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꾸와 스티커를 좋아하는 어른에 대하여

by 미료








오늘은 다른 날보다 일찍 일어났다. 발코니 창문을 열고 나가 시원한 아침 공기를 흠뻑 들이마셨다. 다섯 달 째 기르고 있는 방울토마토들이 제법 빨갛게 무르익었다. 선선한 바람이 불 때마다 살랑살랑 흔들리는 토마토 잎사귀들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바람결에 요란한 새 지저귐이 들려왔다. 로리키트(lolikeets)라 불리는 앵무새 과의 녀석들이었다.


서호주에 살면서 이국적인 식생뿐 아니라 파충류와 새에 흥미를 갖게 됐다. 한 번은 동네 도서관에서 마련한 새 울음소리 전시를 구경한 적이 있었는데 무척 새로운 경험이었다. 이전까지 새들의 지저귐은 백색소음 같은 거였지 그 뒤에 실체가 있을 거라고는 굳이 생각해본 없기 때문이었다. 작은 새 한 마리가 온 세상을 울릴 만큼의 공명을 가지고 있다는 게 새삼 놀라웠다. 그 전시를 보고 난 이후, 각각의 새들이 내는 소리가 하나의 완벽한 형태로 어우러질 때마다 전율을 느끼게 됐다. 매일 내 앞에 펼쳐지는 하루하루가 그 자체로 한 권의 책이라는 생각을 자주 한다.



앵무새 사진이 없어서 울음소리가 특이한 쿠카부라로.....통통하니 귀여워서 호주 어린이들에게 인기 만점.





요즘은 N.K 제미신의 <다섯 번째 계절>과 무라카미 하루키의 <내가 달리기를 할 때 말하고 싶은 것들>을 동시에 읽고 있다. <다섯 번째 계절>은 10월 2일부터 읽기 시작해서 10월 11일인 오늘까지 약 70%가량을 읽었다. 버스 정류장에서 950번 버스를 기다리면서, 동네 한 바퀴 가볍게 산책하면서, 달리는 트레인 안에서 혹은 잠들기 전에 틈틈이 한 두 챕터씩 읽다 보니 열흘째 책을 손에 쥐고 있다.






앉은자리에서 쉴 틈 없이 한 권의 책을 읽는 방식도 좋아하지만 단시간에 고도로 몰입해서 책을 읽는 ‘시간 쪼개기’ 독서도 좋아한다. 한정된 시간을 효율적으로 썼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어쩌면 나 같은 유형의 인간은 죽기 직전에도 읽다 만 책의 페이지를 펼치고 싶어 할지 모르겠다. 아무튼 책을 읽을 때만큼은 집중하기까지 버퍼링의 시간이 없다. 좋아하는 만화의 오프닝이 시작되면 쥐도 새도 모르게 텔레비전 속으로 빠져드는 아이들처럼, 한 문장을 읽자마자 바로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 수 있다. 책을 읽을 때는 주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신경 쓰지 않는다. 누군가 내 앞에서 벌거벗고 춤을 춘데도 책에 집중할 수 있을 것 같다. 책을 읽는 마음으로 인생을 살면 좋을 것 같다.







걸으면서 책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이상한 사람이고 싶다.








안전이 확보된 길에서는 천천히 걸어가면서 책을 읽기도 한다. ‘책벌레’ 스럽게 들리겠지만 ‘걷기 독서’는 균형감각을 향상한다.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면 직접 해보면 알 수 있다. 일직선으로 걸어가면서 넘어지지 않고 책을 읽는 게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애나 번스의 장편소설 <밀크맨>에는 걸어가면서 책을 읽는다고 동네 사람들한테 이상한 소녀 취급받는 주인공이 등장한다. 그 책을 읽고 나는 더욱더 걸으면서 책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이상한 사람이고 싶다.

<다섯 번째 계절>은 걸으면서 읽기에 적합한 소설이다. 등장인물들이 물리적으로 어딘가를 향해 나아간다는 느낌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근래에 본 SF 소설 중에 가장 흥미로운 소설이었다. 거기에도 이상한 사람들이 잔뜩 등장한다. 이야기를 한 줄 아니, 두 줄 요약하자면 지각의 에너지를 컨트롤하는 힘을 가진 ‘오로진’이라는 종족의 이야기다. 이들은 위험한 힘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차별과 혐오의 대상이 되며, ‘펄크럼’이라는 기관에 가서 공동체에 기여하는 방향으로 자신의 힘을 다스리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

흑인 여성 작가로서 소수자와 차별에 관한 이야기를 썼다는 걸 굳이 의식하지 않더라도, 이 책은 그냥 재미있고 훌륭하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세계관을 몰라도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 재미있고, 봉준호의 세계관을 몰라도 ‘살인의 추억’이 훌륭한 영화인 것처럼. 필사를 시작한 이후로 밑줄 그을 만한 문장을 찾는 데 강박이 약간 생긴 것 같은 기분이었는데, 오랜만에 밑줄 긋기에 신경 쓰지 않고 이야기에 푹 빠질 수 있었다.


작가의 신문 기사 인터뷰를 읽고 생전 관심 가져본 적 없는 지질학에도 관심을 갖게 됐다. 작가는 지질학을 재미 삼아 독학했으며, 우연히 나사(NASA)가 후원하는 지질학 워크숍에 참가했다가 그 당시 꾼 꿈에서 다음과 같은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했다.



