무는 사람들이 잡아먹은 개와 개들의 내장, 뼈, 가죽의 무덤이다. 언젠가 먹힐 개들은 개장이 열려도 도망가지 않는다. 도망쳐도 갈 곳이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이를 증명하듯 논둑에서 가죽이 되어가는 개가 있다. 달처럼 부풀어 올랐다가 납작하게 가라앉는 형상은 무력하게 반복될 뿐이다. 앨리시어의 삶 위에 놓인 모든 것이 반복, 교차, 순환하며 고약한 냄새를 풍긴다.

- 앨리시어의 무한한 추락
폭력의 밤을 넘기기 위해 앨리시어는 동생에게 짤막한 환상을 들려준다. 이 이야기들은 현실로부터 도피하고자 하는 욕구의 반영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현실을 모방한 거울이다. 시댁의 괴롭힘을 못 견딘 여우가 온 집안 인간들을 다 잡아먹는다는 첫 번째 이야기는 앨리시어의 어머니를 비춘다. 두 번째 이야기는 가상생물 ‘얌’들이 지나친 욕심 때문에 멸망해버린다는 내용으로, 더 많은 보상금을 타려는 고모리 사람들을 표상한다. 그리고 마지막 ‘앨리스 이야기’는 앨리시어의 삶을 관통한다. 토끼굴로 미끄러진 앨리스는 계속해서 떨어지기만 한다. 무언가 붙잡지도 못한 채, 바깥으로 올라설 시도도 못 한 채 그저 하염없이 말이다. 앨리시어는 이 이야기를 끝맺지 못한다. 그날 밤, 동생을 두고 집을 나온 그는 어머니를 이길 방법을 깨닫는다. 드디어 추악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 믿었을 것이다. 그러나 동생의 이름은 지워졌고 동생을 삼킨 고모리엔 허망한 비만 내릴 뿐이다. 미완성된 이야기를 따라서 앨리시어는 무한히 낙하한다. 그가 바닥에 달라붙은 개처럼 고모리를 벗어나지 못한 채 과거를 반추하는 이유이다. 이것은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다.

- 야만의 시발(始發)
날 것의 이야기는 거듭 반복되어 폭력으로 다시 돌아온다. 앨리시어가 당하는 ‘씨발됨’ 에는 계보가 존재한다. 앨리시어의 어머니는 자신의 아버지에게 얻어맞는다. 그녀는 눈밭에 알몸으로 서서 어머니를 생각한다. 왜 어머니는 아무것도 하지 않을까. 무관심의 공기 속에서 ‘포스트 씨발년’은 발아한다. 그렇게 폭력으로 완성된 그녀에게 앨리시어가 얻어맞는다. 앨리시어의 아버지 또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소년은 도움을 청해 보았지만, 공무원들은 이를 서로에게 떠넘기기 바쁘고 상담사는 상투적인 말만 늘어놓는다. 결국 그는 어머니에게 ‘맛을 보여주겠 다’고 다짐하며 종래에는 그녀와 똑 닮은 모습을 한 ‘씨발년으로서’ 거리에 서게 된다. 폭력의 객체가 주체로 변모하는 것은 사실 흔한 일이다. 가장 가까워서 쉽게 스며들고, 그래서 닮아간다. 이러한 대물림의 중심에는 무관심이 있다. 썩어 흐르는 일상이 만든 구덩이에서 의지할 구석이 자기 몸뚱이뿐이라면, 수단의 정의를 따지고 드는 일은 사치일 테다. 자신을 상처 입힌 방법을 세습하는 것. 그것은 사뭇 비참하고 섬뜩하기까지 하다. 무관심으로 구축된 것들 속에서 폭력은 무한히 복제된다. 야만은 그렇게 만들어진다.

- 우리의 회답
누군가 분노할 힘을 잃고, 삶이 밟혀 속절없이 함몰되는 순간에도 세계는 지나치게 조용하다. 알기 때문에 모르고 싶어 하고, 모르고 싶기 때문에 결국은 모르는 척한다. 세계가 야만을 대하는 자세다. 그리고 우리는 감색 정장 차림의 여장 부랑자 앨리시어와 마주한다. 그는 끊임 없이 그대를 호명한다. ‘그대는 어디까지 왔나.’ 이야기 곳곳에 놓인 이 질문을 통해 텍스트 안팎의 경계는 희미해진다. 그리하여 앨리시어의 이야기를 따라가는 동안 우리는 단순한 독자를 넘어 그대가 된다. 그대는 앨리시어의 체취에 얼굴을 찡그리는 이다. 학대를 외면하던 어머니, 아버지다. 고모리 사람들이기도 하고 상담사이기도 하다. 타인의 몸부림에 조용하던 그대는 마침내 세계다. 그저 입을 다물고 폭력의 양태를 지켜보던 행동에서부터 여러 감정은 얽히고설킨다.

<야만적인 앨리스씨>는 우리에게 묻는다. 그렇다면 정말 야만적인 것은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에 있고, 어떤 대답을 해야 하는가. 폭력은 순환한다. 앨리시어들은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나 없다. 날 것의 증언들을 목격한 우리는 이제 야만에 놓인 타인을 마주해야만 한다. 순환의 고리는 그렇게 끊어진다. 목울대까지 걸린 울음을 뱉자. ‘앨리시어가 그대를 기다린다.’

Vol.13 <야만으로부터> 中
Editor 이눈솔
Illustrator 류승주

keyword
작가의 이전글Vol.12 <Pause, 장면이 되는 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