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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매거진 미러 Jul 03. 2024

Vol.27 <민지를 아울러>

기록보관소

사서 이연주입니다.


어린 시절, 베란다를 꽉 채운 책장 사이에서 그림책 읽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유독 애정을 듬뿍 담은 책은 성인이 되어서도 기억에 남습니다.

같은 책이지만 지금의 나는 새로운 눈으로 책을 읽습니다.

성인이 된 나는 어린아이와는 다른 사람이기 때문이지요.


최민지 작가는 20대에게도 그림책이 편안하고 재밌는 문학이 되기를 바랐습니다.

그의 어린 시절과 그림책에 담은 가치를 만나보세요.


-



“어렸을 땐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기린 사진을 봤어요.”


그림책 작가 최민지를 만났다. 여전히 기린을 좋아하는지 묻자 그는 기린 사진이 매일 올라오는 인스타그램 계정을 소개해 주었다. 마주 앉아 웃다가 다음 질문을 골랐다. 기린처럼 내내 이어져 온 박동이 있을까요.



반갑습니다. 요즘 신간 준비로 바쁘시죠.

- 최근에 마감을 마쳐서 지금은 수정만 남은 상태예요. 아주 바쁜 시기를 무사히 넘기고 숨을 돌리는 중입니다.


신간 제목은 〈벽 타는 아이〉라고 들었어요. 아무래도 주인공은 ‘벽 타는 아이’겠죠?

- 맞아요. 항상 제목이 스포일러네요.(웃음) 그 아이는 ‘보통 마을’에 살아요. 주민들은 전부 모자를 쓰고 있고, 평범함에 병적으로 집착하는 곳이죠. 이상하다고 여겨지는 아이들을 성에 가둬둘 만큼요. 마을을 구상하면서 획일화된 오늘날을 떠올렸어요. 현대 사회의 고정관념을 모자에 비유해 보여주려 했고요. 그래서 아이들이 갇히는 성 이름도 ‘모자 성’이에요.


전작 〈하늘에서 동아줄이 내려올 줄이야〉와 차별점이 있을까요?

- 전작은 그림으로만 진행되는 그림책이었어요. 그러다 보니 이번에는 다시 글을 담고 싶더라고요. 그래서 〈벽 타는 아이〉는 더욱 서사적인 이야기로 만들었어요.


반가운 소식이네요. 작가님 작품 속 어린이 화자의 짧은 대사를 무척 좋아하거든요.

- 저는 그림책에서 글이 긴 걸 선호하지 않는 편이에요. 그림책은 말 그대로 그림으로 이야기하는 장르라 생각해서요. 글은 그림이 못다 한 부분을 채워주는 정도죠. 늘 짧은 글을 쓰고 싶어 하다 보니 자연스레 핵심만 말하게 됐어요. 그 덕에 응축된 대사들이 나올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대사 이야기를 더 해볼게요. 천진난만하지만 가볍지 않아요. 솔직하고 또 예리하기도 하죠. 정말 어린이처럼요.

- 저는 작업 막바지에 어린이의 말이 맞는지를 꼭 따져 봐요. 〈나를 봐〉를 작업할 때 완전히 어른의 말로 써버린 적이 있거든요. 나중에 확인해 보니 ‘난 알고 있었어. 네가 혼날 이유가 없다는걸.’ 이런 식으로 적었더라고요. ‘혼나다’라는 단어를 쓰면 안 될 것 같았고, 그렇다고 ‘착한 아이’라는 표현도 영 아닌 것 같아서 ‘어떤 아이인지 알고 있었어.’ 정도로 수정했어요. 최대한 편견을 빼려고 했죠.


〈월간 그림책〉에 수록된 작가님의 글을 읽었어요. 본문 중 ‘일곱 살 민지체’라는 표현이 재밌어서 기억에 남아요.

- 제가 그린 〈코끼리 미용실〉을 보면 어릴 적 일기장을 따라 쓴 글자 그림이 등장해요. 개중에서도 일곱 살 때 글씨체가 가장 마음에 들어서 그때의 일기장을 따라 그렸어요. 〈벽 타는 아이〉에는 열 살 민지체를 따라 쓴 장면이 있어요. 옛날에 쓴 일기장을 읽고 글씨를 따라 쓰는 게 재미있 어요. 착한 척을 많이 했더라고요.(웃음) 어렸을 때는 일기를 솔직하게 안 썼거든요. 


