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귀자의 <모순>을 읽고, 스포일러 없는 독후감
양귀자의 소설 <모순>을 읽으며 직감했다. 이 책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소설책이 될 거라는 사실을.
<모순>의 주인공 안진진. 그녀의 어머니는 일란성 쌍둥이다. 부모도 구별 못 할 만큼 닮았던 쌍둥이는 결혼과 동시에 급격히 달라지기 시작했다. 안진진의 어머니는 술만 마시면 폭력적으로 돌변하는 알코올중독 남편을 만나 가족의 생계를 힘겹게 책임져야 했다. 반면 안진진의 이모는 성실하게 가족을 부양하는 가정적인 남편을 만나 부유한 삶을 산다. 그렇게 두 사람은 마치 불행과 행복을 나눠 가진 것처럼 보였다. 평생이 너무나 평탄했다는 이모에게도 불행은 있었다. 결핍, 낭만, 예외성이라곤 끼어들 자리가 없는 지루한 삶. '무덤 속 같은 평온'을 견딜 수 없었던 이모와, 처리해야 할 불행들이 많아 지루할 틈이 없는 가난한 어머니. 그리고 사뭇 다른 두 사람의 삶을 바라보며 모순투성이인 삶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안진진.
작가는 <모순>을 쓸 당시에 행복과 불행, 삶과 죽음, 정신과 육체, 풍요와 빈곤 등과 같이 상반되는 단어들의 조합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고 한다. 하나의 단어에 필연적으로 잇따르는 반대어엔 반드시 무슨 우여곡절이 있으리라 생각한 작가가 그 우여곡절을 보편성으로 풀어 쓴 책이 바로 <모순>이다. 등장인물로 일란성 쌍둥이가 나온 이유는 하나지만 둘이고, 둘이지만 하나인 인생 궤적을 보여주기에 일란성 쌍둥이보다 더 적합한 장치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나의 단어에 덧붙여지는 반대어는 쌍둥이로 태어난 형제의 이름인 것이다.
대학생일 때 '신화와 인간'이라는 철학 수업을 들은 적이 있다. 그때 교수님께서 아프로디테와 헤파이스토스의 관계성에 관해 이야기해 주셨다. 아프로디테가 '미'의 여신이기 때문에 '추'의 신인 헤파이스토스와 사는 것이라고, 그래야 균형이 맞다고. 또 사랑을 상징하기도 하는 아프로디테와 전쟁의 신 아레스의 관계 역시 필연적이라고 말씀해 주셨다. 사랑이 있는 곳에 전쟁이 있다.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것을 가지고 전쟁하지는 않으니까.
결혼을 결심한 안진진이 굉장히 상반되는 스타일의 두 남자 중 누구를 택할지 추리하며 읽는 것도 이 소설의 묘미 중 하나다.
인생을 철저히 계획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실행해 나갈 것 같은 남자, 늘 데이트 코스를 짜오는 나영규.
순수하고 수채화 같은 남자, 안진진의 표현을 빌리자면 '희미한 것들을 사랑하는 사람' 김장우.
마치 응답하라 시리즈의 남편 찾기 같달까. 닫힌 결말로 끝이 난다.
P.15 내 인생의 볼륨이 이토록이나 빈약하다는 사실에 대해 나는 어쩔 수 없이 절망한다. 솔직히 말해서 내가 요즘 들어 가장 많이 우울해하는 것은 내 인생에 양감이 없다는 것이다. 내 삶의 부피는 너무 얇다. 겨자씨 한 알 심을 만한 깊이도 없다. 이렇게 살아도 되는 것일까.
P.16 매사에 무덤덤하고 세상사에 대해서 시큰둥한 인간한테는 설령 그런 극적인 순간이 찾아온다 해도 발길로 걷어차 버릴 가능성이 많다.
P.28 장미꽃을 주고받는 식의, 삶의 화려한 포즈는 우리에게는 전혀 익숙하지 않았다. 가난한 삶이란 말하자면 우리들 생활에 절박한 포즈 외엔 어떤 것도 허락하지 않는 삶이란 뜻이었다.
P.44 인생이란 더하기만 있는 것이 아니라 까먹기도 있다는 사실을 어머니는 아마도 그렇게 표현했을 것이었다. 어머니만큼 뺄셈에 능숙한 사람이 어디 있으랴.
P.54 어떤 경우에는 천박함이 무명천처럼 고슬고슬할 때도 있는 법이었다.
P.75 추억까지 미리 디자인하고 있는 남자, 현재를 능히 감당하고도 남음이 있어 먼 훗날의 회상 목록까지 계산하고자 하는 그의 도도한 힘이 나에게는 조금 성가셨다.
P.76 이 남자와 같이 지낼 앞으로의 네 시간에 대해 아무런 궁금증이 없다는 사실이 어쩌면 가장 견디기 어려운 것인지도 몰랐다.
