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 for Dirty

더러워도 괜찮아. 그건 사람들의 편의적인 발상일 뿐이니까.

by 해니

음식을 던지거나, 우유를 쏟아 놓고는 “더러워”라고 엄마에게 알려 주는 걸 보면 아이는 이제 더러운 상태가 어떤 것지 아는 모양이다. 대견하다 생각하며 재빨리 걸레를 가지고 가면, 아이는 날 보며 환하게 웃는다. ‘지지’를 손으로 뭉개고 있는 중이다. 엄마는 당장 소리를 지르고 싶은 것을 억누르며 말한다. “칠복아, 더럽다는 건… 만지지 말라는 뜻이야.” 엄마의 편의성 정의다. 무릎 꿇고 엎드려 걸레질을 하는 동안 아이는 또 다른 ‘지지’를 찾아 떠난다.


아이에게 더러움은 모험이다. 재미있고, 만져 보고 싶고, 탐구해야 하는 것. 엄마가 와서 치우기 전에 빨리 해야 하는 신나는 경험이다. 부스러기는 흩고, 액체는 쏟는다. 뭉클뭉클한 것은 손으로 휘젓고, 찐득찐득한 것은 뭉갠다. 고기가 더 멀리 날아가나, 감자가 더 멀리 날아가나 실험해 본다. “더러워! 더러워!” 아이가 소리치는 것이 들린다. 아, 안돼! 엄마는 또 달려간다. 사태가 더 심각해지기 전에.


그런데 더럽다는 건 건 정말 뭘까? 아기를 낳기 전엔, 아기가 입에 넣다 뺀 것을 먹는 건 정말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쉬야 세례, 응아 세례, 토 세례는 어떤가. 하지만 엄마가 된 지 약 2년이 지난 지금, 이젠 이런 것들이 더럽다는 사실 자체를 망각했다. 기저귀에 입체적으로 솟아 있는 응아를 봐도, 얼른 치워야 한다는 생각만 한다. 예전엔 화장실에서 손에 뭐가 조금만 묻어도 몇 번이나 비누로 씻고, 그래도 하루 종일 기분이 찝찝했는데.


사실 난 깔끔한 사람은 아니다. 우리 엄마도 알고, 남편도 알고, 주변 사람들도 아는 사실이다. 그건 내가 옷 어딘가에 뭘 묻히고 있을 수도 있고, 가방이나 핸드폰 모서리가 꽤 닳아 있고, 심지어 물기 없는 바닥에 떨어진 과자 정도는 눈 깜짝 안 하고 주워먹을 수 있는, 여유로운 마음씨의 소유자란 뜻이다. 음식에서 머리카락을 발견했다? 조용히 제거하고 식사를 마친다. 상황에 따라 파리까지도 용납 가능하다. 꼭 자랑은 아니지만.


이렇게 여유로운 마음씨의 소유자로서, 나는 깔끔한 사람들이 때로 폭력적이라 느낀다. 그들은 깔끔함을 강요하는 데 익숙해져 있다. 매우 잘생긴 남자가 얼굴에 묻은 무언가를 아주 젠틀하게 떼어준다거나 하면 좋겠지만, 보통은 타박 내지는 등짝 스매싱이다. “넌 왜 이런 걸 묻히고 다니니? 칠칠치 못하게.” 그들이 거의 경멸에 가까운 눈길을 보낼 때마다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 뭘 그렇게까지…. 란 생각이 든다. 인생을 살다 보면, 옷에 짬뽕 국물이 조금 튀는 일 정돈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 아닌가.

1 dirty.jpg 현빈이라면 용서하겠다. (출처: http://www.polinews.co.kr/news/article.html?no=67841)


깨끗하다는 것, 또는 더럽다는 것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다. 디테일하게 들어가면, 수건은 세탁기에 따로 돌리고 속옷은 매일 손빨래한다는 사람들이 있고, 색깔 분류도 안 하고 세탁기 용량과 옷감만 신경 쓰는 사람들이 있다. 집 밖에선 대변을 못 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누군가의 대변이 똬리를 튼 변기에 천연덕스럽게 물을 내리고 앉는 사람도 있다. 삼겹살은 기름이 튀기는 것이 싫어서 주말만 먹는다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그런 생각은 꿈에도 해 보지 않았다는 사람도 존재한다. 빨래는 전자, 삼겹살은 후자라는 사람이나, 화장실은 후자, 삼겹살은 전자라는 조합도 있을 것이다. 더러움엔 기준뿐 아니라 기호도 존재하니까.


나도 내 나름의 더러움에 대한 기준과 기호가 있다. 먼저 배설물. 침, 땀, 토 같은 것들은 만지거나 냄새를 맡거나 보는 것 모두 싫다. 괜찮다고 생각했던 남자 선배가 다한증이 있다는 것을 알고 이성 범위에서 멀리 제외시킨 적이 있는데, 모두 비슷한 경험이 있지 않을까?


