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지도와 판화를 사랑하는 아이에게는,
우주의 넓이는 그의 광대한 식욕과 같으니.
아! 램프 빛 밑에서 세계는 얼마나 큰가!
- 보들레르『악의 꽃』 중 「항해」-
램프 빛 밑에서 지도를 보던 어린 날의 세계는 얼마나 컸던가. 어디론가 멀리 가고자 하는 마음. 미지의 곳을 향한 모험. 이국적인 도시 이름들. 먼 별보다 더 멀리 있는 나라들. 이곳이 아닌 다른 곳에 대한 갈증. 초라한 곳에서 환한 곳으로, 새로운 세계에 대한 이상을 꿈꾸며 여행자는 길을 나선다.
여행자들에게 “왜 여행하는가?” 물으면 대부분 “자유를 위하여”라고 대답한다. 여행에서 자유를 얻을 수 있을까. 자유란 무엇인가.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고 어디든 갈 수 있는 걸까. 여행지에는 진정 자유가 있을까. 누군가는 자유를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자유란 일시적이어서 대부분의 여행은 불안과 긴장 속에 있게 된다. 여행자는 홀로 낯선 도시에 내렸을 때부터 긴장을 피할 수 없다. 어디에나 위험이 복병처럼 숨어있기 때문이다. 위험은 여행자들을 항시 쫓아다닌다. 여행자가 방심하는 순간 공격한다. “여행은 자유다.”라는 말은 여행서에만 있을 뿐이다. 여행은 익숙한 일상보다 더 시간에 쫓긴다. 아무 곳에도 가지 않고 아무것도 먹지 않으면 모를까. 기차와 버스는 여행자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상점들도 여행자의 시간에 맞춰 불을 켜지 않는다. 세상에서 가장 자유로운 곳은 자신의 방. 진정한 자유는 오롯이 홀로 방에 있을 때이다. 그러나 여행자는 자신의 방을 나와 여행을 떠난다. 여행자의 욕망은 두려움보다 강하기 때문이다. 여행자의 자유는 위험을 이긴다. 여행자는 안락한 것만을 바라는 존재가 아니다. 여행자는 지루한 일상이 아닌 충만한 순간을 원한다.
여행자는 누구나 자신만의 목적지가 있다. 그곳에 가려면 지도를 펼쳐야 한다. 방향을 찾기 위해서다. 유한한 시간을 낭비하지 않기 위해서다. 누구에게나 시간은 공평히 주어졌다고 말한다. 그렇지 않다. 시간의 분배야말로 가장 불공평하다. 돈으로 시간을 살 수 없다고도 한다. 이 또한 아니다. 부자들은 시간을 벌기 위해 돈을 주고 타인을 부린다. 가난한 이들은 자신의 시간을 팔아야 한다. 진정한 부자는 시간을 팔지 않고 잘 지키는 자다. 여행자는 시간을 벌어들이는 법을 알고 있다. 살아있는 몇만 시간의 날들을 우리는 온전히 가질 수 없다. 여행자는 투명한 그물에 시간을 낚기 위해 떠난다. 일상의 그물은 늘어져 찰나의 순간을 놓쳐버린다. 여행자의 목적지는 각기 달라도 방향의 중요성은 일치한다. 길을 잘못 들면 사막에 이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행자는 알면서도 길을 잘못 들어선다. 그들에게 목적지와 방향은 중요하지 않다. 여행자는 길을 잃을수록 길을 더 잘 이해하게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여기서 어느 길로 가야 하는지 좀 가르쳐 줄래?”
“그건 네가 어디로 가고 싶은 가에 달렸지.”
“난 어디건 상관없어.”
“그럼 아무 데로 가도 되잖아. 어디건 도착하기만 한다면야”
고양이가 말했다.
“넌 어디건 도착하게 되어있어. 오래 걷다 보면 말이야.”
