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12 <Time In Seoul>

[기록보관소]

by 매거진 미러

사서 박소연입니다.


수많은 생각과 고민 그리고 해야 하는 것들을 잠시 내려놓고, 아무것도 없는 따듯한 시골에 내려가 놀고 먹는 상상을 합니다. 자연과 나, 그리고 아늑한 집과 밥뿐인 곳에서 흘러가는 시간을 아쉬워하지 않고 그대로 누리는 상상. 오직 나에게만 집중하는 시간을 갖다 보면 현실 속 내가 해야 하는 것들을 의연히 해낼 수 있는 용기가 생길 것만 같습니다. 멀리 떠날 여유가 없을 때, 도심에서도 상상 속 ‘쉼’을 이룰 수 있는 복합문화 공간 ‘곳’의 이야기를 담은 기사, ‘Time In Seoul’을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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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 빌딩과 아파트, 넓은 도로 위 빠르게 달리는 차들, 우리에게 이미 익숙한 장면들이다. 복잡한 서울에서 찾은 한적한 계동의 골목은 우리에게 낯섦을 선사한다. 나지막한 건물들과 그 위를 덮은 곡선의 기와들이 시선을 사로잡고, 나뭇가지처럼 뻗은 좁은 길에는 전통 건축물들이 가득하다. 그 사이에서 발견한 복합한옥공간 ‘곳’. 갈색 대문을 열고 가깝고도 낯선 세계로 함께 떠나보자. 환상(喚想: 지나간 것을 돌이켜 생각함)을 위한 환상적인 공간을 소개한다.

察:살펴보다

대문을 열면 바로 돌들이 깔린 야외 정원이 보이고 그 뒤로 대나무 방과 공용 공간이 위치해 있다. 대문 왼쪽에는 개나리 방, 오른쪽에는 산수유 방이 자리 잡고 있어, ㄷ자 형태의 공간이 주는 아늑함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그 뿐만 아니라 주택가 사이에 위치한 한옥은 집 안과 밖이 분리된 세계인 듯한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주변에 있는 콘크리트나 벽돌 건물들과 달리 나무와 돌로 지어진 집은 마음까지 편안하게 만들어준다. 이처럼 자연과 닮은 ‘곳’은 각지고 딱딱한 공간에 익숙해진 우리에게 부드러움과 예스러움을 선사한다. 지붕에 올려진 둥근 기와들이나 작은 마루, 미닫이문, 마당 한구석의 옹기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문득 어린 시절 할머니 댁에서 찬바람 맞아가며 추운 마당을 뛰어다니던 때가 떠오른다. 이곳이 서울 한복판이라는 사실이 무색해지는 순간이다.


정원의 산수유나무와 작은 화분들, 텃밭들은 ‘곳’의 지나온 계절과 다가올 계절을 더욱 기대하게 만든다. 날이 더 따뜻해지면 이 아름다운 정원은 더욱더 푸르러질 것이다. ‘곳’과 함께한다면 이 공간에서만큼은 달력이 필요 없지 않을까.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는 자연을 보면서 시간의 흐름도 함께 알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모든 것이 정신없이 돌아가는 세상이지만 이곳은 흘러간 일도 또 다가올 날들도 천천히 곱씹어볼 시간을 선물한다.

