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병

묵언수행 중인 병들

by 미상이



내겐 투명한 작은 유리병들이 몇 개 있다.

예쁜 유리병을 모으는 일이 내 취미이다.

그렇다고 쌓아두진 않는다.

다만 버리지 못하는 특별한 유리병들이 내겐 있다.

그중 가장 오래된 것은 친구 P랑 떠난 첫 해외 여행지 '북해도'에서 가져온 우유병이다.

2002년 2월의 그날, 북해도에 폭설이 내렸고 우리는 푹푹 빠지는 눈길을 걷다가

작은 상점에 들어가 너무 예쁜 우유병을 보자마자 우유를 샀다.

차가운 우유를 마시고 빈 우유병을 가져왔다.

초록 점박이 북해도 우유병을 보면, 그날의 폭설과 추위와 신선한 우유맛이 생각난다.

그리고 언제까지 옆에 있을 줄 알았던 그러나 너무 일찍 저 세상으로 간 P를 생각한다.

추억이 있는 주스병 요구르트병 푸딩병...

이런 예쁜 병들은 버리기가 힘들다

엑상프로방스의 세잔의 아틀리에를 찾아갔을 때

한쪽 벽면이 전부 유리창인 높고 환한 그의 작업실에는

먼지 낀 유리병들이 놓여있었다.


숨김없이 속을 다 보여주는 너

세상 모든 비밀을 다 알면서 침묵하는 너

죄지은 적 없는 깨끗한 너

자신의 크기만큼만 담아내는 욕심 없는 너

그 누구도 차별하지 않는 너

닮고 싶은 차가운 유리병을 보면 깊은 곳에서 투명한 울림이 차 온다

다이아본드보다 더 빛나는 유리병

언제나 내 곁에서 묵언수행 중인 나의 찬란한 빈 유리병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반신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