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10자루의 연필을 쓰는 인생

by 미료




정말 오랜만에 연필을 샀다. 그동안에는 연필을 쓸 일이 없었거니와, 쓸 일이 생기면 여행지 호텔에서 챙겨 온 연필을 사용했었다. 호텔에서 제공하는 연필이나 펜, 종이는 품질이 좋아서 가끔 기념품처럼 챙겨 오기도 했다.


호텔 이름이 새겨진 필기구를 보고 있으면 여행할 때의 기분이 떠오르고, 내가 거기에 정말 다녀온 게 꿈이 아니라는 증거가 돼주는 것 같았다. 화려하게 의미를 갖다 붙이는데 비해, 금방 그것들을 잃어버리는 게 문제긴 하지만.


어디로 가지고 나간 일도 없는데 연필이나 펜이 자꾸만 없어지는 이유를 모르겠다. 여행객들이 가져간 물건을 수거하러 다니는 유령이라도 있는 걸까.






지우개처럼, 연필도 따로 사서 쓴다는 개념이 없었던 나였는데, 마쓰에이 마사시 작가가 쓴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라는 소설을 다 읽자마자 문구점으로 달려가, 이야기 속 등장 인물들이 사용하던 스테들러 루모그래프를 세트로 구매했다.


그 소설을 한 줄로 요약하라면 '우아한 취향을 가진 무라이 건축 설계 사무소 직원들이 삶의 올바른 가치관을 제시해주는 소설'이라 쓰고 싶다. 그리고 나는 건축 설계에 담긴 삶의 철학보다는 소설 속 등장인물의 사적인 취향에 좀 더 관심이 갔다.


그들이 시시때때로 듣는 음악, 신선한 재료로 정성껏 요리한 음식, 빈티지 자동차 (소설에 등장하는 볼보 스테이션 웨건은 나의 로망카이기도 하다), 위스키와 차 종류까지, 타인의 인스타그램을 엿보듯 취향을 살펴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써 놓고 보니 유명한 작가의 책에 상품 PPL을 넣으면 잘 팔리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책 덕후만의 착각이려나.




아무튼 소설 속 나만의 인플루언서들을 따라 차를 사거나 위스키를 마시기엔 내 통장이 너무 가벼워서, 제일 만만한 연필부터 사서 써 보기로 했다.



연필과 관련해 소설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일의 정확성을 위해 하루 최대 10자루의 연필을 쓰는 모습이었다.



"나중에 유키코에게 물었더니 오전 오후 합해서 최대 열 자루 정도 연필을 쓰는 것이 일의 정확성도 지켜지고 연필도 정성껏 다루게 된다고 설명해 주었다. 그보다 더 깎아야 하는 것은 필압이 너무 강하거나 너무 난폭하거나 너무 서두르거나 그중 하나로 즉 아무 생각 없이 일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덧붙였다." ------------------------------------------------------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살면서 하루에 10자루의 연필을 쓴 적이 있었는지, 일을 할 때 내가 사용하는 도구를 정성껏 다뤄본 경험이 있는지 돌이켜 봤다. 기억나는 것이 별로 없었다. 나는 도구는 말 그대로 도구에 불과할 뿐이라고 여겼다. 지우개나 연필을 아무데서나 주워서 썼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잃어버린 것처럼, 나는 대부분의 물건을 함부로 대했다.



무언가를 소중히 대하고 다루는 법을 연마할 필요가 있겠다고 생각하며 집으로 돌아와 은색 철제 케이스의 비닐 포장지를 벗겨 열어보았다. HB, 2B, 4B, 6B, 7B, 8B심의 6자루가 서로 닮은 형제처럼 쪼르르 귀엽게 누워있었다. 뭘 모르는 내 눈에도 채도가 높은 파란색의 바디가 영롱하고 세련되어 보였다.


설레는 마음으로 가장 심이 얇고 흐린 HB 연필을 꺼내 일기를 썼다. 역시 가벼웠다. 최근 며칠 동안 만년필 필사에 빠져있던지라 있던지라 마치 모래주머니를 떼고 달리는 듯한 기분으로 글씨를 썼다. 설계의 작은 부분까지도 세심하게 고려하는 무라이 설계 사무소 사람들의 장인 정신을 떠올리면서, 나도 언젠가 '필사 장인'이 될 수 있을까 하는 기대를 품어보았다.






연필로 필사를 하면 확실히 오래 할 수 있다. 보통 펜이나 만년필로는 한 페이지만 써도 팔이 아픈데 연필로는 서너 페이지도 거뜬하게 쓸 수 있을 것 같다.


오늘은 알베르 카뮈의 젊은 시절 에세이 <안과 겉>의 서문을 필사했다. 스물한 살에 쓴 글에 관한 서문을 20년 후에 다시 쓰는 기분은 어떨까. 그것이 마치 '미래의 알베르 카뮈'와 '과거의 알베르 카뮈'가 조우하는, 크리스토퍼 놀란식의 시공간 초월을 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미래의 알베르 카뮈'는 '과거의 알베르 카뮈'가 고민하고 성찰했던 방향으로 충만한 인생을 살고 있으면서도 젊은 날의 서투른 열정을 그리워하고 있는 듯했다. " 공포감과 낙담은 경험했지만 원망이라는 것은 끝내 모르고 지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언제나 나보다 더 낫고 훌륭했다"와 같은 문장은 너무 좋아서 연필을 잠시 내려놓고 검은색 잉크펜으로 진하게 옮겨 적었다.


알베르 카뮈는 나를 영원히 모르겠지만, 나는 오늘 그를 만났다. 필사를 하는 동안 연필을 세 번 깎았다





연필을 깎는 기분도 좋지만 그보다 연필의 길이가 짧아지는 걸 보는 게 더 좋다. 마치 내가 보낸 시간의 흔적을 보는 것 같아서다.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의 등장인물들은 연필의 길이가 2센티미터 이하가 되면 과일주를 담는 커다란 유리병에 모아 별장에 따로 보관하는데, 난로 옆 선반에 무려 7개의 항아리가 놓여있다고 묘사되어 있다 "무라이 설계 사무소"의 역사를 일일이 브로셔로 제작하거나, 건축 설계 표창장 같은 걸 벽에 걸어놓지 않아도, 키 작은 연필을 모아둔 항아리 7개가 그 역사를 더 생생하게 증명해 줄 거라는 생각을 하니, 당분간 나도 연필만 사용하고 싶어 졌다.



어릴 때는 연필이 짧아지면 모나미 펜 심지에 끼워서 쓰곤 했는데, 소설 주인공이 리라 홀더를 끼워 쓴다는 구절을 읽고, 그걸 사야겠다고 결심했다. 아, 그리고 주인공이 연필 깎기용으로 선물 받은 '오피넬 폴딩 나이프'도 조만간 구매할 것이다.


도구에 관심 없던 나인데, 역시 책 덕후의 인플루언서는 소설 속 캐릭터인가 보다. 그들을 닮기 위해 오늘도 베끼고 또 베껴 쓴다. (알베르 카뮈 소설의 등장인물은 별로 닮고 싶지 않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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