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내가 급조한) 책 덕후 테스트다.
이 중 하나라도 해당되면 당신은 책 덕후가
확실하다.
1. 지하철이나 카페에서 독서에 푹 빠져 있는 사람을 발견했을 때, 다가가서 책 제목이 뭐냐고 물어보고 싶은 충동을 느낀 적 있다.
2. 누군가의 집에 놀러 가면 일단 책꽂이나 서재부터 구경하고 싶어 괜히 책 있는 방을 기웃거린다.
3. TV 프로그램에서 책 읽는 출연자를 보면, 흘끗 등장한 책 표지를 단서로 무슨 책인지 기어코 맞추려고 용쓴다.
오늘 아침, 유튜브에서 우연히
연예인의 사생활을 보여주는 예능 영상을 보다가
'3번' 항목을 실천했다.
'반독립 생활' 중이라는 배우 고아성 씨가
본인의 작업실에 도착해 가방에서 책을 꺼내 읽는데그 제목이 궁금해서 열 번도 더 돌려봤다.
한 신문사 인터뷰에서 그는
박완서 작가의 열렬한 팬이라고,
소설 속에 나오는 인물들을 롤모델 삼았다고
답변한 바 있었다.
(추리력 발동)
그가 정말로 독서를 하기 위해 가져온 책이 아니라,
촬영을 위해 준비한 책이니,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을 가져왔을
확률이 높았다.
흐릿하게 보이는 책의 판형이나 두께로 추측하건대
문학동네에서 나온
'박완서 단편소설 전집' 양장본일 가능성이 있으며,
책 커버를 벗긴 앞표지 왼쪽 모서리의
작은 그림과 글자 수를 대략 헤아려 봤을 때
일곱 권의 전집 중에서도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 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
그 책은 지난 7월
(너무 좋아서) 무릎 꿇고 읽었던 책이기도 했다.
- 부디 이 글이 고아성 씨에게
(혹은 촬영 스텝 분들에게)가 닿아
'맞다, 아니다' 답변이 돌아온다면 좋겠다.
여기서, 추가로
책 덕후 테스트 항목 4.
내가 읽은 책을 읽고 있는 사람을 보면
조건 없이 반갑다.
비슷한 독서 취향을 갖고 있다는 점은
성별, 국경, 성격, 나이 모든 것을 초월한다.
처음 만난 사람이라도, 첫인상이 아무리 쌔-해도
같은 책을 좋아한다고 하면
일단 마음의 문이 확 열린다.
음.. 그런데 지금 막 급조한 책 덕후 테스트는
책을 좋아하는 것과 상관없이
그냥 병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내가 궁금해 한 건 책 제목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올리브색 소파에 편하게 누워 책을 읽던 그는
레트로한 감성이 넘치는 책상에 앉아
필사를 시작했다.
(배우에게도 독서와 필사는
연기에 엄청난 자양분이 되는 게 분명했다.)
이제는 그가 쓰는 노트와 펜의 출처가 궁금해졌다.
한편, 책꽂이에 꽂혀 있는 책 리스트는
분명하게 보였다.
'키키 키린/ 그녀가 남긴 120가지의 말'이라는
책을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하며 메모해 두었다.
그는 작업실에 ‘시간과 정신의 방’을 줄여
‘시정방’이라는 멋진 이름을 붙이기도 했다.
애정을 담은 가구와 소품으로 채운
아담하고 빈티지한 원룸을 보고 있으니
작업실에 대한 없던 로망이 생겼다.
물론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에도 만족한다.
스무 평이 안 되는 작은 사이즈에 집이지만
나는 발코니의 원형 테이블 앞에 앉아서,
긴 직사각형 모양의 식탁 앞에 앉아서,
얼마 전에 무료로 득템 한 라임색 소파에 앉아서,
방에 있는 작은 책상 앞에 앉아
글을 쓰고 책을 읽는다.
집이 지겨워지면 아파트에 딸린 라운지나
미팅룸에 가면 나름 작업실 기분을 낼 수 있다.
필사를 하기 전에는 공간이 내게 미치는 영향을
이만큼 인식하지 못했다.
주변에 어떤 소품이 있는지,
펜이나 노트는 무엇을 쓰는지,
어떤 음료를 마시는지, 빛의 조도는
어느 정도가 좋은지,
야외가 좋은지, 실내가 좋은지,
별로 생각 안 하고 살았었다.
언젠가는 나도 번듯한 작업실을 하나 갖게 되는 날이 오길 기다려본다.
아, '작업실'과 관련된 유명한 저서로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을 추천하지만
앨리스 먼로의 단편소설집 '행복한 그림자의 춤'에 실린 '작업실'이라는 단편도 추천한다.
사실 오늘은 '작업실'이라는 소재와
그 두 편의 소설을 연관시킨 글을 쓰려고 했는데
내 작업실이 없는 바람에 집중을 못 했다.
내일 다시 써 봐야겠다.
<미료의 독서노트> @miryo_j