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13 <낙서의 무게>

[기록보관소]

by 매거진 미러

사서 박소연입니다.

학창 시절 지루한 수업을 피해 책상 구석, 종이 끝에 낙서를 끄적이곤 했습니다. 낙서에 몰두하게 되면 주위의 소리는 점차 작아지고 종이와 펜 그리고 나만 남게 됩니다. 지루함 속 찾아낸 낙서라는 딴짓은 깊은 생각 대신 손을 먼저 움직이게 해 ‘날것의 나’와 마주하게 했습니다. 낙서이기에 쉽게 지워지고, 낙서가 있는 책장은 의미 없이 넘겨지곤 합니다. 지금의 내가 과거의 낙서를 다시 보게 된다면 잊고 있던 생각, 고민, 추억과 마주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과거와 현재의 나를 잇는 ‘낙서’의 무게에 관한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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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우리는 많은 낙서와 마주친다. 때때로 직접 낙서를 남기기도 한다. 낙서는 ‘글자, 그림 따위를 장난으로 아무데나 함부로 씀. 또는 그 글자나 그림.’ 으로 정의된다. 하지만 정말 ‘장난’이기만 할까?

홍콩 소호 거리의 볼거리는 단연 낙서다. 누군가에게는 단순한 낙서로만 보일 글씨와 그림들은 사실 ‘그라피티(Graffiti)’로, ‘긁어서 새기다’ 라는 어원을 가진 대표적인 거리예술 중 하나이다. 좁은 의미에서 본 그라피티는 스프레이나 마커로 자신의 이름이나 상징을 도시 곳곳에 남기는 행위일 뿐이다. 하지만 이름만 간단히 쓰는 ‘태깅(Tagging)’부터 화려한 그림처럼 보이는 글씨를 그리는 ‘피스(Piece)’, 종이에 구멍을 뚫어 스프레이를 뿌리는 ‘스텐실(Stencil)’까지 아티스트들은 천차만별의 방식으로 자신을 표현하고 있다. 누군가의 이름과 상징은 그 자체로 사람들에게 인정 받았고, 많은 사랑을 받으며 소호 거리를 관광수입의 메카로 만들었다.

낙서들은 거리 구석구석에 숨어서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고 소호 거리는 수 많은 이야기가 담긴 하나의 거대한 그림책이 되었다. 아직도 낙서를 함부로 쓴 글이라고 생각하는가? 오히려 예술에 가까워 보이지 않는가.

일상의 한순간이 갑자기 새롭게 다가올 때가 있다. 평소에는 아무 관심 없던 낡은 연습장이 내 시야에 잠시 머물렀을 때가 그랬다. 두고두고 간직하고 싶었던 건 아니었다. 버리기엔 너무 공을 들였고, 남겨두기엔 다시 볼 것 같지 않았지만 괜히 아쉬워 그대로 놔둔 것이다. 그날은 시험 기간이었다. 괜스레 모든 물건에 정리가 필요해 보였다. 전공 서적만은 읽고 싶지 않아서 였을까, 잊고 있던 호기심이 연습장 더미로 손을 뻗게 만들었다. 낙서를 통해 마주한 것은 일기와는 다른, 다소 둔한 일련의 기억이었다. 낡은 종이를 펼치니 그 옛날의 기억이 피어올랐다. 낙서에는 날 것의 내가 담겨있었다.

연습장 구석구석에는 아버지와의 추억이 담긴 사인이 가득했다. 아버지는 나의 우상이었고, 서명마저 닮고 싶었다. 8살의 나는 아버지의 사인과 비슷한 것을 갖고 싶다고 조른 끝에, 나란히 앉아 새로운 나만의 것을 만들어냈다. 나에게 사인이란 자기애의 표출이자, 아버지에 대한 애정이다.

또 다른 연습장을 집어 들었다. 고민을 한가득 안고 있던 고등학생 시절 연습장이다. 수많은 대학 이름들이 휘갈겨져 있었다. 유난히 많이 보이는 이름도 있다. 아마 그 대학에 가장 가고 싶었겠지. 당시에는 열린 결말의 낙서였지만, 지금은 결말을 알고 있다. 종이뿐만 아니라 마음속에도 아로새겨진 그 대학에 다니고 있음에 스스로가 대견하다.

오늘 하루는 예쁜 구슬이었고, 그런 오늘이 모여 삶이란 멋진 목걸이를 완성할 것이다. 짧은 길이임에도 불구하고 낙서라는 흔적은 어쩌면 열린 결말이 될 수도 있을 긴 이야기를 불러일으킨다. 누군가에게는 예술이 되는, 날 것 그대로의 표현. 낙서라는 이름은 그것이 품고 있는 이야기에 비해 너무 가벼운 느낌이니 세상에서 가장 함축적인 초고라 불러도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연습장을 덮었다.

이것들을 모아 긴 이야기로 엮는다면 당신의 순간이 가장 많이 담긴 자서전이라 칭해도 손색없을 것이다. 지나간 본인의 무의식적인 기록을 발견하는 오늘. 날 것의 자신과 마주하는 순간을 가져보자. 단편소설을 모아 꾸밈없는 장편으로 엮어보자. 이따금 하루가 무료하다 느껴질 때면 타인의 흔적에 주의를 기울여 그 안에 담긴 이야기, 또는 결말을 상상해보는 건 어떨까. 낙서의 무게란 생각보다 가볍지 않으니 말이다.

Vol.13 <낙서의 무게> 中
Editor 장인준
Photographer 이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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