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에 차례라면 지긋지긋할 사람도 많겠지만, 나는 요 몇 년 자발적 차례를 지내고 있다. 그것도 외할머니만. 친척 하나 없는 타국에서, 항렬이든 뭐든 따져봐도 내가 지낼 필요가 없는 행사를 하는 것은 그냥 순전히 자기만족이다. 물론 거창한 상차림을 하는 건 아니고, 그냥 집에 있는 것들을 구색만 맞춰서 상에 올리고 향만 피운다. 술은 그때그때 있는 걸로 하는데, 작년엔 럼, 올해는 셰리를 올렸다. 외할머니, 이게 스페인 산 셰리랍니다. 그리고 이건 호주 특산물 (?) 팀탐이에요. 아이가 올리자고 해서 올린 거예요. 그리고 할머니가 좋아하시는 토마토도 올렸답니다. 이건 바인 토마토라서 그냥 토마토보다 향기로워요.
외할머니는 연세가 많으셨다. 엄마가 오 남매 중 막내라 첫째 오빠와 스무 살에 가까운 나이 차가 있었기 때문에, 엄마는 어릴 때 젊고 예쁜 진짜 엄마가 당신을 데리러 오는 공상을 즐겨하셨다고 한다. 하지만 외할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십여 년 정도를 모신 건, 엄마였다. 다섯 남매 중 셋이 아들이었고, 어려서 죽은 오빠와 쉰 즈음 돌아가신 첫째 오빠를 제외해도 남은 아들이 있고 언니가 있었는데, 어떻게 막내딸인 엄마가 외할머니를 모시게 됐는가. 거기에는 여러 가지 사정이 있었을 테고 나는 그 빙산의 일각밖에 모르지만, 어쨌든 외할머니- 친할머니와는 교류가 없다시피 했고, 일찍 돌아가셨기 때문에 내게 있어 그냥 할머니-는 돌아가시기 전까지 내 방에서 지내셨다.
호주 유학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할머니는 거기 날씨가 어떤지 물어보셨다. 제가 있던 데는 사계절 너무 더웠어요, 그랬더니 할머니 말씀, 그럼 철마다 옷 정리를 안 해도 되니 좋겠구나. 살아생전 평생 누구를 돌보고 뒤치다꺼리를 하셨던 분의 감상이었다. 언젠가 어느 절의 비구니 스님 (신기가 있어서 어릴 때 절에 보내지신 분이라 한다)께서 할머니를 보고, 평생 병수발을 할 팔자라고 했다는데, 실제로, 할머니는 젊어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병수발을, 시어머니 병수발을, 뇌졸중 후유증을 얻으신 큰 며느리 병수발을 하셨다. 그리고 환자나 다름없던 사위(=우리 아버님)의 온갖 험한 꼴을 보셨다. 그래선지 할머니의 허리는 아주 옛날부터 굽어 있었는데, 일제 강점기에, 동네에 호랑이가 나타났던 시대를 겪으신 분들이 허리가 굽는 건 드물지 않았지만, 워낙 체격이 왜소했던 분이라 할머니의 키는 내 가슴께밖에 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 작은 체구는 집 안에서 종종 재발랐다. 할머니는 모시 바지저고리를 지어 자식들과 배우자들에게 나눠 주셨고, 기제사 때는 맨 손으로 긴 절편에 참기름을 쓱쓱 문지르셨다. 동생이 생겼을 때 와 주신 분도 외할머니였고, 내 생일을 기억해 주신 유일한 친척도, 너는 나라에서 큰 일을 할 거라고 하셨던 분도 외할머니였다. 어쩌면 할머니의 허리는 아래만, 쓸고 닦을 바닥과 병자와 아이들이 있는 아래만 보다 보니 그렇게 진화한 걸지도 모른다.
어디 갖다 놔도 뒤지지 않을 콩가루인 친가와는 달리 외가는 선산도 있고 족보도 있고 외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을 땐 친구들이 조문을 읽느라 밤을 새웠다는 선비 집안이었는데, 그래서 외할머니는 글을 배우지 못하셨다. 할머니는 한글을 독학으로 익히셨고, 핸드폰이 없던 시절, 자녀들, 친척들의 이름과 전화번호를 큰 글씨로 빼곡히 적은 전화번호첩을 가지고 계셨다. 그리고 공부하는 여자들을 예뻐하셔서, 병원에 입원하셨을 땐 간호사 선생님들이 할머니를 아주 살갑게 모셨다는 말을 들었다. "야야, 어쩜 그리 공부를 잘했노, 간호사 공부가 되지 않드나, 병원 일이 고될 텐데 이렇게 곱고 착하니 참 장하다." 회진 때마다 분명 이런 말씀을 하셨겠지, 손마디가 굵은 손으로 그녀들의 손을 두드리며. 할머니는 안동 근처의 말을 쓰셨고, 고등학교 때 배운 고어에 가까운 문법을 쓰셨는데, 그 의젓하고 다감한 어투를 배우지 못한 게 아쉽다.
