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중요한 제 2 언어
언어는 그 세계를 열어준다. 그렇다면 우리가 가장 먼저 배워야 할 언어는
아이가 요즘 한국 유치원을 안가니까 집에서도 계속 영어로 재잘거리고 있어 티비를 사서 뽀로로라도 보여줘야 하나 걱정 중이다. 한국 엄마와 영어권에 살고 있으니 어쨌든 한국말과 영어는 모국어로 했으면 하는 바람인데..
거기에 하나 외국어를 한다 치면 중국어를 했으면 했다. 한국어를 이해하는데 도움도 될 테고, 배워 두면 분명 돈벌이도 그렇고 쓸모가 많을테니... 근데 내년에 들어갈 학교는 원래 이태리어를 한다고 해서 '...참내 오페라 가수 될 것도 아니고. 하지만 유럽어 하나 하면 영어에도 도움이 되긴 하겠지.' 이렇게 납득했는데, 설상가상이랄까, 옆집 엄마와 이야기 해 보니 이 학교는 최근 방향을 바꾸어 초등 저학년은 오슬란 (호주 수화)을 한단다. 아니 오슬란이 무슨 외국어여. 성인이 되어 배워도 되지 않나. 언어 습득 능력이 최고조인 시기는 한정돼 있는데 이런 프라임 타임을 좀 비효율적으로 쓰는 거 아닌가, 이 눈부신 인공 지능의 시대에 통번역보다 더 먼저 없어질 것이 수화가 아니겠는가 등등의 생각이 들었던 게 사실이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외국어로 먹고 살았고 어쩌다 외국어를 일상적으로 사용해야 하는 곳에 살고는 있지만, 내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건 th나 r 발음도, to 부정사도, 심지어 have p.p.도 아니다. 탐과 제인이다. 여기 말고 다른 세계, 다른 관습 속에 사는 탐과 제인을 상상하고 이해하려 노력하는 것.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 언어는 사전과 문법책의 집합이 아니라 그냥, 새로운 세계다. 언어는 새로운 세계를 열어 준다. 다른 세계에 있는 타인을 appreciate (진정 이해하다, 감사하다, 즐기다) 하게 해준다.
오슬란을 통해 나와 다른 사람의 상황에 대한 이해나 의식을 배우는 것 역시도 새로운 세계를 여는 일일 것이다. 감수성에도 학습의 프라임 타임이 있는진 모르겠지만 어릴 때 배우면 좋은 것임에는 확실한 것 같다. 점점 더 어린 나이에 인터넷을 접해 공공의 공간에서 혐오 표현을 쏟아 내는 아이들... 혐오는 이 눈부시게 발전하는 세상의 가장 심각한 이슈가 되고 있다. 자기의 좁은 조건과 상황을 근거로 남을 제멋대로 판단하는 것. 어떤 댓글이나 글을 보다보면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 든다. 어떻게 이렇게 남의 입장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쓸 수가 있지? 이런 분들은 감수성 계발의 프라임 타임을 이미 놓친 걸까? 나이가 많든 적든, 이런 사람들이 많아지는 걸 보면, 감수성은 순수나 연륜이 주는 선물이 아니라, 의식적인 노력, 바로 교육과 훈련의 산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뭐 사실 중국어, 성인 돼서 해도 된다. 어차피 중국어는 중국 사는 중국인들이 더 잘할 거고. 진짜 중국어 기술이 필요하면 그 몇 십억 중 한 명 갖다 쓸 거다. 하지만 뜻이 있고 태도가 있고, 홈그라운드에서 쌓은 것 까지 있다면 액센트 있는 언어로도 얼마든지 활동할 수 있다. 그리고 아무리 중국이 날고 기어도 영어로 쌓아 온 현대 문명을 생각할 때 영어가 갑의 언어 위치를 잃는 날은 아마 인공지능이 통역을 진정 자유롭게 해주는 날일 것이다. 그 때 누가 뭘로 돈을 벌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그래서 공자님이 말씀하셨나 보다. 배움의 목적을 돈으로 삼는 이는 소인이라고... (죄송합니다. 그게 바로 저네요.)
언어 뿐 아니라 공부는 지식 뿐 아니라 접근 방법, 삶의 태도가 아닐까 한다. 영어를 배우면 자연히 영어권 사람들의 어떤 모험 정신, 오만함, 자존심, 개인주의, 그들이 겪은 혁명과 압박들, 인종주의 같은 현재의 문제들을 알게 되고, 한국어를 배우면 한국인의 근면함과 정이 가득한 문화, 군대 문화, 급한 현대화 과정과 사회적 괴리 등등을 알게 된다. 알고 매일 접하면 결국엔 반드시 스며드는 것이니 공부는 사람을 변하게 한다. 과학과 수학을 배우면 논리적 사고, 그림을 배우면 관찰력을 배우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라는 글이 있다. 베이컨인가.) 그런 의미에서 사실, 요즘의 중국 정부와 공자학원 (호주 학교에 돈을 퍼주면서 슬쩍 교재에 중국 정부 사상을 끼워넣는)을 생각하면 그냥 그 세계는 중국어로는 열지 않는 것이 좋을지도... -_-ㄱ
근데 미국 수화, 호주 수화, 한국 수화 이렇게 국가마다 수화가 따로 있다는 걸 아셨나요. 생각해 보면 당연하긴 하지만. 수화 사용자들도 피할 수 없는 외국어 학습의 험난한 길.... 다들 힘냅시다...
+이 글을 쓴 지 2년 여가 지난 지금, 우리집 어린이는 물론 주변 어린이들 모두가 오슬란을 정말 좋아한다. 무엇보다도, 재미있나 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