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6 <은희의 거짓말>

[기록보관소]

by 매거진 미러

사서 박소연입니다.


“네가 너무 좋아. 네게 감사한 마음뿐이야. 널 사랑해. 빛나는 널 닮고 싶어”. 나와 같은 마음이 아니라 상대에게 부담이 되진 않을까 삼켜왔던 말들. 들뜬 내 맘을 모두 표현해버리면 상대는 너무 놀라 부담스러운 나에게서 멀리 떠날 것만 같았습니다. 나중에 해야지 하고 넣어둔 말들은 그 말을 못 했기에 발전되지 못한 관계에선 더욱 꺼낼 일이 없었습니다. 솔직한 마음을 그날 말했다면 지금 우리 관계는 달랐을까요? 이렇게 놓친 인연을 생각하며 이제는 감사한 마음, 사랑하는 마음, 부러운 마음 모두 표현해야지 다짐하곤 합니다. 말하지 않으면 모르니까요.

거짓말로 얽힌 세 남자와의 관계 속에서 여자는 누구보다 솔직하게 자신의 감정을 표현합니다. 초연히 거짓말을 하면서 그들에게 느낀 감정은 감추지 않는 미워할 수 없는 매력을 지닌 한 여자의 이야기를 담은 5호의 기사를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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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촌의 늦은 여름날, 배우 지망생 은희는 연기수업을 마치고 나온 그때, 길을 헤매는 일본인 관광객 료헤이를 만난다. 서로의 언어를 완벽히 이해하진 않지만, 그들은 나름의 대화를 나누며 길을 찾는다. 료헤이와 헤어진 후, 은희는 남자친구인 현오를 만나러 남산으로 향하고 같은 시간, 은희에게 미련을 가지고 있던 구남친, 유부남 운철은 은희의 SNS를 보고 찾아오게 된다. 남자친구와 금방 헤어진 은희는 공교롭게도 운철마저 마주친다. 과거의 남자, 현재의 남자 그리고 새로운 남자를 동시에 만난 여자. ‘최악의 하루’는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이들의 하루를 그린다.

‘솔직하다’는 건 쉽지 않다. 누군가와의 관계 속에서 내 감정을 터트리기도, 그리고 표현해내기도 쉽지 않다. 누군가의 잣대나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자기감정을 지키기란 힘든 일이다. 모두에게 한결같은 사람으로 남아야 한다는 강박도 있었고 그렇다고 거짓으로 대하기엔 왠지 양심이 찔렸다. 어쩌면 사회적으로 씌워진 가면 속에서 우리는 참아야 했고 억눌러야 했다.

오늘 처음 만난 남자 료헤이와 지금 사귀는 남자친구 현오, 그리고 현오와의 교제 중에 잠시 만났던 운철까지, 은희는 세 명의 남자를 만난다. 그녀의 말투, 목소리, 표정 심지어 머리 모양까지. 그녀는 세 남자를 만날 때 마치 각기 다른 가면을 쓴 듯 변한다. 어떤 이는 은희를 가식적으로 보거나 남자관계가 복잡한 여자로 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은희가 가진 관계에 따라 다르게 비춰진다. 단 한 가지, 확실한 건 은희는 항상 솔직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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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서 그녀는 자주 ‘거짓말’을 한다. 처음 만난 료헤이에게 아직 배우 지망생인 자신을 ‘배우’라고 소개했다. 료헤이와 차를 마시며 약속 시간에 늦자 현오에게 ‘차가 막힌다’고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그리고 우연히 만난 운철에겐 ‘친구를 만나러 간다’고 거짓말을 하고 남자친구인 현오를 만나러 갔다. 그런데도 은희가 솔직했다고 하는 것은 그녀는 자신의 감정을 속이거나 숨긴 적이 없기 때문이다. 외로울 땐 새로운 사람을 만났고, 좋은 사람에겐 호감을 보였다. 같이 있기 싫은 사람에겐 “혼자 걷고싶다”고 말했고 같이 걷고 싶은 사람에겐 “같이 걷고 싶다”고 말했다. 설렐 땐 사뿐히 걷는 모습, 심경이 복잡할 땐 머리를 질끈 묶는 모습, 상처받았을 때는 눈물을 뚝뚝 흘리는 모습은 전부 은희가 감정에 충실한 사람이라는 것을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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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종종 감정을 숨기며 살아간다.


특히 관계에 있어서는 더욱 그렇다. 만나자마자 나쁜 새끼라는 말이 절로 나오게 하는 현오, 그리고 다시는 마주치기 싫어 거짓말을 하게 만드는 운철. 은희는 이 둘에게 거짓말을 일삼는 최악의 여자였다. 하지만 이는 진짜 은희가 최악이라서가 아니다. 그들에게 그렇게 비쳤기 때문이다. 은희가 그들을 대하는 태도는 그들의 관계와 닮아있다. 현오는 데이트 도중 실수로 다른 여자의 이름을 불렀고 운철은 은희를 사랑한다면서 전 부인과의 재결합을 통보했다. 진짜 최악인 그들에게 상처받고 싶지 않은 마음에, 그녀는 성격과 표정을 바꾸고 거짓말을 했다. 이런 은희를 우리는 진실하지 못하다고 할 수 있을까?

계속된 지적에 지쳤던 연기수업이 끝난 후, 은희는 길에서 우연히 일본인 소설가 료헤이를 만났다. 은희는 길을 물어오는 료헤이와 복잡한 서촌의 길을 함께 헤맸다. 서로가 ‘거짓말을 만드는 직업’을 가졌다거나, 자신은 ‘베드엔딩만을 써온 소설가’라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언어는 서툴렀지만 그들은 많은 대화를 나누며 길을 찾았다.그 길에는 설렘이 녹아들어 있었고, 헤어짐에는 아쉬움이 남아있었다. 료헤이와 만났을 때의 은희는 가장 자연스럽고 사랑스러운 모습을 보여줬다. 일본어를 모르면서도 료헤이에게 “곰방와”하며 일본어로 인사를 건네는 당돌함과, 똑같이 길을 모르면서도 먼저 발을 내딛는 은희의 적극성이 드러났다.

우연히 만났지만 료헤이는 현오나 운철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줬다. 료헤이는 서툰 언어 속에서도 은희의 말을 진심으로 들어주고 작은 실수를 다정히 교정해줬다. 료헤이와 은희는 짧은 만남 속에서 좋은 관계를 맺었다. 그래서 은희는 가장 편안하게 웃고 걸었다. 그리고 하루의 귀결에선, 그들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자연스럽게 마주쳤고, 남산 길을 따라 올라가며 해피 엔드를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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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희는 관계에서 상대방이 자신을 어떻게 대하는가에 따라 다른 모습을 보여줬을 뿐, 항상 진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얽히고설킨 관계 속에서도, 은희는 자신의 감정에 충실히 행동했으며 최악의 하루도 적극적으로 헤쳐 나갈 수 있었다. 처음엔 어색하다고 지적받았던 연기도 결국 모든 일이 지난 후엔 완벽히 해냈고 평온을 얻었다. 은희는 관계 속에서 성격을 바꾸고 초연히 거짓말을 한다. 한편으론 감정에 충실해 표정을 숨기지 못하는 솔직한 모습도 보인다. 이런 양면의 모습을 동시에 가진 그녀는 그녀를 나쁘게 볼 수 없게 만드는 매력을 가졌다.

이런 매력을 느꼈다면, 어쩌면 우리는 모두 은희를 꿈꾸고 있을지도 모른다.


Vol.6 <은희의 거짓말> 中

Editor 시서영

Illustrator 시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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