- 루이스 캐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중-
현대인에게는 참된 의미의 여행이 퇴색되었다고 한다. 여행의 참된 의미는 무엇일까. 참된 여행을 하던 시대가 있었던가. 콜럼버스는 530년 전에 대항해를 떠났다. 모로코의 이븐 바투타는 그보다 100년 전에 중국과 인도를 다녀갔다. 연암 박지원은 240년 전에 연경(북경)에 가면서 『열하일기』를 남겼다. 괴테는 140년 전에 역마차에 몸을 싣고 이탈리아로 떠났다. 괴테의 여행은 자연과 예술을 찾아가는 여정이었다. 어떤 여행이 참된 여행인가. 이 질문은 ‘어떤 삶이 참된 삶인가’라는 질문과 같다. 세계의 기차역에는 여행자들이 메뚜기떼처럼 쏟아져 나와 흩어져 사라진다. 무거운 배낭을 메고 그들은 어디로 가는 걸까. 우리 모두 각자의 삶이 다르듯 여행의 방식도 마찬가지다. 누구도 같은 여행을 할 수 없다. 모험가는 모험을, 미식가는 미식 여행을, 예술가는 예술여행을 한다. 삶도 여행도 누구나 자신에게 어울리는 길을 찾아간다.
쓰디쓴 깨달음, 그것은 우리가 항해로부터 이끌어 내는 것!
단조롭고 조그만 세계는 오늘도
어제도 내일도 항상, 우리에게 우리의 이미지를 보게 한다.
권태로운 사막에 있는 두려운 오아시스여!
- 보들레르 『악의 꽃』 중 「항해」 -
여행을 다녀오면 우리는 떠났던 만큼 넓은 세계를 갖게 될까. 나는 여행을 떠나기 전에 그렇게 믿었다. 가장 더운 계절에 지중해를 따라 나는 여행했다. 오랜 세월 꿈꾸던 여행이었다. 밀란 쿤테라의 소설에서 “팔레르모에 가지 않고 어떻게 살 수 있어요?” 이 말을 잊지 않고 <팔레르모>에서 여행을 시작했다. 괴테의 지루한 『이탈리아 기행』의 루트를 나는 반대로 거슬러 올라갔다. 추운 겨울에는 더 추운 나라를 여행했다. 폴란드 작가 볼레스와프 푸루스의 『인형』에서 ‘보쿨스키’의 상점이 있던 거리에도 가보았다. 보쿨스키 씨가 산책하던 <비스와> 강변을 혹독한 추위 속에 걷기도 했다. 나는 여행을 마치면 다른 차원의 인간이 될 줄 알았다. 분명 반짝이는 시간을 건져 배낭에 담아왔다고 믿었다. 그러나 나는 달라진 것이 없었다. 오히려 뭔지 모르지만 잃은 것이 있음을 알았다. 부증 불감(不增不減)의 진리는 여행에도 적용되었다. 나는 오래지 않아 무엇을 잃었는지 알았다. 예상하지 못한 쓰디쓴 깨달음이었다.
내가 다녀온 먼 곳은 더 이상 먼 곳이 아니었다. 초고속 열차를 타고 가면 시간을 더 벌 줄 알았는데 그만큼의 속도로 시간은 달아나버렸다. 지도에 그어놓은 선이 나를 가두게 될 줄 몰랐다. 어떤 여행자도 말해주지 않았다. 여행자들은 모두 여행 후에 현자가 될 것처럼 말했다. 나는 앞선 여행자들을 믿었다. 어린 시절 운동장이 어른이 되어 찾아가면 좁아진 것처럼, “꼬르도바 멀고 외로운!” 시인 로르까의 고향에 다녀온 후 “ 아, 멀고 먼 길!”이었던 꼬르도바를 잃어버렸다. 램프 빛 밑에 광대한 세계가 사라졌다. 나는 내 안에 먼 곳을 잃어버렸다. 가슴 뛰게 했던 시린 언어들은 죽은 별이 되었다.