어렸을 때 오히려요?

- 네. 지금은 굉장히 솔직하게 써요. 그 시절에는 담임 선생님께 일기장을 보여줘야 했잖아요. 그걸 항상 의식했던 기억이 있어요. 선생님이 밑에 답글을 달면 저는 그 답글에 다시 답글을 달고는 했어요. 


작가님은 어떤 어린이였을지 궁금해지는데요.

- 속이 엄청 복잡했던 것 같아요. 나서기를 좋아하는 성격이었는데 그걸 숨기려고 전전긍긍했어요. 왜 그랬는지는 몰라도 저를 너무 드러내면 안 된다고 생각했죠. 나서고 싶은 마음을 들켜서는 안 되지만 반장은 너무 하고 싶어서, 누가 추천해 줄 때까지 가만히 기다렸어요.


와, 정말 복잡한 어린이였네요.

- 〈코끼리 미용실〉의 주인공처럼 착하다는 말에 얽매였던 거죠. 혼나기도 싫었고…. 그런데 지금 어린이들을 봐도 ‘다들 얼마나 복잡할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단순한 어린이는 없는 것 같아요. 사실 느끼는 건 어른이나 어린이나 비슷하다고 생각해요. 외로움 같은 거요.



타 인터뷰에서 ‘어린이의 마음을 잘 아는 게 아니라 그저 내 이야기를 할 뿐’이라고 말씀하신 것을 인상 깊게 봤어요. 그림책 작업을 하실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가 있을까요?

- 어린이가 먼저 읽을 수 있는지를 항상 염두에 둬요. 어떤 어린이에게는 제 책이 인생 첫 책일 수도 있잖아요. 그 생각을 하면 여러 의미로 떨려요. 그리고 무엇보다 이건 제 이야기니까 제 마음에 드는지도 중요해요. 분명하게 어린이를 향해 있는 이야기여야 하되 제게서 나온 이야기여야 하고 제가 좋아하는 이야기여야 하는 거죠.


소재를 고르는 게 쉽지 않을 것 같아요.

- 하고 싶은 이야기는 사실 너무 많아요. 거의 쌓아놓고 있죠. 더미북*을 만들 때 저만의 법칙이 있는데요. ‘30분을 넘기지 말 것’이에요. 이야기는 짧은 시간 내에 쓱 만들어 내는 편입니다.


그동안은 어떤 식으로 소재를 포착했나요?

- 초창기 세 작품까지는 제가 그때그때 하는 생각이 소재가 됐던 것 같아요. ‘어린이가 홀로 목욕탕에 가고 싶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 ‘심심할 때 하늘에서 방방이 떨어지면 나는 어떻게 할까?’와 같이 질문 형태로 우선 떠올랐어요. 요즘에는 그림책으로 하는 이야기가 다른 문학 장르들과 어떻게 다를 수 있을지를 생각하게 돼요. 그러다 보니 그림책 자체에 대한 호기심이 소재로까지 이어졌어요. 그림책은 그림과 글뿐만 아니라 책의 모든 구성 요소로 이야기할 수 있는 장르거든요. 책의 모든 요소를 활용해서 작가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점이 무척 매력적인 것 같아요. 〈나를 봐〉 때는 정사각형의 고정된 판형이 갑자기 눈에 들어왔어요. 분명 동일한 크기의 지면인데 서로 다른 거리감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게 재밌었죠. 멀리서 볼 땐 기분이 안 좋은 줄 알았는데 가까이서 보니 조금 웃고 있었구나! 같은 거요. 〈하늘에서 동아줄이 내려올 줄 이야〉 때는 전작이 정사각형 판형이었으니 색다르게 세로로 긴 판형에 도전해 보고자 했고요.


그림책을 보며 동심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느낌을 받았는데요. ‘동심’이라는 말에 대한 작가님의 생각이 궁금해요.

