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은 자란다
바라보는 것만으로 널 지켜 줄 수 있다면 좋겠지만.
엄마는 고등학교 때 외삼촌과 상경하여 서울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시청에서 근무하셨다. 당시 당연했던 결혼 퇴직 후 나와 내 동생을 낳고 다시 엄마가 출근했을 때는 5살 때쯤인가. 무슨 일을 하셨는진 모른다. 어쨌든 그 때 한 두 달 정도 외할머니께서 집에 와 주셨는데 반짝반짝 빛나는 100원을 매일 용돈으로 주셔서 친구와 뽑기와 씨-씨 정을 사 먹었다. 파격적인 금액이었다.
집이 망해서 (생각하면 그리 망할 것도 없었는데) 산동네로 이사한 후 엄마는 여러 가지 부업을 하셨는데 주로 동네 아주머니들과 모여하는 인형, 리본 등의 제작이었다. 이후 재봉틀을 장만하여 재봉틀 알바도 하시고 가죽 붙이기 알바도 하셨는데 나는 엄마가 하는 일을 같이 하던가 그냥 옆에서 내 나름대로 놀았다. 이후 사무실 빌릴 돈이 없어진 아버님이 집에서 홈 비즈니스를 시작해서 엄마는 당연한 듯 직원 1로 편입. 초등학생이던 나와 동생은 팩스 동보 전송과 천리안을 마스터하고 중학생 때쯤엔 사무실 빌릴 돈이 생겨 엄마는 다시 출근이란 걸 하시게 됐다.
처음엔 집에 갔는데 아무도 없어서 좀 착잡했던 기분... 그러나 뭐 혼자 있고 싶은 사춘기였고 맞벌이 가구의 아이들이 그렇듯 곧 적응했다. 업종 특성상 항상 저녁 전에 퇴근하셨는데 오히려 학원 때문에 내가 저녁에 집에 없는 상황으로 고등학교까지 쭉. 점심 저녁을 직접 싸서 등교한 게 그나마 내가 했던 기특한 일이고 그 외에는 손에 물 묻히는 일 없이 적당히 속 썩이면서 다녔다.
어제부터 아이가 아파서 시들시들한 관계로 둘이 누워서 티브이 보다가 밥 차리고 과일 깎고 약 주는 하루를 보내다 애가 잠든 후 일을 좀 하다가 이제 월요일이 되니 애가 얼마나 아픈지 눈치를 보며 나가야 되나 말아야 하나 이러고 있다.
엄마가 일을 하든 부모가 생계형 사업을 하든 아이들은 그냥 그러려니 하며 알아서 크는 게 아닌가 싶다. 나와 동생이 천리안으로 기사 업데이트를 확인하고 팩스를 보낸 게 리얼한 회사 놀이였던 것처럼...
대학 때 어머니가 항상 가정 주부셨던 친구 집에 가자 친구가 물을 쟁반에 받쳐 와서 코페르니쿠스적 충격을 받으며 내 인생에 빠진 것에 대해 생각한 적이 있는데 그 친구는 전화로 짜장면 배달시키는 것도 수줍어했었다. 나?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전화 응대를 해 온 터라... 대학교 때 텔레마케터 알바 탑 되는 줄. 그러나 그 후로 또 10년이 지나 나는 아이를 위해 과일을 깎아 접시에 예쁘게 담아 주는 걸 고민하는 엄마가 됐고 (이전 같으면 그냥 도마에 먹거나 자르면서 먹거나 자르지 않음) 그 친구는 프랜차이즈 점장으로 풀타임 접객과 판매를 하고 있다.
아이들은 자란다. 어른이 아이를 보호하긴 하지만 한 아이의 특별한 성장통은 발생부터 끝까지 그들의 몫이고 어른은 손이 닿지 않는 깊거나 높거나 먼 곳을 바라보면서 슬퍼하거나 기뻐할 뿐인가 보다. 그렇게 기다리면서 어른도 자라나 보다. 우리는 우연히 나란히 서게 된 나무들 같다. 어젯밤 식은땀을 흘리며 앓는 아이의 머리와 배를 쓸어주며 그런 생각을 했다. 영상 통화로 보면서 말을 삼키는 우리 엄마도 아마 그런 생각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