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가 물질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체내에 꼭 있어야 할 원소 같은 것. 내 안에서 무언가가 빠져나갔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책을 읽는다. 채워졌다 싶으면 쓴다. 쓰다 보면 알게 된다. 아직 아무것도 채워지지 않았다는 걸.
작년에 에세이를 한 권 썼는데, 이상하게 그 이후부터 에세이를 잘 읽지 않게 된다. 읽으려고 해도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평범한 일상, 소소한 행복, 나다운 삶, 공감과 위로를 강조하는 텍스트를 읽을 만큼 읽었다. '그런' 류의 에세이는 싫어,라고 말하는 듯한 글도 읽어보면 결국 비슷하다. 이제는 그것마저도 필요 없다는 이야기를 듣고 싶은데, 나마저도 같은 이야기만 늘어놓고 있으니 갑갑하다. 소설가와 시인들이 부럽다. 나도 다른 대상을 빌려 새로운 세계 안에서 내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이다혜 작가가 쓴 <처음부터 잘 쓰는 사람은 없습니다>라는 책에서 생각나는 한 구절. '에세이는 어딘가 짠한 구석이 있다'는 문장. 유튜브와 블로그, 인스타그램에 끊임없이 나를 전시하다 보면 지칠 때가 있는데, 이것밖에 할 수 있는 건 없어서 계속한다. 짠하기도 하고, 다행이기도 한 일.
와이파이 세계로부터 잠시 단절하고 나에게 오롯이 집중하고 싶은 순간에 독서노트를 쓴다. 독서와 기록은 평형감각을 튼튼하게 한다. 읽는다는 건 듣는 일이기도 하고, '귀'의 전정기관과 반고리관은 평형감각을 담당한다고. 의학적으로는 별 상관없어 보이지만 알 수 없다. 읽다 보면 똑바로 듣고 똑바로 쓰고 똑바로 걷고 똑바로 살 수 있을지 모른다. 필사를 하다 보면 저자의 말이 귀에 더 잘 들어온다. 언어로 옮겨진 글쓴이의 생각이 나의 눈과 손을 거쳐 머릿속으로 들어온다는 사실에 새삼 놀랄 때도 있다. '나'라는 존재가 타인의 말을 조각조각 이어 붙여 완성된 존재에 불과하다면, 어쩔 수 없이'짠 한 이야기'를 서로 엇비슷하게 할 수밖에 없는 게 아닐까. 제각각 달라 보이는 우리의 몸이 결국 같은 원소로 이루어져 있는 것과 유사한 맥락으로, 어쩌면 우리는 필연적으로 비슷한 성분의 이야기를 원하게 되는 게 아닐까. 짜깁기와 재구성의 미묘한 차이.
변명의 여지가 생기니 쓰던 이야기마저 써야겠다는 용기, 안 써도 괜찮다는 객기도 생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