“ 한 여성이 떠오르는 산을 뒤로한 채 내게 걸어왔다. 아주아주 화가 난 상태였고, 왠지 그 여성이 산을 내게 던져 버리리란 확신이 들었다. 그 여성을 중심으로 한 이야기를 짜기 시작했다”



이 얘길 듣고 나는 이 소설이 더 좋아졌다. 산을 던진다니, 뭔가 큰일 하는 여성에 대한 은유 같았다. 하지만 은유가 아니었다. 소설 속 주인공은 말 그대로 산을 던질 수 있는 힘을 부렸다. 네이버에서 ‘다섯 번째 계절’을 검색하면 소설보다 걸그룹 아티스트 오 마이걸의 <다섯 번째 계절>이 먼저 나온다. “나의 맘의 지각변동은 너로부터”라는 가사로 미루어보아 소설 <다섯 번째 계절>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 분명해 보이는데, 노래가 너무 하늘하늘해서 조금 당황했다. 하지만 듣다 보니 노래도 멤버들도 너무 아름다워서 지금은 소설보다 오마이걸에 더 빠져 버렸다. ‘오마이걸’이 꿈에 나와 산, 아니 작은 언덕이라도 던지는 힘을 발휘한다면, 다섯 소녀를 주인공으로 판타지 소설을 써 보겠다.




천사가 내려왔네




일단 그전까지 <다섯 번째 계절>을 포함한 작가의 ‘부서진 대지’ 3부작을 다 읽을 예정이다. 언제나 그렇듯 책을 펼칠 때는 완독이 최우선의 목표다. 읽을지 안 읽을지 모르지만 일단 책을 사고 보는 유형이 있는가 하면 끝까지 다 읽을 책만 구매하는 독서가가 있는데 나는 후자다. 사놓고 안 읽는 책이 있으면 마음이 불안하다. 그래서 책을 구매할 때는 내키는 대로 장바구니에 담기보다 항상 끝까지 읽을 자신이 있는 책을 신중히 고른다. 이 글을 출판사에서 마뜩지 않아하겠지만 어쩔 수 없다. 나에게 꼭 필요한 것만 취하려는 습관은 아주 오래전부터 내 몸에 배어있는 태도다. 음식도, 인간관계도, 다른 물건을 살 때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지금처럼 여러 권의 책을 동시에 읽을 경우 완독률이 떨어질 때가 있는데 이때는 ‘리딩 트래커’를 활용한다. ‘리딩 트래커’란 좋은 습관을 만들기 위해 매일 해야 할 일을 체크하고 기록하는 ‘해빗 트래커’의 유사 버전으로, 읽

은 책의 분량이나 시간을 체크하면서 독서 습관을 만들어 나가는 기록법이다.

개인에 따라 다양한 방법을 활용할 수 있는데 내 경우는 책의 챕터 개수만큼 동그라미를 그린 후 한 챕터 읽을 때마다 색칠하고 있다. 때에 따라서는 색칠 대신 스티커를 붙이기도 한다. 소싯적 유치원 다닐 때 포도알 좀 모아봤다면, 스티커 하나를 얻기 위해 착한 일을 하거나 밥을 잘 먹으려고 노력했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하루 한 챕터씩 읽을 때마다 스티커를 하나씩 붙인다 :)



추억의 포도알... 아시는 분...?




30개의 포도알을 완성하기 위해 스티커를 하나하나 붙여갈 때의 성취감과 뿌듯함이란! 구슬 7개를 모아야 한다는 구체적인 목표의식이 없었다면 손오공도 그토록 열심히 싸우지 못했을 것이다. 여기서 포인트는 7개다. 몇 개를 찾아야 하는지 모르면 쉽게 지쳤을 것이다. 이것은 손오공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얘기다.


상황에 따라 다르게 정의되겠지만 ‘현재의 나’에게 행복이란 적당히 동기 부여가 되는 삶을 사는 것이다. 실제로 무언가로부터 영감이나 자극을 받을 때 신체에 행복 호르몬인 도파민이 흐른다고 한다.






하루 한 챕터 분량의 책을 읽고 스티커를 붙이는 게 어른스럽지 못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솔직히 살짝 사랑스럽지 않은가. 인문학 서적을 탐독하며 우주와 자아의 본질을 파악하는 ‘나’와 두 손가락으로 하트 모양의 스티커를 떼어 내어 신중하게 노트에 붙이는 ‘나’가 같은 사람이라는 게.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든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철학적인 질문의 해답을 찾기 위해 책을 읽지만, 어쩌면 그 답은 독서가 아니라 스티커를 붙이는 행위에서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실제로 1991년 동일 유치원의 기린반 조미정 어린이는 포도알 스티커를 붙이며 성장했다. 2020년 서호주 퍼스에 사는 조미정도 어제보다 괜찮은 사람이 되기 위해 독서노트에 스티커를 붙이면서 올해 1월의 상태보다는 한 발 나아간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 죽기 직전까지도 누군가 허탈한 웃음을 지을 만큼 사소한 목표를 가지고 스티커를 붙이는 인간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좀 더 신박한 스티커를 구할 수 없을까 인터넷을 헤매며 오늘도 ‘나’라는 책을 써 나가는 중이다. (*)



무라카미 하루키의 달리기 에세이를 읽으며 매일 달리고 있다. 오늘 5일째! (스티커 붙이러 가즈아!!)


keyword
이전 11화침대를 없애고 생긴 새로운 습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