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가는 사람의 악담은 콧물 같은 것,

내가 나를 위로하는 '오구오구'의 철학

by 미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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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어떤 사람이 악플을 남겼다. 스스로 생각해도 좀 과했다고 생각했는지 돌아와 다시 지우고 간 흔적이 남아있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댓글을 썼다가 지워도 블로그 운영자는 알림 기능을 활용해 읽어볼 수 있다. 엎질러진 물을 주워 담을 수 없다는 사실은 만고의 진리, 그가 흘리고 간 물의 의미를 곱씹지 않기 위해 스스로 엎은 물을 손수 닦고 간 마음을 떠올려 봤다. 우리 안의 부정적인 감정은 항상 우발적으로 일어난다. 누군가에게 화를 내고, 돌아서서 '내가 좀 심했나' 후회하기도 하고, 슬픔과 우울에 빠져 있다가도 시간이 지나가면 언제 그랬냐는 듯 웃고 행복해한다. 감정이 일시적인 허상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하면 악플에 대응해야 할 당위성이 사라진다.


악플을 보고 일어나는 나의 분노도 어쩌면 왜곡된 관점에서 일어난 착시 현상일지 모른다. 악플까지는 아니었지만 그간 시비조로 글의 모순을 지적한 사람도 적지 않았는데, 반박하고 싶은 마음을 10초 정도 참고 나면 상대방의 말을 인정해야겠다는 마음이 들곤 했다. '그러네요. 제가 아직은 거기까지밖에 안 되는 인간인가 봐요'라고 응대하면 상대방도 황급히 '저도 과잉 반응을 했네요' 하고 일단락 되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인간의 감정이란 이토록 무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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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산적인 피드백이 아니라, 의도적인 악의가 다분하다고 여기는 말과 글은 '지나가는 행인의 악담은 콧물'이라 여긴다. 그러면 마음도 편해진다. 고통 속에 있을 때 사람은 부정적인 말을 콧물처럼 흘리고 다닌다. 덜 어리석은 사람은 콧물이 타인의 얼굴이 아니라 내 얼굴을 더럽힌다는 사실을 금세 자각하고 얼른 닦는데, 며칠 전 그 사람의 경우는 닦기는 닦았지만 깨끗이 닦아내지는 못한 듯하다. 마음의 감기에 걸린 사람이 남기고 간 콧물 자국이 어쩐지 남의 것 같지 않아 더욱 애처롭다. 내 안에 없는 것은 절대 보이지 않는다고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무얼 봤든 다 내 허물이라고 생각하며, 지저분한 콧물에 성내지 않고 자타불이의 마음으로 그의 콧물을 닦아주고 감기약도 챙겨주면서도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자가 보살이고 부처겠지만, 그 정도 되려면 나는 다시 태어나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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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안의 선과 악의 형태는 완성형이 아니라 현재 진행형이라고 생각한다. 선한 인간, 악한 인간이 따로 있지 않고 상황과 조건에 따라 선하려고 노력하는 사람과, 악해지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있다. 성자와 사기꾼은 종이 한 장 차이랄 수 있다. 선한 사람도 한순간 악에 물들 수 있고, 악한 사람도 부지불식간에 선해질 수 있다. 1시간 전의 마음은 악했다가 2시간 후의 마음은 선해지기도 해서 인간은 하루에도 열두 번씩 찰나의 지옥과 천국을 경험한다. 이토록 연약한 마음을 가지고 누가 누굴 비난하는 건 우스운 일이다. 악의적인 댓글을 남기는 사람을 비난할 자격이 내게는 없다는 걸 안다. 입만 나불거리는 게 아니라 정말로 안다.(물론 욕설과 음담패설을 하는 자는 제외해야 한다. 이 두 가지는 말이 아니라 칼이라 법적 처벌의 범위에 해당된다) 나도 내 마음이 부정적일 때는 입 밖으로 내뱉지 않을 뿐, 속으로 타인을 향해 무수한 악플을 달기 때문이다. 현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비아냥대고 조롱하기도 하고, 전후 사정을 모르면서 함부로 비판하며, 내 의견과 다른 의견은 무조건 틀렸다고 비난하기도 한다. 항상 긍정적인 말만 하는 사람을 시기, 질투하고, 내게 공감해주지 않는 사람을 잠시 미워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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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유식학에서는 부정적인 감정이 일어나는 현상을 '폭류처럼 작동한다'라고 표현한다. 