- 평생 가지고 가는 마음이라고 생각해요. 온전한 어린이의 마음이 제게 있다고 할 순 없겠지만 어린이와 닿아 있다고 느낀 적은 있어요. 정말 신기한 건 어린이들도 제가 좋아하는 장면을 좋아해 준다는 거예요. 〈문어 목욕탕〉과 〈코끼리 미용실〉 중 문어와 코끼리가 씨익 웃는 장면이나 〈문어 목욕탕〉 중 아이와 아빠가 실랑이하는 장면 같은 거요. 그럴 때 우리가 통하는 부분이 있구나 싶어서 괜히 반가워요. 이런 식으로 제 안의 동심을 확인받는 것 같아요. 그게 동심이라면요.(웃음)


어른과 어린이의 구별이 불필요한 거군요.

- 제 어린 시절을 딱 분리해서 생각하지 않는 편이에요. 그 시절도 그저 나인 거라 꺼내본다기보다는 엊그제 있었던 일을 상기하는 쪽에 가까워요. 나라는 사람이 그때와 아주 차이가 나는 것 같이 느껴지지도 않고요. 제가 그린 책 속의 어린이가 하늘에서 방방이 떨어지자마자 바로 달려 나가는 것처럼 지금의 저도 똑같거든요. 반면 제 안에는 고민하고 망설이는 또 다른 나도 분명 존재해요. 그래서 이런 복합적인 ‘나’를 인물로 만들었어요. 〈마법의 방방〉 속 ‘심심해 마을’ 사람들이 그 결과물이었죠. 최불안, 나피곤, 박그냥. 전부 제 모습이에요.


그림책을 펼칠 때면 저는 평소보다 어린이에 가까워지는 기분이 들어요. 조금 더 말랑해진달까요. 작가님은 독자일 때 어떤 모습인지도 궁금합니다.

- 의식적으로 경건해지려고 노력하는 것 같아요. 작업을 하면 할수록 다른 사람이 만든 작업물을 진지하게 보는 태도가 생겨서 가능한 차근차근 들여다보려고 해요. 물론 흥분의 순간이 갑작스레 찾아오기도 해요. ‘말랑하다’는 게 내 마음이 잘 울고 잘 웃을 수 있는 상태인 거잖아요. 그림책을 넘기다 보면 금방 이야기에 감응해 말랑한 상태로 바뀌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욱 신경을 쓰는 거네요.

- 맞아요. 처음에는 제 스타일이 아니면 빨리 덮었어요.(웃음) 그런데 이제는 시간 남을 때 읽는 게 아니라 꼭 시간을 내서 읽으려고 해요.


어린 시절이 불시에 떠오를 때가 있죠. 혹은 그때를 기억하는 누군가로부터 전해 듣거나요. 그림책 작업을 하다 보면 옛 기억의 도움을 받는 순간도 많을 것 같은데요.

- 정말 많아요. 〈벽 타는 아이〉의 경우, 사실 저는 어릴 적 동명의 소설을 쓴 적이 있어요. 어릴 적에는 자주 침대에 가로로 누워 발바닥을 벽에 붙이고 있었어요. 그 자세로 가만히 있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대로 벽을 타고 천장으로, 하늘로 올라갈 수 있을 것 같다고요. 기억을 되살려 빠르게 첫 장면을 그렸어요. 거기에 다음 장면이 붙고 붙어서 순식간에 더미를 완성했죠. 이건 꼭 책으로 내야겠다 싶었어요. 


어릴 때부터 염원하던 책이 드디어 나온 거네요. 

- 그러니까요. 이런 식으로 불쑥불쑥 어릴 때 썼던 단어가 나오기도 하고 그때 했던 생각이 나오기도 하는 것 같아요.



많은 어린이가 작가님의 이야기를 사랑하고 있어요. 기분이 어떠신가요?

