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포즈, 결혼식이 특별해야 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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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미국의 락 밴드 그린데이의 <Last night on Earth>라는 노래를 자주 듣는다. 2009년 <21th century breadkdown>에 수록된 곡이다. 한동안 그린데이의 음악을 거의 듣지 않았는데 생각해 보니 그동안 음악 자체를 잘 듣지 않았다는 자각이 든다. 남들은 지치고 힘들 때 음악으로 위로 받는다는데, 내 경우엔 힘들 땐 음악이 소음처럼 들렸다. 그린데이의 달달한 사랑 노랠 듣고 있으니, 음악을 들을 심리적 여유가 없었던 게 아니라 위로가 될 만한 노래를 알아보지 못한 안목의 문제가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사회적, 정치적 목소리를 주로 내는 그린데이의 곡들 사이에서 <Last Night on Earth> 희귀하게 빛난다. 2009년에 나왔지만 세기말의 mtv스러운 레트로함이 느껴져서 오히려 복고가 트렌드인 요즘에 훨씬 세련되게 들린다. 이 곡을 듣고 있으면 내가 좋아하던 애가 연애에는 관심없고 공부나 농구에만 관심 있는 줄 알아서 포기하려고 했는데, 알고보니 세상 달콤한 로맨티스트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의 기쁨 - 더 매력있어! 고백해야지!- 비슷한 게 느껴진다. 똥멍청이 미국인이 되고 싶지 않아 (Don't wanna be an American idot) 외치면서도, 쿵쾅대는 내 심장은 니꺼야(my beating heart belongs to you), 널 찾으려고 한없이 걸어왔어 (I walked for miles til I found you) 라는 낭만까지 외치는 애라면 당장 사귀지 않을까. 온갖 힙하고 쿨한 것들 사이에서 'You are the moonnlight of my life everynight' 같은 가사는 다소 촌스럽기도 하지만, 내 눈엔 천편일률적인 힙스러움보다야 고전적인 돌직구가 나아 보인다. (돈 자랑, 집 자랑은 그만하면 되었으니, 뮤지션들이여.. 셰익스피어를 들려달라..)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기타를 연습해서 당시 남자친구였던 Y에게 <Last Night on Earth>를 부르면서 프로포즈 하고 싶다. 돌아갈 수 없으니 돌아오는 결혼 기념일에라도 불러주면 좋겠다. 예전엔 참 낭만을 모르고 살았는데, 기념일 같은 거 왜 챙기나 싶었는데, 나이 들수록 소소한 이벤트를 궁리하는 걸 보면 나도 좀 살 만해졌나 싶다.
물론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결혼식은 절대 하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사랑과 결혼식은 너무 어색한 조합이다.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도통 모르겠다. 예전에는 이보다 강경하게 예식을 반대하는 입장이었지만, 사회규범 때문에 결혼식을 하고 싶어도 못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난 후 부터는 마음이 조금 바뀌긴 했다. 누군가에게 필요한 낭만이 누군가에겐 불필요하고, 그 반대의 경우도 존재한다. 예식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문제보다 더 중요한 건 나만의 방법으로 낭만을 향유하는 일이 아닐까 싶다. 5년 전의 나는 낭만을 잘 몰랐지만, 이제는 안다. 며칠 전 경전을 읽다가 세상 낭만적인 결혼식을 발견하기도 했다. 예식을 치루기 위해선, 일곱송이의 꽃만 있으면 충분하다는 사실을 널리널리 알리고 싶어서 이 글을 쓰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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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모니 부처의 전생 이야기를 담은 <본생경> 이라는 경전이 있다. '우주가 생성되고 파괴되기를 아흔 한 차례나 거듭하기 이전' 석가모니 부처님의 전생은 바라문 청년 '수메다' 였다. 고통에서 벗어나는 지혜를 찾기 위해 길을 떠난 수메다는 한 마을에서 우연히 부처님이 방문한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는 것만으로로 가문의 영광이던 때였다. 공양으로 꽃과 향만 받으신다는 말을 듣고 수메다는 성 안팎을 헤매며 꽃을 찾았지만 이미 사람들이 다 가져간 뒤였다.망연자실해 있던 중 꽃을 든 여인을 발견하고 다가가, 화병에 담긴 푸른 연꽃을 자신에게 팔아달라고 간청한다. 팔 물건이 아니라며 뿌리쳤지만 수메다가 은전을 오백 냥을 주겠다고 하자 여인은 다섯송이를 건네며 조건부 딜을 한다. 첫번째 조건은 자신은 여자라서 부처님을 만날 수 없으니, 나머지 두 송이를 대신 공양해 줄 것, 두번째는 꽃 다섯송이에 오백 냥을 서슴없이 내는 당신은 보통 사람이 아니라 결혼하고 싶지만, 수행자라 불가능할 테니 다음 생에 남편이 되어 달라는 것. (-불교 경전에 등장하는 간혹 등장하는 여성들은 시대배경에도 불구하고 어찌나 주체적인지 모른다!!)
