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끝 찡해지는 추억의 문구류

by 미료


독서노트를 쓰기 전에는 집에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똥 펜'을 주로 사용했다. (똥.. 이란 말은 더럽지만 다른 명사와 조합되면 왜 귀엽게 들리는 걸까. 똥 펜, 똥강아지, 똥 멍청이, 똥꾸멍... 아, 이건 아닌가)




어린 시절부터 책 읽고 글쓰기를 좋아했지만 필기구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학용품을 살 용돈이 넉넉지 않았던 이유도 있다. 그나마 유일하게 관심을 가지고 있던 필기구는 지우개였다.


당시 초등학생들 사이에서는 손가락으로 지우개를 튕겨서 상대방 지우개 위에 올리면 이기는 게임이 유행이었다. '화랑'이라는 회사에서 만든 커다란 소프트 점보 지우개만 있으면 웬만한 게임에서는 이길 수 있었다. 탄력이 좋아 잘 튕겨져 나가고 각이 져 있어 잘 굴러가지 않기 때문이었다. (책상 아래로 굴러 떨어지면 실점하게 된다.)


그러나 500원짜리 지우개는 내게 사치였다. 지우개란 교실과 복도를 오가면서 하루에도 서너 개씩 공짜로 얻을 수 있고, 잃어버려도 아무도 찾지 않는 물건이기에 더욱 그랬다.








지금도 그런진 모르겠지만 이제 막 초등학교에 입학한 아이들은 아직 글씨 쓰는 게 서툴다는 이유로 암암리에 샤프를 쓰는 게 금지되어 있었다. 쪼끄만 어린애들은 샤프는 언니, 오빠들이 쓰는 거구나, 쉽게 수긍했다. 나는 샤프가 너무너무 쓰고 싶었지만 연필 깎는 일을 좋아해서 참을 수 있었다. 연필 깎기의 손잡이를 돌릴 때 연필이 깎여나가는 소리가 꼭 기차가 달리는 소리 같았다. (그래서 은색 샤파 연필 깎기가 기차 모양이었구나)

나는 그걸 갖고 싶었지만 엄마는 엄마는 오렌지색 지붕이 있는 집 모양의 월드 카파 연필 깎기를 사주었다. 연필 깎기가 뭐였든 아홉 살의 조미정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최진실 언니가 그려진 책받침을 노트 뒷면에 반듯하게 되고 일기를 쓴 뒤 다섯 자루의 연필을 뾰족하게 깎아야 편하게 잠드는 아이였다. 그 아이는 허구한 날 필통 챙기는 걸 깜빡해서 짝꿍에게 펜을 빌리는 열아홉 살로 자라게 된다.




라떼.. 유행했던 펜 중에는 사쿠라 젤리롤펜이 있었다. 지금 봐도 색감을 매우 잘 뽑아냈다. 펄이 살짝 들어가 있어서 다이어리 좀 꾸민다 하는 친구들은 색깔별로 수십 자루씩 수집하곤 했다. 특히 노트 한 권을 창의적인 아이디어의 사랑 고백으로 채우는 '러브장'을 쓰는 친구들에게 사쿠라 젤리롤펜은 없어서는 안 될 아이템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러브장 아이디어 만든 사람들 다 천재였다 언어천재..



색감은 쨍하지만 번지는 걸 싫어했던 나는 파일롯 하이테크 펜을 선호했다. 펜 이름처럼 고도의 기술이라도 들어간 건지 한 자루에 이천 원정도였던 걸로 기억한다. 용돈 털어 살 만한 가치가 있었지만 한번 떨어뜨리기라도 하면 잉크가 나오는 펜촉이 푹 들어가 못 쓰게 된다. 그래서 나는 하이테크 펜은 잘 빌려 쓰지 않았다.


가장 만만하게 구입할 수 있는 펜은 동아에서 나온 '미피 펜'이었다. 유성펜(똥펜..) 한 자루에 200원이었는데 필기감도 좋고 디자인도 귀여웠다. 미피 중성펜에서는 달큼한 향기가 났다. 향기를 다시 맡는다면 그 시절이 떠올라 왠지 눈물이 날 것.. 만 같다.




새 학기마다 과목별로 공책을 사던 설렘, 책 비닐을 싸서 교과서를 싸던 일, 반 친구들의 필통과 공부 잘하는 친구들의 필기 노트를 엿보던 즐거움, ''야, 이 펜 진짜 잘 써진다!' 하면서 문구 테크놀로지에 서로 감탄하던 나날들, 노트 맨 뒷장을 죽 찢어서 컴퓨터용 사인펜으로 무늬와 패턴을 그린 다음 단짝 친구에게 편지를 쓰던 일, 국민 샤프였던 제도 샤프 슬리브에 샤프심이 걸려 지우개 끝에 달린 뾰족한 철사로 샤프심을 빼내던 일, 얼마 쓰지도 않은 젤리 롤 펜이 갑자기 안 나와 짜증 부리던 일, 하이테크 펜이 바닥에 떨어지는 찰나의 쓰라림, 시험 문제 채점할 때 꼭 필요한 돌돌이 색연필, 수학 시간에 쓰던 모눈종이와 사회 시간에 지도를 따라 그리기 위해 썼던 미농지 (트레싱지)....




어른이 된 지금 이제는 시험공부를 해야 할 일도 없고 마음만 먹으면 사고 싶은 학용품쯤이야 다 살 수 있게 되었지만


가끔은 학교에 가서 수업도 듣고 시험도 보고, 학교 앞 문구점 안을 구경하며 용돈 모으면 사고 싶은 펜의 목록을 헤아려보던 때가 그립기도 하다.


그때는 빨리 대학생이 돼서, 어른이 돼서 문구점에 있는 물건을 다 사고 싶었는데, 아니 문구점 주인이 되겠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러고 보면 인간은 바라는 것들이 막상 이뤄져도, 바랄 것이 많았던 과거를 그리워하는 동물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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