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5 <RAW EMOTIONS>

[기록보관소]

by 매거진 미러

사서 조수빈입니다.


이 세상에 ‘거짓’이 없다면 우리의 삶은 어떻게 달라질까요? 하고 싶은 말을 내뱉어 잠시 마음이 편할지라도 금방 다음 일을 걱정할 테지요. 진실을 듣고자 하는 것도 인간의 본능이지만 거짓을 말하는 것 또한 우리의 원초적 본능입니다. 날 것의 감정을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한 채 숨기는 데에 급급한 매일.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누군가의 글이 답답한 순간들로 옥죄어진 마음을 풀어줄 하나의 키가 될 거예요.
오늘은 자연스러운 감정을 숨겨야만 했던 당신의 이야기를 담은 5호의 기사를 소개합니다.

‘매일매일 울음을 참는 기분으로 살아가고 있다.’
타인의 독백을 읽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될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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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힐 수 없었던,
조금은 불편한,
RAW EMOTIONS


1) 오늘도 어김없이 집에서 핸드폰만 붙잡고 있다. 태평하게 침대에 누워서 글 쓸 거나 그림 그릴 거 생각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내년엔 진짜 길거리에 나앉을지도 모르는데 5분도 안 돼서 어떻게든 되겠지 죽기야 하겠어? 싶다. 너무 한심하다.
정말 하루하루 쉴 틈 없이 물불 안 가리고 닥치는 대로 일을 해야 0으로 돌아간다. 0이 아니라 플러스를 해도 언제 날릴지 모르는 세상인데 나는 이 나이에 마이너스로 산다.
돈 많이 벌고 싶다.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술 사고 밥 사고, 여행도 가고 싶을 때 돈 걱정 없이 떠나는, 그런 거 많이 할 수 있는 사람이고 싶다.

내가 사치를 했을 때 그게 사치라는 것도 모르고 내가 이런 거를 해도 될까 하는 생각이 안 들고 싶다.

2) 별거 아닌 고민에는 별거 아닌 조언이 나올 수밖에 없다. 너의 삶이 힘든 거 나도 알아. 인간관계도 학교생활도, 사랑 문제도 어느 하나 쉽지 않겠지. 그런데 나는 너의 고민이 하찮다. 동아리 선배가 어떻고, 과제가 어떻고 애인과의 잠자리가 어떻고. 내겐 그저 복에 겨운 투정으로밖에는 안 들린다.
나는 당장 스스로를 좀먹는 낮은 자존감에 시달리고, 지원은커녕 부담을 안겨주는 부모님과 함께 살며, 하루하루가 과제고, 배움 없는 노동뿐이다. 정말 같잖다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론 네가 베푼 고민들로 니 생활의 끝자락이라도 닿아보려 하는데 그럴수록 이런 나의 추잡한 열등감은 숨겨도 새어 나오는 것 같아 두렵다. 겉으로 티는 안 내지만 이젠 복에 겨운 니 고민들 들어주기도 지친다. 뭐, 다 내가 쓰레기 같아서 그렇지.

3) 아빠가 누구보다 성실하게 살았다는 거 알아. 근데 난 아빠처럼 성실하게 살 수도 없고 그렇게 살고 싶지도 않아. 아빠한테 나태함은 악이고 불행이지만 나한테 나태함은 부러움이고 행복이야. 나는 아빠가 원하는 만큼 성실한 사람이 아니고 아빠가 산만큼 열심히 살수도 없어. 아빠의 실망이 두려워서 하고 싶은 걸 못 하고 늙어 가면 나중에 아빠를 원망할 거 같아. 아빠 말대로 사람은 어떤 순간에도 이유와 핑계를 만드니까 나는 어떤 이유와 핑계를 대서라도 아빠를 원망할 거야. 내년에는 아빠의 실망에도 눈 하나 깜짝 안 하는 딸이 될게. 내년에는 아빠의 반대와 충고를 한 귀로 흘리는 딸이 될게. 그게 효도야. 효도할게. 아빠 눈치 안 보고 내가 하고 싶은 거 고집부려서 꼭 효도할게.

Vol.5 <RAW EMOTIONS>中
Editor 시서영
Illustrator 시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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