수메다는 딜을 받아들인다. 부처님이 성 안을 지나가실 때, 군중 틈에 있던 수메다는 다섯 송이의 연꽃을 부처님 향해 던지며 '지혜를 주소서' 염원하고, 나머지 두 송이의 연꽃을 던지며 '고삐라는 여인이 제 아내가 되게 하소서' 기원한다. 그러자, 일곱송이의 꽃이 부처님 머리 위에 일산처럼 펼쳐졌다는 이야기. 그리고 수메다는 다음 생에 꽃을 든 여인을 만났고, 석가모니 부처가 되면서 부부의 인연은 다 했지만, 여인도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다는 이야기.
처음 이 이야기를 듣는다면 허무맹랑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결혼에 대해 이보다 명확한 은유를 제시하는 텍스트를 아직 보지 못했다. 엄청난 확률을 뚫고 생판 남인 두 사람이 만나 평생을 같이 한다는 인생의 설정이 너무나도 낯설고 이상하게 느껴질 때가 있는데, 두 사람의 만남이 과거에 우리가 했던 약속이라고 생각하면 조금 이해가 된다. <Last Night on Earth>의 가사 'I walked for miles til I found you'의 miles를 세세생생으로 번역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전생에 결혼을 약속을 했다는 사실 자체보다 어떤 방식으로 약속을 했는지다. 수메다와 고삐가 부부의 인연을 맺기로 한 대목은 읽고 또 읽어도 범상치 않다. 구구절절 이유 없이, 아무런 조건 없이 서로가 보통 사람이 아님을 단박에 알아보고, 꽃 일곱송이만 가지고 결혼을 약속했다. 세상에서 가장 짧고 굵은 연애담이다. 물론 경전에서는 사랑 이야기가 더 진행되지 않지만, 불경스럽게도 나는 서로를 그리워하는 수메다와 고삐를 자꾸만 상상하게 된다. 사랑은 때로 이루어지지 않아 더 아름답게 남기도 하지 않은가. 물론 이들은 다시 만난다. 각각 왕족의 자녀로 태어나 어떻게 다음 생에 인연을 맺는지도 흥미진진하니 궁금하신 분은, 혹은 결혼을 앞두고 있는 분들은 <부처님의 생애>를 꼭 읽어보길 바란다.
이 이야기의 영향으로 불교식 법당 결혼 식순에는 신랑이 다섯송이의 꽃을 신부가 두 송이의 꽃을 불단에 올리는 헌화 순서가 있다고 한다. 물론 나는 굳이 결혼식을 하기위해 법당까지 갈 필요도 없다는 입장이다. Last Night on Earth를 틀어놓고 둘이서 마주보고 꽃 일곱송이를 서로 나눠갖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예식이 될 것 같다. 다음 생에서 또 만나자고 약속하면서. 사랑의 서약이란, 유일무이 할수록 좋다. 세상에 하나뿐인 결혼식이 점점 많아지고 있는 요즘의 분위기가 그래서 참 반갑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