疏:소통하다

'곳'이 단순한 게스트 하우스가 아닌 복합 문화공간인 이유는 의미 있는 생각들이 존재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이곳은 친환경 농가와 자원봉사자들을 연결해주는 단체인 우프(WWOOF)와 인연이 깊다. 초기에 이 공간을 우프의 한국 본사로 이용하면서 자원봉사자들을 위해 게스트 하우스의 운영을 시작하게 되었고, 현재까지 본사는 아니지만 우프를 후원하며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그 때문에 ‘곳’은 친환경 농업과 건강하고 전통적인 먹거리에도 관심이 많다. 에디터가 이날 맛 보았던 ‘댕유지차’도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는 우리의 전통 차로, 맛의 방주*에 등재된 먹거리이다. 떫은맛이 나는 일반 유자차와 달리 댕유지차는 제주 토종 유자 특유의 상큼하고 달콤한 향을 가득 품고 있었다. 댕유지차뿐만 아니라 조식으로 제공되는 빵과 잼, 요거트도 모두 이곳에서 유기농재료로 직접 만든 건강한 먹거리이다. 사실 현대인들에게 중요한 것은 먹는 행위 자체이지 ‘무엇으로 만들었는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는 그다지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그러나 이 공간에서 제공되는 음식들은 우리에게 무엇이 잊혀가고 있었는지 다시 한번 일깨워준다.


공간 대여도 이루어지고 있는 ‘곳’에서는 다양한 모임이 열린다. 명상수업부터 독서 모임, 원데이 클래스까지 자신이 가진 생각을 자유롭게 펼치며 소통하는 공간으로 활용된다. 고즈넉한 공간 속에서는 원하는 사람들과 공부를 할 수도, 대화를 나눌 수도, 파티를 열 수도 있다. 한옥이 지닌 독특한 분위기는 함께하는 시간들을 더욱 특별한 기억으로 남겨준다. 다양한 사람들의 생각이 한 데 어우러져 공존하는 곳. 사라져 가는 농촌의 가치를 기억하는 곳. 이 공간이 지닌 가치와 소통의 의미는 이렇게 나타난다.

宿:머무르다

누구나 모든 것을 훌훌 털고 혼자 떠나고 싶을 때가 있다. 가능한 한 멀리 떠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여건이 되지 않는다면, 도심 속 한옥을 강력히 추천한다. 등 뒤로 문을 닫는 순간, 다른 세계로 떠나게 될 테니. 분명 바깥세상은 시끄럽고 복잡했는데 이상하게 한 걸음 더 들어온 이 공간 속에서는 모든 것이 고요해지는 느낌이다. 특히 밤이 되면 더욱더 그렇다. 주변 주택가나 골목길을 지나가는 사람들에게서 두런두런 들려오는 소리를 뒤로 한 채, 정원 의자에 앉아본다. 밤이 되니 따스한 불빛에 비친 창호 무늬가 새삼 색다르게 보인다. 빠르게 지나간 1년 동안 해낸 일들과 해내지 못한 일들, 그리고 내 옆에 있는 사람들. 평소 같았으면 일상에 가려져 떠오르지 않을 것들을 밤과 고요함에 비춰 천천히 하나하나 끄집어낸다. 그러다 아까 마시던 댕유지차를 꺼내 조금 더 마신다.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생각들과 함께 따스한 달콤함이 온몸 가득 퍼진다.

개나리방으로 들어오니 정갈하게 개어진 이불들이 에디터를 기다리고 있다. 천장에 달린 색색의 천들이 전통적인 향기를 물씬 풍기고, 노란빛의 조명과 갈색 나무는 방의 포근한 느낌을 더한다. 뜨끈한 온돌방 안에서라면 혼자서도 겨울밤을 충분히 이겨낼 수 있다. 그렇게 보낸 ‘곳’에서의 하루. 다음날 한옥의 아침은 밤과는 다른 청량한 매력을 보여준다. 상쾌한 아침 공기와 창으로 들어오는 따스한 아침 햇살을 만끽하며 느긋하게 조식을 먹는다. 그동안 잊고 있었던 여유, 따스함, 사색을 하루 만에 가득히 이 공간에서 채워간다. 곧 대문을 열고 다시 정신없는 세상으로 돌아가겠지만, 마음속에 존재하는 깊은 세계가 그리워질 때 다시 이곳을 찾을 것이다. 그리고 이 장소에서 오늘을 환상(喚想)할 것 같다.


Vol.12 <Time In Seoul> 中

Editor 김지윤

Photographer 박세혁, 함유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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