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국어는 언제나 내 편이었다

by 미료





2019년 10월 한국에 다녀왔다. 3년 만의 방문이었다. 가장 우선순위였던 스케줄은 도서 팟캐스트 <책읽아웃>에서 주최하는 공개방송에 참석하는 일이었다. 게스트는 무려 소설가 은희경이었다. 지방에 계신 부모님 얼굴을 보기도 전에 서울에 숙소를 잡고, 대학 시절부터 팬이었던 소설가의 신작을 구매하려고 서점을 찾았다. 망원동에 있던 동네 서점은 다세대 빌라들이 오밀조밀 모여있는 좁은 골목길을 돌고 돌아야 나왔다. '누구야' 하고 부르면 누구든 나올 것 같은 정겨운 골목길이었다. 어릴 적 동네를 종횡무진 누비며 연을 날리고 고무줄놀이를 하고 축구를 하던 추억이 떠올랐다. 미로처럼 구불구불한 골목길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것이 큰 행운처럼 느껴졌다.


입국한 지 삼 일밖에 안 돼서 아직 4G 인터넷을 연결해 쓰지 못하고 있었는데, 다행히 동행인이 있어 무사히 길을 찾아갈 수 있었다. 책방에 들어서자 책의 기운이 훅 하고 바람처럼 느껴졌다. 마음 같아선 이 서점을 통째로 호주로 들고 가고 싶었다. 사고 싶은 책이 많았지만 아직 짐을 늘릴 단계가 아니라 <빛의 과거> 동네 서점 에디션만 구입해서 나왔다.


숙소로 돌아와 앞부분을 조금 읽었다. 책장을 펼치자 마치 연극 무대의 막이 열리듯 1977년 여대생 기숙사 이야기가 시작됐고, 내 안에 대학교 캠퍼스를 거닐던 때의 감각이 깨어나는 듯했다. 다른 학교 학생들도 찾아와 피크닉을 즐기고 사진을 찍으러 올 만큼 예쁜 교정과 건축물이 있는 학교였다. 사 년 동안 거기에서 만났던 사람들이 환영처럼 눈 앞에 나타났다 사라졌다. 과거는 꿈이나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나의 꿈과 그들의 꿈은 어떻게 다를까. 같은 시공간에서 같은 경험을 하더라도 사람에 따라 다르게 기억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이 소설의 핵심처럼 다가왔다. 그러나 그보다, 대학을 졸업한 지 벌써 십 년 가까이 흘렀다는 게, 내가 더 이상 학교에도 한국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여행자의 신분으로 한국에 있다는 사실에 설레면서도 조금 슬펐다.





<책읽아웃>은 호주에서 매일 출퇴근용으로 듣던 팟캐스트였다. 엄마가 요리해 준 반찬이 그리워지듯, 모국어가 고플 때 한국어가 나오는 팟캐스트를 듣고 있으면 어쩐지 든든해졌다. 버스 안에서, 트레인 안에서 한국어가 흘러나오는 이어폰을 귀에 꼽고 있으면 영양가 있는 음식을 섭취한 것처럼 힘이 났고, 내 영어가 여전히 부족하다는 사실에 주눅 들지 않게 됐다. 나의 가족처럼 모국어는 언제나 내 편이었다.


오랜 시간, '내 편'처럼 여겼던 팟캐스트 방송을 직접 보러 강연장으로 향하던 날, 이번에는 동행인 없이 감으로 혼자 찾아가다 길을 잃고 말았다. 행인들에게 길을 물으니 스마트폰으로 검색해 친절히 방향을 알려주었다. 내가 스마트폰이 없는 과거에서 온 사람처럼 느껴졌는데, 그것이 이상하게 싫지 않았다.

강연장에 도착하니 이미 1부는 끝나 있었다. 아쉬웠지만 나머지 2부를 볼 수 있어서 좋았다. 매주 듣던 팟캐스트였는데 현장에서 들으니 확실히 달랐다. 거기 있던 사람들과 좋은 걸 나누고 온 기분이었다. 녹화가 끝나고 사인회가 있었다. 태어나 두 번째로 받아보는 누군가의 사인이었다. 나는 그 책만큼은 누굴 주거나 어디에 팔 수 없겠다고 생각했다. 사인 때문만이 아니라, 그 책에 한국에서의 추억을 담겨 있기 때문이었다.




<빛의 과거>를 완독한 뒤 독서노트를 쓰던 때를 생생하게 기억한다. 부모님과 열흘 정도 시간을 보내고 볼 일을 보기 위해 부산에 내려갔던 때였다. 서면의 작은 모텔에서 하룻밤을 묵고 다음날 아침, 제일 먼저 교보문고로 달려갔다. 호주에서는 구하기 힘든 볼펜을 몇 자루 사고, 서점 안의 카페에서 차가운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을 주문했다. 10월이었지만 아직 여름 끝물의 온도가 남아 있었다.

<빛의 과거>를 꺼내 소설의 남은 분량을 다 읽고 새로 산 펜을 들고 독서노트를 적기 시작했다. 주어진 시간이 얼마 없어 길게 작성하지는 못했다. 일단 소설의 첫 문장을 베껴쓰고, 키워드로 생각되는 단어 몇 개를 적었다. 그리고 책의 문장 중 가장 좋다고 느껴지는 277쪽과 278쪽의 구절을 써 넣었다. 존경하는 학교 선배가 오랜만에 밥 사주면서 애정 담아 건네주는 인생 조언 같았다.



"젊고 희로애락이 선명하고 새로 시작하는 일도 가능했던 시절이었다. 그 시절의 인생이 더 나았을까. 꼭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욕망이나 가능성의 크기에 따라 다른 계량도구들 들고 있었을 뿐 살아오는 동안 지녔던 고독과 가난의 수치는 비슷할지 모른다. 일생을 그것들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해도 나에게만 유독 빛이 들지 않았다고 생각할 만큼 내 인생이 나빴던 것도 아니다. 그리고 이 세상이 뭔가 잘못됐다면 그 시스템 안에서 살아남으려 했던 나의 수긍과 방관의 몫도 있다는 것을 알 나이가 되었다" <빛의 과거/ 은희경>



'나에게만 유독 빛이 들지 않았다고 생각할 만큼 내 인생이 나빴던 것도 아니다'라는 구절에서 오래 머물렀다. 그 문장이 마치 내가 살아온 삶 전체를 긍정해주는 느낌, 적당히 필요한 만큼 빛과 어둠이 공존해왔다는 사실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나의 이십 대와 기분 좋게 이별하도록 하는 추도사같기도 했다. 당분간은 그 문장이 주는 힘으로 살아가리라는 걸 알았다.


https://youtu.be/qW6vQyNYkx4






시댁을 방문하고 나서 엄마와 속초를 여행했다. 말로만 전해 듣던 '동아 서점'에도 들렀다. 이제 막 문을 연 서점 내부는 조용했다. 엄마가 옆에서 기다리는 것도 잊어버리고 한참을 정신없이 둘러보다, 종이책으로 읽고 싶었던 책 4권을 구입했다. 토니 모리슨의 <재즈>, 김연수의 <시절 일기>, 아룬다티 로이의 <작은 것들의 신>, 앤드류 포터의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이었다. 호주에 돌아가면 내 편이 되어줄 책들이었다.


책이 든 쇼핑백 한아름 안고 기뻐하자 엄마가 '책이 그렇게 좋아?' 하며 웃었다. 계산을 하려는데 밖에서 초등학생 아이들이 단체로 노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괜히 아련한 마음이 들어 코끝이 찡해졌다. 별 거 아닌 풍경에 자꾸 눈물이 나는 여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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