이런 질문은 어떨까. 만약 밀폐된 공간에서 10분 정도를 견뎌야 한다면, 지독한 암내와 지독한 방귀 중 무엇을 선택하시겠습니까? 나는 방귀다. 방귀가 차라리 인간적인 느낌이다. 좀 이상한가? 물론 암내를 택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영화 <박쥐> 엔, 목사에서 흡혈귀로 변한 송강호가 친구의 아내인 김옥분과 첫 섹스를 하며 그녀의 겨드랑이를 핥는 장면이 있는데, 박찬욱이라는 대감독의 지시인지, 송강호라는 대배우의 판단인진 몰라도, 굉장히 적절했다. 흡혈귀의 섹스라면 분명 그럴 법하다는 오싹한 느낌이 전해져 온다. 그들이라면 방귀보다 암내를 선택할지도 모른다.


질문 하나 더. 남이 사용했던 컵이나 물병을 쓰는 데 전혀 거리낌이 없는지? 난 티 내지 않으려 노력은 하지만 좀 신경이 쓰인다. 남이 먹던 음식을 먹는 건 그보다 거부감이 덜한데, 그래도 짜장면은 별개다. 짜장면을 먹을 때, 처음 비빌 때는 약간 빡빡했던 소스가 먹을수록 점점 부드러워지는 이유를 아는지? 그것은 짜장면의 녹말이 침과 반응하여 녹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 이후로 남이 먹던 짜장면은 먹고 싶지 않아졌다. 아는 게 병이라는 건 이럴 때 쓰는 말이지.


또 하나 더럽다고 생각하는 건, 음식물 쓰레기다.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러 가는 고통이야 말해 무엇하랴. 그 냄새를 뭐라 설명해야 할까? 시큼하면서도 날카로운 그 냄새. 냄새가 나지 않아도 싫다. 싱크대 바닥에 모여 있는 밥알과 고추 가루와 기타 등등. 손으로 그걸 모아 쓰레기통에 가져가야 하는데, 나, 떨고 있니?


사실 이런 것들은 대부분이 더럽다고 동의할 것이다. 여기까지 참고 읽은 깔끔한 분이 있다면 이럴지도 모른다. 누구나 배설물이나 더러운 음식을 싫어하는 것은 살아 남기 위한 본능이다. 깨끗하고 싶어 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라고 말이다. 본능, 나는 그것에 아주 충실한 두 종류의 사람들을 잘 안다. 아기와 치매 노인. 이들은 배설물이나 음식의 더러움에 연연하지 않는다. 특히 아기에게는 모든 것이 호기심의 대상이다. 진흙, 구정물, 코딱지, 음식, 벌레….. 뭐든 만져 보고 경험해 보고 싶어 한다. 이런 것들은 사실 아이의 안전에 별 해를 끼치지 않는다. 암내 나 방귀 냄새, 남의 침이나 땀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우리가 무심코 쓰는 세제나 약품, 식품 첨가제가 더 해로울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른들은 진흙이나 흘린 음식을 더럽다고 하고, 세제는 더럽다고 하지 않는다. 심지어 더러움을 접하면 무심코 구역질을 하거나, 더러움을 무서워하는 병도 있다.


더러움에는 사람이 문명화되면서 버린 야생적인 것들이 있다. 어릴 때 비가 오면 나는 진흙으로 댐을 짓고, 경단을 만들며 놀았다. 재미있는 게 보이면 아무 데나 주저앉았다. 그렇게 놀다 보면, 집에 돌아온 내 옷은 흙 범벅이었다. 옷이 더러워지는 것을 신경 쓰기 시작한 것은 언제였을까? 누군가가 맘대로 더러움에 대한 기준을 세웠고, 거기에 따르지 않으면 사람들이 손가락질을 한다. 흰 옷을 입는 것이 불안해지고, 떡볶이를 먹을 때는 떡볶이 맛이 덜해질 정도로 조심하게 된 건 그들에게 잘 보이고 싶다고 생각하기 시작했을 때부터다. 하지만 정말, 무슨 상관이람. 일부러 머드 축제 같은 데 가서 온 몸을 진흙 투성이로 만들며 즐거워하는 어른들은 자신의 순수했던 시절을 그리워하는 것이 아닐까?


아이가 더 어릴 때는 아기 식탁에서 시리얼로 떡을 만들어도 그냥 뒀다. 고무 찰흙보다 더 싸고, 안전하니까. 그런데 이젠 식탁뿐 아니라 벽이나 카펫 바닥에도 자유자재로 저지를 수 있을 만큼 자랐으니, 더 이상 더러움을 즐기게 내버려 두기만 할 순 없다. 엄마 아빠가 청소라는 노동을 조금 덜 할 수 있게 협조를 해줬으면 한다. 하지만, 아직 말을 제대로 알아듣는 나이가 아니니 고민스럽다. 어떻게 해야 더러움이란 대체로 누군가의 편의적, 주관적인 개념일 뿐이고, 그것을 무서워할 필요는 없으며, 감당할 수만 있다면 충분히 모험을 해도 괜찮다고 가르쳐 줄 수 있을까. 그리고 사실은 착하다거나 예쁘다거나 하는, 앞으로 사람들이 그를 판단하게 될 별거 아닌 기준들도 마찬가지라는 것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