과거에 나는 수없이 폄하되는 일상의 금기와 통속을 벗어나기 위해 여행을 꿈꾸었다. 안전한 풀장에서 놀기보다 악어가 득실대는 강가로 가고 싶었다. 이제는 “벗어나겠다”. 는 꿈을 꾸지 않는다. 오히려 은둔자를 꿈꾼다. 요즘은 은둔자로 살았던 에밀리 디킨스를 많이 생각한다. 마지막까지 그녀에게는 먼 별들이 항시 반짝였을 것이다.
나는 여행이 끝나고 오래 지나서야 깨달았다. 내가 가는 곳 어디에서나 나를 만났었다는 것을. 왜 앞선 여행자들이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이라 말하는지 이해했다. 결국, 우리는 자신에게로 돌아온다. 내가 풍경을 본 것이 아니다. 그들이 나를 보고 있었다. 오래된 골목의 깨진 유리창에도, 고성의 이끼 낀 계단에도, 아라베스크 무늬에도 내가 있었다. 나와는 아무런 역사도 관계도 없는 나라의 사람들. 풍경이 지워진 후에도 그들은 남아있었다. 너무 친절해서 미안했던 아주머니, 너무 티가 나게 경멸의 눈길을 보낸 역무원, 추운 거리에서 꽃을 팔던 여인, 통조림을 사 들고 비를 맞으며 버스를 기다리던 노인, 심지어 오시비엥침, 그곳 아우슈비츠에서 나치군에게 꽃을 흔들던 흑백 필름의 처녀들 속에도 내가 있었다. 그들은 일상에서도 나를 따라다닌다.
“자네는 과거를 다시 경험하기 위해 여행하는 것인가?”
이 질문은 이렇게도 바꿀 수 있을 것이다.
“자네는 자네의 미래를 다시 찾기 위해 여행하는 것인가?”
- 이탈로 칼비노 『보이지 않는 도시들』 중-
더 이상 여행에 대한 환상을 갖지 않는다. 먼 나라를 동경하지도 않는다. 멀리 가지 않아도 시간을 낚는 법을 터득했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여행 후에 깨달은 큰 수확이다. 누구든 자신의 방에서도 다른 곳에 놓일 수 있다. 여행자는 자신의 욕망과 이상에 어울리는 세계로 언제든 갈 수 있다. 이탈로 칼비노는 “지옥을 벗어나는 방법은 내가 지옥의 일부분이 되거나 지옥이 아닌 곳을 찾아내어 공간을 부여하는 것”이라고 했다. 여행에서 돌아온 후 나는 나만의 여행지를 만들고 그곳에 공간을 부여했다. 일상을 벗어나고 싶을 때 나는 그곳에 간다. 그곳은 언제나 꽃과 시와 음악이 넘치는 유토피아다. 외롭고 충만한 그곳에서 홀로 떠나는 미래의 여행을 꿈꾼다. 여행 전날 밤 모든 준비를 끝낸 후에 찾아오는 두려움. 막상 낯선 곳에 도착하면 금세 익숙해지던 공기를 기억한다.
그러니 홀로 가는 마지막 여행도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짐을 꾸릴 필요도 없다. 오히려 하나씩 짐을 버려야 한다. 해외에 나가 있는 나의 딸은 집에 올 때 짐 없이 온다. 갈아입을 옷도 안 챙기고 폰 가방 하나만 달랑 들고 온다. (출국할 땐 산처럼 짐을 끌고 간다) 내가 “짐도 없이 왔냐?” 하면 “집에 오는 건데 어때?” 한다. 우리도 누구나 마지막 여행은 짐 없이 간다. 우리는 결국, 모두 집으로 돌아간다. 나의 지상에서의 모든 여행은 두려웠지만 언제나 즐겁게 설렘을 안고 떠났다. 마지막 집으로 돌아가는 여행도 그러할 것을 믿는다. 먼 여행을 떠나는 이들이여 부디, 길 위에서 너무 오래 헤매지 말기를!
계간 <<포지션>> 2022 가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