할머니가 우리 집에 오셨을 때, 엄마는 일을 하셨고, 나와 동생도 대학생이라 대체로 집에는 할머니 혼자 계셨다. 그래서 할머니는 집에서 혼자 하루하루 늙어가시다, 약한 치매를 맞으셨는데, 인격이 옅어지는 그때조차 아무도 원망하지 않으셨다. 할머니는 그런 분이었다. 밥알이 모래알 같다 하시면서도 두말없이 드셨고, 아버지가 난장을 부릴 때도 노여움에 부들부들 떠셨지만 끝내 나쁜 소린 한 마디도 않으셨다. 할머니와 같이 한 마지막 몇 년은 기억이 별로 없다. 6시 내 고향, 욕창 방지 매트의 바람 빠지는 소리, 그리고 주무실 때, 영혼이 빠져나갈 듯 크게 벌린 입에서 나던 오래된 쌀의 냄새 같은 것들 뿐. 그것은 할머니의 자그마한 몸 어딘가에 있던 암의 냄새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암도 치매도 할머니의 우아함을 훼손하진 못했다. 기력이 있으실 때부터 절에 가시면 할머니는 탑을 돌며 꼭 삼일만 앓다 세상을 떠나게 해 달라고 비셨다. 갑자기 죽으면 아이들이 놀라고, 길게 앓으면 보살피는 사람이 고생을 하니, 자손들이 마음의 준비를 하고 모일만큼 딱 삼 일을 앓다 죽는 것이 미덕이라 하셨다.
할머니가 누워만 계시는 시간이 점점 길어지자, 엄마는 할머니의 장례를 지내 드리기 위해 가톨릭에 입교하셨다. 가톨릭은 입교 절차가 까다롭고, 성당의 부부 프로그램은 지역구 단위로 이름난 문제 장년이었던 아버님을 개심시키진 못했지만, 어쨌든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엄마는 성당 분들의 도움을 받아 장례를 지내셨다. 그러나 어머니는 모두 용서하라는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해 이젠 성당에 다니지 않으신다.
지금 할머니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흰 저고리에 옥색 치마를 입고 곱게 미소 지으시는 모습이다. 팔순 즈음이신가. 희고 고운 피부에 쑥 들어간 큰 눈엔 웃음 주름이 잘게 따랐다. 신랑 얼굴 한 번 못 보고 혼인을 했는데, 첫날밤이 지나고 일어나니 방엔 아무도 없고, 밖에서 말소리가 들려 문 틈으로 살짝 밖을 내다보니 평상에 남자들이 앉아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그 중 아침 햇살에 가장 빛나던 남자- 그게 네 외할아버지였다고 말씀하실 때도 그런 얼굴이셨다.
할머니의 기제사는 외할아버지와 함께 문중에서 제대로 모시겠지만, 나는 나대로 차례를 지내며 할머니에 대해 아이와 이야기한다. 한복을 입고 A4용지에 지방 모양을 오려 한글로 외할머니라고 쓰게 한다. 외할머니는 나에게 단 하나뿐인 조부모대의 어른이고, 그래서 내 단 하나뿐인 역사이기 때문에, 아이의 역사이기도 하다. 2차 대전에 참전했다는 아이 친가의 할아버지 이야기만큼이나 말이다.
여담으로, 할머니의 보살핌을 받으시던 큰 외숙모는 할머니께서 돌아신 후 두어 달만에 갑자기 돌아가셨다. 어른들은 할머니가 큰 외숙모를 돌보는 가족들이 힘들까 봐 같이 데려가신 거라고 했다. 우리들은 염치없게도,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에도 우리를 보살펴 주시길 바라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할머니의 영혼이 이 먼 곳까지 와 주시길 바라는 이유도 같을지 모른다. 할머니, 설에는 싱글 몰트 어떠세요. 이곳은 멀지만 할머니는 비행기도, 자가 격리도 필요 없으시니까 잠시라도 들리실 수 있으시죠. 보고 싶어요.