- 고마운 마음이 제일 커요. 사실 제가 그리고도 깜빡하는 부분이 있거든요. 조연에 준하는 작은 인물들은 장난으로 그리기도 하고, 앞에 나왔던 걸 잊고 뒤늦게 그려 넣은 적도 많아요. 〈나를 봐〉의 아파트 장면을 보면 모자를 떨어뜨린 사람과 모자를 주워준 사람이 등장해요. 그 둘이 마지막 면지에서는 손을 잡고 있어요. 하루는 북토크에서 만난 어린이 독자분이 자꾸 둘이 잘 사귀고 있는지를 묻더라고요. 당시에는 무슨 말인지 잘 몰랐는데 알고 보니까 그 장면이었죠. 어린이들은 그림 텍스트를 정말 잘 읽는다는 걸 매번 느껴요. 〈마법의 방방〉에는 자꾸 충 전기를 떨어뜨리는 캐릭터가 등장하는데 그것까지도 읽어내요. 충전기를 언제 떨궜고 언제 주웠고 언제 주머니에 넣었는지요.


와, 정말 꼼꼼하네요.

- 네, 작가보다도요.(웃음)


작가님 안에서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내내 이어져 온 것이 있을까요?

- 무언가를 끊임없이 배우고 싶어 한다는 점이요. 배우고 싶은 게 생기면 망설이지 않는 편이에요. 그림책을 만들게 된 계기도 마찬가지였어요. 다행히도 저는 배우고 싶은 것 앞에서는 걱정이 덜하거든요. 저를 위축시킬 만한 생각들은 끼어들 겨를이 없다고나 할까요.


앞으로도 쭉 박동하길 바라는 것이 있다면요?

- 재밌겠다 싶은 것을 향해 달려가는 마음이요. 〈벽 타는 아이〉를 작업하면서 제가 생각보다 훨씬 그림책을 좋아한 다는 걸 알게 됐어요. 예전에는 ‘이번 책은 더 잘해야 해. 저번 책이랑은 달라야 해.’ 하는 생각이 컸던 것 같아요. 제가 그림 그리는 걸 별로 안 좋아한다고 생각한 적도 있어요. 그림을 그리고는 있지만 이건 그림책을 만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하는 거라고요. 그림 자체에 애정이 없다는 게 제게는 견뎌야 하는 부분인 것 같았죠.


여전히 그걸 견디는 중인가요?

- 다행히 어느 순간부터 그림 작업에도 매력을 느꼈어요. 심지어 이번에는 원화를 그리면서 제가 재밌다고 소리 내서 말하더라고요. 저는 그림책이 점점 더 어려워져요. 알면 알수록요. 그렇지만 그래서 더 재밌는 것 같아요. 바라고 또 예상하건대 저에게 그림책은 점점 커지는 박동처럼 남을 것 같아요. 아주 꾸준하게요.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들려주세요!

- 되게 신기했던 게 〈나를 봐〉를 내고 처음으로 중학생 독자를 만났어요. 직접 찾아오기까지 해서 팬이라고 말해준 중학생 독자는 정말 처음이었죠. 그때 느꼈어요. 어떤 책으로는 또 다른 독자를 만나겠구나. 그래서 책을 낼 때마다 새로운 독자분들을 만나는 것에 대한 기대가 있어요. 이번엔 그분들과 어떤 부분이 통할까 궁금하기도 하고요. 미러와의 인터뷰를 통해 새로운 분들을 만날 수 있어 기뻐요. 20대에게도 그림책이 편안하고 재밌는 문학이 되기를 바라요. 재밌는 건 나눠야 하는 거니까요!



대화를 나눈 문정동은 컷 수가 빈곤한 애니메이션 같았다. 묵묵하고 유유한 동네 분위기 때문인지 매 장면이 미동에 불과해 보였다. 최민지 작가와 문정역으로 걸어가며 이름 이야기를 나누었다. 두 쌍의 발이 구간 반복에 놓인 것처럼 바닥에 붙었다 도로 떼어지기를 거듭하고 있었다.


“민지라는 이름은 너무 흔한 것 같아서 필명을 고민한 적이 있어요.” 특이한 이름이 갖는 불편 사항을 곰곰이 생각하고 나열해 보기도 전에 그가 말했다. 여러 후보를 생각해 봤는데 결국엔 그냥 민지가 되기로 했다고. 그러자 그 모든 이름을 전부 집어삼킨 것 같아 기분이 좋아졌다고 했다. 최민지 작가는 그가 그려낸 문어와 코끼리처럼 씨익 웃었다. 그 장난스러운 얼굴에 따라 웃지 않을 길이 없어 나도 씨익 웃고 말았다.


Editor 가을

Photographer 채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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