폭류를 일으키는 원인은 '애정 결핍'과 '인정 욕구'가 대표적이다. 아기 일 때의 인간은 누군가 돌봐주거나 사랑해주지 않으면 혼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아기에게 사랑은 생존본능이다. 살아남기 위해서 아기는 사랑을 갈구한다. 밥 먹여달라고 울고, 안아 달라고 울고, 나 좀 쳐다봐 달라고 운다. 걷고 말을 배우면서 태생적인 귀여움이 사라지지만, 애교스러운 말과 행동을 어필하며 여전히 사랑을 갈구한다. 더 이상 귀엽지만은 않은 사춘기 시절에도 우리는 관심과 사랑과 인정에 목말라하는데, 이때는 생존이 목적이 아니라, 0세부터 애정을 갈구하는 마음을 꾸준히 훈련해 왔기 때문에 일어난 무의식의 작용이다. 하지만 아기를 사랑하는 것만큼, 청소년을 성인을 사랑할 수 없다. 일단, 하나도 안 귀엽지가 않다. 말은 지지리도 안 듣는다. 신체 능력을 따지면 이미 독립적인 개체가 되었지만, 마음은 여전히 서너 살 어린아이에 머물러 있는 성장기 과정에서 우리의 애정, 인정 욕구는 무수히 좌절된다. 셀 수없이 많은 좌절과 실패의 경험은 결코 사라지지 않고 우리 마음 깊은 곳 어딘가에 '씨앗'처럼 묻혀있다. 성인으로 살아가면서 '이유 없이 짜증 난다' '이유 없이 화가 난다'며 부정적인 감정의 이유를 찾지 못할 때가 종종 생기는데, 이때 '씨앗'이 특정한 환경과 조건을 만나 감정이라는 싹을 틔웠다고 볼 수 있다. 그 싹을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하면 우리의 마음은 어느새 탐욕과 미움과 분노와 집착의 밭으로 변하게 된다. 감정의 폭류를 다스리지 못하면, 행동의 폭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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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사람이 내면의 성난 파도를 제어하기란 어렵다. 그래서 부처님은 우리 같은 범부 중생들을 위해 여여히 파도를 타는 법을 알려주셨다. 그것이 바로 '알아차림'과 '오구오구'(물론 부처님이 이렇게 얘기하신 건 아니다..)다. 가령, 누군가의 소셜미디어를 보면서 질투가 날 때, 우리는 내 안의 질투가 일어났음을 처연한 자세로 관조할 수 있어야 한다. 거기서 끝내지 않고 '오구오구'를 해 줘야 한다. '질투가 났니. 오구오구, 그럴 수도 있지' '화가 났니, 오구오구, 괜찮아. 금방 사라질 거야' '울고 싶니, 오구오구, 그래 조금만 울어보자.' '지금 나를 타인과 비교하며 실망하고 있구나, 그런데 너도 그 사람 못지않게 꽤 괜찮은 사람이야' 갖가지 오구오구의 방법을 스스로 연구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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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구오구'는 셀프다. 타인은 절대 내게 '오구오구'를 해줄 수 없다.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앞에서 언급했듯이, 어른이 된 나는 이제 더 이상 그 정도로 귀엽지 않기 때문이다. 명심하자. 타인에게 무한한 애정과 인정을 얻고 싶다면 생후 6개월 된 아이만큼 귀엽고 사랑스럽고 순수할 수 있어야 한다.(연인이 눈에 콩깍지가 씌었을 때 '우리 아기' 'Baby'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점을 주목해볼 만하다.) 둘째, 타인은 내가 어떤 결핍을 가지고 있는지 모른다. 나도 내 안에 어떤 업이 있는지 모르는데 타인이 어떻게 알고 그 결핍을 다 채워주겠는가. 뻔한 이야기이지만, 내가 나에게 얼마큼의 '오구오구'를 해줄 수 있는지 가장 잘 처방할 수 있는 것은 나다.



내가 나를 '오구오구'하는 것은 부단히 선을 실행하는 행위이자, 지옥 대신 천국을 자주 경험할 수 있는 쉬운 방법이다. 내가 나를 제대로 '오구오구'하지 못하면 뾰족한 말과 행동으로 타인에게 상처주기 쉽다. 반대로 나를 올바르게 '오구오구'하면 부정적인 감정은 긍정적인 감정으로 전환된다. 시기와 질투심은 꿈과 열정의 동력이 될 수 있고, 미움과 분노를 돌아보면서 보다 겸손한 사람이 될 수도 있다. 나 자신을 '오구오구'하는 능력을 훈련하면 타인을 '오구오구'할 줄도 알게 된다. 나를 이롭게 하고, 타인도 이롭게 한다는 불교의 가르침 '자리이타'라는 말은 클리셰가 아니라 수천 년 동안 이어져 온 진리다. '지나가는 사람의 악담은 콧물'이라는 말도 사실 '오구오구'의 일종이라고 보면 된다. 이처럼 수행은 콧물이 지나간 자리에 선물을 가져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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