P.83 특히 아버지처럼 하지 않아도 좋을 생각까지 하느라 인생살이가 고달팠던 사람에게는 두말할 나위도 없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알고 있는 한 아버지는 타인에 의해 한 번도 정확히 읽혀지지 않은 텍스트였다. 그것은 아버지에 대한 모독이었고 또한 아버지의 불행이었다.
P.104 김장우와 만나면 나는 이렇게 선명해진다. 그는 희미한 것들을 사랑하고 나는 가끔 그것들을 못 견뎌한다.
P.141 이모부는 결혼해서 지금까지 삼십 년이 가깝도록 단 한 번의 결행이나 연착 없이 정시에 도착하고 정시에 출발하는 기차 같은 사람이었다. 기차라면, 쇠바퀴를 굴려 굽이굽이 강가도 달리고, 덜컹덜컹 산자락도 달리는 기차라면, 폭설 후에는 결행도 하고 마주 오는 다른 기차를 피하느라 연착도 좀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다. 그렇게 믿고 있는 세상의 다른 부류들한테는 이해받기 힘들겠지만 하여간 이모부가 생각하는 기차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이모부의 기차는 굽이굽이 강가를 달리더라도 절대 한눈을 팔면 안 되고 마주 오는 다른 기차를 들이받고라도 다음 역에 늦게 도착하면 안 되는 기차였다.
P.142 철이 든다는 것은 말하자면 내가 지닌 가능성과 타인이 지닌 가능성을 비교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에 다름 아닌 것이었다.
P.158 나영규라는 남자는 사랑도 공부하듯이 하는 사람이어서 그런 면에서는 도저히 김장우가 당하지 못할 비범함이 있었다.
P.179 나는 주리가 아니고 안진진이었으므로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었다.
P.188 상처 입은 사람들을 위로하는 것은 말이 아니었다. 상처는 상처로 위로해야 가장 효험이 있는 법이었다. 당신이 겪고 있는 아픔은 그것인가, 자, 여기 나도 비슷한 아픔을 겪었다, 어쩌면 내 것이 당신 것보다 더 큰 아픔일지도 모르겠다, 내 불행에 비하면 당신은 그나마 천만다행이 아닌가……
나의 불행에 위로가 되는 것은 타인의 불행뿐이다. 그것이 인간이다. 억울하다는 생각만 줄일 수 있다면 불행의 극복은 의외로 쉽다.
P.191 세상의 모든 잊을 수 없는 것들은 언제나 뒤에 남겨져 있었다. 그래서, 과거를 버릴 수 없는 것인지도.
P.200 달리기만 할 줄 알고 멈출 줄은 모르는 자동차는 아무 쓸모도 없는 물건이듯이, 인생도 그런 것이었다. 언젠가는 멈추기도 해야 하는 것이었다.
P.217 나는 나인 것이다. 모든 인간이 똑같이 살 필요도 없지만, 그렇다고 똑같이 살지 않기 위해 억지로 발버둥 칠 필요도 없는 것이다. 이제 나는 더 이상 나를 학대하지 않기로 했다. 나는 특별하고 한적한 오솔길을 찾는 대신 많은 인생선배들이 걸어간 길을 택하기로 했다. 삶의 비밀은 그 보편적인 길에 더 많이 묻혀있을 것이라 확신하고 있으므로.
P.219 부끄러움을 누더기처럼 걸치고 그토록이나 오래 기다려온 사랑 앞으로 걸어 나가고 싶지 않다.
P.226 어머니는 첫눈 따위 오거나 말거나 아무래도 좋았다. 그런 한가한 것 말고도 어머니를 숨넘어가게 부르는 삶의 호출이 하도 많아서 어머니는 도저히 심심할 틈이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P.229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선택의 문제가 닥쳤을 때는 누구 한 사람의 강렬한 주장만큼 고마운 일도 없는 법이었다.
P.257 모든 사건은 언제나 돌발적으로 일어난다. 이런 일이 현실로 드러날 줄은 알았지만, 그 일이 ‘오늘이나 내일’ 일어난다고는 믿지 않는다. 예감 속에 오늘이나 내일은 없다. 오직 ‘언젠가’만 있을 뿐이다. 매일매일이 오늘이거나 혹은 내일인데.
P.266 원칙보다 예외가 많은 내 가족에 대해 언제까지나 관용을 구할 수는 없었다.
P.284 나도 그렇게 사는 것처럼 살고 싶었어. 무덤 속처럼 평온하게 말고.
P.291 삶과 죽음은 결국 한통속이다. 속지 말아야 한다.
P.296 어떤 종류의 불행과 행복을 택할 것인지 그것을 결정하는 문제뿐
P.299 가끔씩 나는 나를 옹호하기도 한다. 이렇게밖에 살 수 없었다고. 너무 나를 나무라지 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