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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매거진 미러 Oct 27. 2021

주파수의 질량

[MIRROR둔 이야기]


두렵기만 하던 고등학교 3학년이 된 날. 매일 손에서 놓지 않았던 스마트폰을 자그마한 폴더폰으로 바꿨다. 휴대폰에는 밍글맹글같은 흔한 게임도 없었다. 투박한 버튼을 하나하나 눌러 전화번호를 저장해야 했고 다 깨진 사진 몇 장에도 용량은 넘쳤다. 그 대신 새로운 취미가 생겼다. 바로 라디오를 들으면서 무료한 시간을 버티는 것이었다. 엔터테인먼트 분류에 들어있던 ‘FM 라디오’ 기능은 유일한 희망처럼 느껴졌다.


매일 아침 엉킨 이어폰의 줄을 풀고 오른쪽 동그란 단자에 꽂았다. 어느새 나만의 규칙도 생겼다. 등하교 시간에는 주파수 107.7로 맞추기, 평일 오후 6시 최신곡 모음 코너는 꼭 챙겨 듣기. 학원을 가기 위해 지하철을 타면 전류 때문인지 지직거리는 소음만이 들려오곤 했다. 그럴 때면 이어폰을 돌리고 당겨서 어렵게 주파수를 잡았다. 애정하는 노래가 나올 때면 다시 연결되기를 간절하게 바랐다. 때로는 그 소음 속에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음악 소리에 빠져들었다.


공부를 끝내고 독서실을 나온 밤. 어깨를 짓누르는 가방을 짊어지고 어두컴컴한 길을 걸었다. 집으로 가는 시간은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그런 나를 놀리듯 차들은 분주히 스쳐 지나갔다. 사람들이 오가던 대학가의 거리에는 불 꺼진 건물만이 가득했다. 낯선 적막을 함께 걸어준 것은 라디오였다. 이어폰을 귀에 꽂으면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날 서 있던 말이 마음에 쿡 박혀 생채기를 내던 날에도, 뒤엉켜 부풀어가는 생각들에 나를 어루만지지 못했던 날에도. 그 자리를 지키던 따스한 목소리를 기억한다.


이제는 주파수를 찾아 헤매지 않는다. 줄 이어폰을 쓰지도, 다음 사연과 선곡이 무엇일지 기다리지도 않는다. 하지만 가끔은, 주파수에 담아냈던 나의 작은 마음들을 생각하고 생각한다.


<주파수의 질량>


Editor 전세현

Photographer 박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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