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에게
뽀오얀 안개로 뒤덮인 인천시를 내려보며, 폐허 된 고성 같기도 하고
어쩌면 지상이 아닌 듯도 싶은 이 날은
진리탐구의 지루함을 느끼며 수업 후의 자율학습시간을 이용해 너에게
편지를 띄운다
0 아 그동안 행복했었니?
가을은 추수의 계절이야.
무언가 나에게도 너에게도 결정이 필요한 것 같애.
지금은 이 학기 후반 다급히 입시 준비를 서둘러야 함과 동시에 서서히 불안감도 생기는 때야
우리 한 번은 만나서 이야기하도록 하자.
여름 방학을 이용했으면 좋았겠지만 이미 지난 지금은 어쩔 수 없잖니
그동안 서신 못 전한 건 미안해하고 있어.
하지만 나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으니까 이해하겠지.
그건 그렇고 지금 내가 일방적으로 만나자고 할 수는 없고 -
너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둘 다 시간에 쫓기지 않도록 많은 여유를
갖고 정하도록 하자.
너도 한번 생각해 봐.
그동안 키는 좀 컸는지 모르겠다.
수련회는 또 얼마만큼이나 즐거웠는지, 사고는 없었는지 말야
여름 방학 계획 또한 착실히 이행됐는지?
나의 여름 방학 계획은 보다 건강해지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 어느 때보다도 충실히 지켰던 것 같애
그리고 각자의 성격을 알고자 했는데
이렇게 지면 위에 쓸려고 하니까
내 성격을 알 듯 말 듯하는데
성격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난 사람 즉 人間이 인간이 죽는다는 걸 굉장히 즐거워해
하지만 너 만큼은 제외야
그리고 또 하나 친구를 골라 사귀는 편이야
결국 이 성격 때문에 고등학교에 들어와서 진정한 친구는 하나도
사귀지 못했지만
이만하면 내 성격을 조금은 파악했겠지 실망했니?
그런 너의 마음을 그리며
안 - 녕
80 08 27 whea Geuing~
(이름도 아니고 지명도 아니고 스펠링이 이게 뭐지?)
발신 주소가 없지만 인천에서 보낸 것임을 본문을 통해 알 수 있다.
지난번 그 여학생인가 하고 보니 아니다. 동갑내기 여학생 같다.
교회여학생 같기도 하다. (그땐 여학생 만나러 교회오빠가 되었을 때인 듯. 지금은 무교임)
발신 주소도 이름도 없이 “O가” 이렇게 적혀있다.
특별한 내용은 없다
둘 사이는 서로 알아 가고 싶어 하는 단계인 것 같다.
편지 내용은 보니 이상한 여학생이다.
친구를 가려 사귀고, 고등학생이 되었는데 진정한 친구가 하나도 없다고 한 걸 보면....
그 시대에는 없는 단어였던. 은둔형 외톨이 느낌도 있어 보인다.
그 시절 나도 내성적이고 우울을 갖고 있었지만, 외톨이거나 친구가 없지 않았다.
오히려 친구들과 다 같이 모여 공부하고, 밥 해 먹고, 방학이면 같이 라디오 듣다가 같이 자고, 부모님들도 서로 다 아니까. 우리 친구들끼리는 그랬는데.......
그 시절은 친구를 가려 사귀고 (물론 어울려 다니고 더 친하고 그런 것은 있었지만) 왕따 시키고 이런 일은 아예 몰랐었는 데 있었나? 있었다 해도 아주 드문 일이다.
물론 편지가 진실은 아니다. 일부러 자신은 외톨이인척 관심받고 싶은 마음을 그렇게 썼을 수도 있다.
글도 과장하고 엄살도 피우고 하는 거니까.
“난 사람 즉 人間이 인간이 죽는다는 걸 굉장히 즐거워해
하지만 너만큼은 제외야”
그래도 이 부분은 뭔가 섬뜩하다.
그 나이 때는 삶과 죽음 생각하고, 고뇌하고 어두운 생각이 찾아오는 시기이므로, 이해는 한다.
그래도 아무리 글쓰기가 미숙하다고 해도 즐겁다고 하다니, 표현이 서툴러서 그런 거라고 이해하려고 해도 기이하다. 왠지 이 여학생은 지금 이상한 아줌마가 되어있을 거 같다 .
인천은 연고도 없는데 인천여학생들이 어찌 편지를 보내나. 친구가 있었나.단체미팅을했나 헌팅을 다녔나? 아무튼 무지 놀았구나. 그러니 재수 삼수를했지 에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